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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지존의 왕관과 깊어지는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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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에 찍힌 붉은 인장이 달빛을 받아 차갑게 빛나자, 시우의 척추가 다시 한번 공포로 굳어버렸다.


무림맹주 제갈운의 직인이 찍힌 황금빛 서신. 그것은 무림맹의 공식 징집령이자, 한시우라는 일개 잡역부 출신 사기꾼에게 내려진 사실상의 사형선고였다.


‘남궁 영지 회합의 핵심 군사로 임명하겠다고? 미쳤어? 거긴 무림맹 감사단이랑 내로라하는 명문 세가의 고수들이 눈을 부릅뜨고 침을 흘리며 대기하는 마굴이잖아!’


시우는 당장이라도 서신을 찢어발기고 바닥에 뒹굴며 못 가겠다고 생떼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처소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들어온 철면장로 위지관과 사제들의 눈빛은 이미 광신적인 흥분과 경외심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이 삼엄한 징집령마저 대사형의 위대한 무위를 천하에 떨칠 영광스러운 기회로 보였던 것이다.


“과연 대사형이십니다! 무림맹주께서도 대사형의 무형검과 자비로운 성품을 전해 들으시고, 중원의 명운이 걸린 남궁 영지 회합의 구원자로 지목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위지관이 감격에 겨워 목청을 높이자, 시우는 침상 머리맡에 놓인 이 빠진 목검을 바라보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구원자는 무슨 얼어 죽을 구원자야! 나 진짜 무공 하나도 못 한다고! 제발 나 좀 그냥 놔줘!’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시우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품속에 넣어둔 낡은 가죽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그것은 고향 감자밭으로 돌아가기 위한 필생의 은퇴 자금인 ‘은자 50냥’이 들어있어야 할 주머니였다. 하지만 현재 그 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다. 위지관이 문파 대증축 공사를 한답시고 시우의 은자마저 전액 공사 예산으로 묶어버렸기 때문이다.


수중에 돈은 단 1푼도 없고, 몸은 허리 디스크로 만신창이인 상태에서 무림맹의 사지로 끌려가게 생긴 절체절명의 위기.


바로 그때, 처소의 낡은 창문이 은밀하게 열리더니 쥐새끼 같은 실루엣 하나가 방안으로 쏙 들어왔다. 청명현 상인조합의 조합장이자 영악한 잡화상, 장만복이었다.


“대사형! 소인 만복이옵니다! 밤낮으로 고생하시는 대사형을 위해 특별히 바칠 것이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만복은 쥐수염을 실룩거리며 품속에서 묵직한 가죽 상자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상자가 열리는 순간, 은은한 은빛 광채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상자 안에는 눈이 멀 것 같은 순은 화폐들이 가득 차 있었다.


시우는 동공을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며 침을 꿀꺽 삼켰다.


“만, 만복 사장…… 이것이 대체 무엇이오?”


“하하! 대사형께서 일전에 벽련지(碧蓮池)에서 피로를 푸시기 위해 하셨던 ‘족욕(足浴)’을 기억하십니까? 대사형의 발때와 기운이 스며들어 온천수로 변해버린 그 벽련지의 물을, 저희 상단이 병에 담아 ‘대사형의 정화 성수’라는 이름으로 외지 무인들에게 고가에 판매했습니다! 만독을 치유하고 내공을 증진시킨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불티나게 팔려나갔지요! 이것은 대사형께 드리는 공식 로열티 비자금, 무려 은자 백 냥이옵니다!”


시우는 어이가 없어 뇌 정지가 찾아왔다.


‘내…… 내 발가락 때 씻은 물을 병에 담아 팔았다고? 그걸 또 돈을 주고 사 마신 미친놈들이 있단 말이야?’


지독한 위생적 혐오감이 밀려왔지만, 눈앞에 쌓인 은자 백 냥의 유혹은 너무나 강력했다. 백 냥이면 고향 감자밭 두 마지기를 사고도 평생을 떵떵거리며 놀고먹을 수 있는 가공할 거액이었다. 시우의 뇌리에 번개 같은 도주 계획이 스쳐 지나갔다.


‘됐다! 문파의 퇴직금 50냥 따위는 이제 필요 없어! 이 돈만 챙겨서 오늘 밤 당장 야반도주를 감행한다!’


시우는 장만복의 손을 꽉 잡으며 가장 엄숙하고 차가운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만복 사장의 성의는 잘 받았소. 이 재화는 내가 좋은 곳에 쓸 터이니, 이만 물러가시오.”


“오오! 역시 대사형이십니다! 이 거액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시다니요!”


장만복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물러가자, 시우는 즉시 옷을 고쳐 입고 낡은 봇짐에 은자 백 냥을 쑤셔 넣었다. 심야의 고요함이 청명산을 덮었을 무렵, 시우는 처소 창문을 열고 뒤뜰 감자밭 구석에 숨겨둔 비밀 탈출로인 개구멍을 향해 소리 없이 기어갔다.


하지만 개구멍이 위치한 장미 수풀 근처에 도달한 순간, 시우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만 자빠질 뻔했다.


원래 잡초만 무성하던 그 개구멍 자리에, 황실의 웅장한 금색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번쩍이는 목조 초소가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초소 주변에는 서슬 퍼런 환도를 찬 황실 금위군 무사 열 명이 횃불을 든 채 사방을 철통같이 경계하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붉은색 제복을 입고 차가운 안광을 번뜩이는 일류 호위무사, 금위군 대장 강백이 서 있었다.


