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형 한시우, 어록의 시작
“으윽, 머리야…….”
한시우는 욱신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간신히 눈을 떴다. 사방에서 퀴퀴한 먼지 냄새와 오래된 목재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방을 둘러보니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거미줄이 대충 쳐진 천장, 구석에 쌓인 깨진 항아리들과 빗자루들.
그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은신처, 바로 청명검종 뒤뜰 창고방이었다.
“살았나……?”
시우는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뼈가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단전 부근이 기묘할 정도로 묵직하고 꽉 막힌 느낌이 들었다. 마치 뱃속에 단단한 시멘트 덩어리를 집어넣은 것처럼 기운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원래도 영맥이 막혀 무공을 못 하던 몸이었지만, 이제는 숨을 들이쉴 때마다 단전이 답답할 정도로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우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무공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지. 어차피 난 고향으로 돌아가 감자나 캘 몸이니까.’
시우의 머릿속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잠깐, 아까 그 엄청난 대폭발은 대체 뭐였지? 설마 문파가 통째로 날아간 건가? 만약 문파가 망했다면…… 내 퇴직금 은자 50냥은 대체 누구한테 받아야 하는 거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시우가 황급히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려던 그 순간이었다.
쾅—!
창고방의 낡은 나무문이 부서질 듯한 기세로 활짝 열렸다. 쏟아지는 햇살을 등지고 한 여인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청명검종의 청색 여제자 도포를 입고, 허리춤에 두꺼운 공책과 붓을 대칭으로 차고 있는 소녀.
열혈 사매이자 광신도 사제의 선봉장, 진소희였다.
“대사형—!!!”
진소희는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무릎을 꿇으며 먼지 자욱한 바닥을 슬라이딩했다.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었고, 양 볼은 흥분으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는 시우의 침상 밑에 엎드려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대사형!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소매, 대사형께서 문파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시고 주화입마에 드신 줄 알고 매일 밤낮으로 눈물로 지새웠습니다!”
“어……? 사매? 잠깐만, 방금 나보고 뭐라고 불렀어?”
시우는 귀를 의심했다. 대사형이라니? 자신은 그저 빗자루질이나 하던 말단 잡역부가 아니었던가.
진소희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대사형이십니다! 철면장로 위지관께서 전 제자들 앞에서 선포하셨습니다! 대사형께서 졸면서 떨어뜨린 목검이 정확히 천기혈을 관통하여 문파의 막힌 천년 영맥을 뚫으셨다고요! 그리고 그 충격파를 온몸으로 받아내시며 제자들을 구하시고 기절하신 거라 하셨습니다!”
“……예?”
시우의 턱이 툭 떨어졌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졸다가 떨어뜨린 나무막대기가 영맥을 뚫었다고? 게다가 내가 몸을 던져 제자들을 구했다고?’
그것은 완벽한 개소리였다. 시우는 그저 조회 시간이 너무 지루해서 졸았을 뿐이고, 잠결에 손이 풀려 목검을 떨어뜨렸을 뿐이며, 영맥이 터질 때 그 폭풍에 날아가 가시덤불에 처박혀 기절했을 뿐이었다.
이 사실이 들통나면 어떻게 될까? 문파의 엄숙한 장로들을 사기 친 죄로 가죽이 벗겨져 청명산 호랑이 먹이로 던져질 것이 분명했다. 식은땀이 시우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시우는 침을 꿀꺽 삼키며, 인생에서 가장 진지하고 정직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태를 바로잡아야 했다. 지금 솔직하게 말하면 정상참작이 되어 파문당하고 은자 50냥을 받아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희 사매. 잘 들어. 아주 거대한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나 사실 무공 전혀 못 해. 기맥이 완전히 막혀서 단전에 기운도 안 모인다고. 방금 전에도 느껴봤는데 아주 시멘트처럼 꽉 막혔어. 그리고 나, 빗자루질도 제대로 못 하는 한심한 놈이야. 그러니까 제발 나를 대사형에서 해임하고 당장 문파에서 쫓아내 줘. 위로금 50냥만 주면 더 바랄 게 없어.”
시우는 처절하게 애원했다. 진짜 살고 싶어서 하는 백 퍼센트 진실된 고백이었다.
그러나 진소희의 반응은 시우의 예상과 완전히 엇갈렸다.
“앗……!”
진소희는 가슴을 움켜쥐며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눈에서 기어코 감격의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허리춤에서 두꺼운 공책을 펼치고 붓을 쥐었다. 손가락이 바르르 떨릴 정도로 깊은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이, 이럴 수가……! ‘나 사실 빗자루질도 제대로 못 해’라니요……! 형태를 버린 무형의 청소법, 즉 세상의 탁기를 쓸어내는 도(道)를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빗자루라는 도구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온 우주의 먼지를 마음으로 쓸어내신다는 뜻이었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로 물리적으로 청소를 못 한다고! 먼지만 더 날린다고!”
“오오! ‘먼지만 더 날린다’는 것은, 세상의 위선과 거짓을 뒤흔들어 백일하에 드러내겠다는 준엄한 경고! 그리고 자신의 기맥이 ‘시멘트처럼 꽉 막혔다’고 하신 것은…… 기운을 너무나 완벽하게 갈무리하여 겉보기에는 평범한 범인처럼 보이는 반박귀진(返樸歸眞)의 극의를 비유하신 것이로군요! 어찌 이리도 깊고 고결한 선문답을 내리시나이까!”
진소희의 붓끝이 종이 위를 초고속으로 날아다녔다.
[한시우 대사형 어록 - 제1장: 형태를 버린 쓸기법은 곧 세상의 탁기를 쓰는 대도(大道)이다. 스스로의 기맥을 바위처럼 단단히 닫아 무결함을 유지하니, 이것이 곧 반박귀진의 극치라.]
시우는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이 미친 사매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 말을 한국어로 듣고 있는 게 맞나?’
시우는 도저히 말로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행동으로 보여줘야 했다. 자신이 진짜 허접하고 무능한 일반인이라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 주면, 저 미친 망상 필터도 깨질 터였다.
“좋아, 직접 보여주지!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똑똑히 봐!”
시우는 침상 옆에 기대어 있던 낡은 나무막대기를 짚고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기합을 넣으며 목검을 크게 휘