“누구냐! 대사형의 신성한 감자밭을 침범하는 자가!”


강백이 환도를 반쯤 뽑아 들며 포효하자, 수풀 속에 엎드려 있던 시우는 심장이 멎는 듯한 공포를 느끼며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나, 나요…… 강 대장.”


강백은 시우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검을 거두고 무릎을 꿇었다.


“앗! 대사형이시옵니다! 이 깊은 밤중에 어찌 처소를 나와 이 누추한 흙바닥을 기고 계십니까!”


시우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비굴하게 웃어 보였다.


“아…… 그게 말이오. 밤공기가 너무 좋아서, 내 손수 일군 감자밭의 흙냄새를 좀 맡아보고자 했소. 그런데 저 초소는 대체 무엇이오?”


강백은 감격에 겨워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역시 대사형이십니다! 무림맹의 사지로 떠나시기 전, 대지의 기운과 소통하며 마음을 정화하고 계셨군요! 저 초소는 주예린 옹주님의 특별 지령에 따라, 대사형의 소박하고 신성한 감자밭과 비밀 대피소(개구멍)를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 황실 경비 구역으로 지정한 ‘황실 안보 초소’이옵니다! 이제 그 어떤 자객도 대사형의 밭에 발 한 짝 들여놓지 못할 것입니다!”


‘누가 내 감자밭을 보초 서달래?! 내 개구멍 돌려내 이 빡빡이 군인 놈아!’


시우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절규하고 싶었으나, 뒤이어 들려오는 부드럽고 도도한 목소리에 혀를 깨물고 굳어버렸다.


“사형…… 이 추운 밤중에 어찌 도포도 제대로 걸치지 않고 나와 계십니까.”


화려한 황실 비단 망토를 걸친 절세가인, 주예린 옹주가 수풀 너머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시우를 향한 맹목적인 로맨스 필터가 장착되어 있었다. 예린은 따뜻한 털망토를 시우의 어깨에 정성스럽게 덮어주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사형께서 천하의 명운을 짊어지느라 밤잠을 설치시는 모습을 보니, 이 소매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이번 남궁 영지 회합에는 소녀가 직접 황실 가마와 백 명의 정예 근위대를 대기시켜 사형을 안전하게 모실 것입니다.”


시우는 잡힌 손에서 느껴지는 옹주의 부드러운 감촉보다, 전신을 조여오는 황실의 숨 막히는 감시망에 숨이 턱 막혔다. 돈은 가득 가졌으나, 한 걸음도 도망칠 수 없는 완벽한 황금 감옥에 갇혀버린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청명검종의 장문전 청명각 앞마당은 무림맹에서 파견된 감사 원로 제갈선과 위지관 장로, 그리고 배웅을 나온 수백 명의 사제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시우는 이 지옥 같은 징집을 피하기 위한 마지막 카드로, 허 의원에게 뒷돈을 주고 발급받은 ‘가짜 꾀병 진단서’를 위지관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장로님…… 보시다시피 내 기맥이 완전히 막혀 단전에 1푼의 기도 모이지 않는 무공 제로의 상태요. 전신 요추 관절이 어긋나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으니, 제발 무림맹주께 소환을 취소해 달라고 전해주시오. 내 몸이 이래서야 회합에 가봤자 짐만 될 뿐이오.”


시우는 휠체어에 비스듬히 누워 마른기침을 콜록콜록 뱉어내며 처절한 병자 연기를 시전했다.


하지만 제갈선 원로는 시우의 창백한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를 바라보며, 깃털 부채를 흔들며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아……! 대사형 한시우여! 문파의 영맥을 구원하고 모용세가를 제압하느라 전신의 영기를 모두 불태워 기맥이 완전히 폐색되는 치명적인 희생을 치르셨음에도, 천하의 의리를 위해 이 자리에 서 계시는군요! ‘무공이 없다’고 겸손해하시는 것은, 진정한 도(道)의 경지에 도달하여 힘의 겉치레를 버리신 무위자연의 증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위지관 장로 역시 눈물을 훔치며 소리쳤다.


“그렇습니다! 대사형께서 환자의 몸으로 천하를 구하려 하시는 이 숭고한 결단! 우리 청명검종 전 제자들은 목숨을 바쳐 대사형의 뒤를 따를 것입니다!”


“아니, 진짜 아프다고! 나 무공 진짜 못해!”


시우가 억울함에 비명을 질렀으나, 그의 목소리는 사제들의 웅장한 연호 소리에 흔적도 없이 묻혀버렸다.


“대사형! 대사형 한시우!”


주예린 옹주가 미소를 지으며 황실의 초호화 가마 문을 열었다.


“사형, 어서 오르시지요. 소녀가 남궁 영지까지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무림맹의 황금빛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황실의 웅장한 마차가 시우의 눈앞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고향 감자밭으로 갈 퇴로는 완벽하게 차단되었고, 이제 그보다 백 배는 더 위험한 음모와 칼날이 도사리는 남궁 영지라는 전장으로 강제 배달당할 일만 남은 것이다.


시우는 품속에 든 은자 백 냥 주머니를 꼭 쥔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깊은 탄식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난 그냥 감자나 키우고 싶었을 뿐인데…….’


그의 깊은 한숨 소리는, 연무장에 모인 이들의 귀에는 천하의 운명을 걱정하는 지존의 숭고한 침묵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제 가짜 대사형 한시우의 목숨을 건 두 번째 착각의 무대가 막을 올리려 하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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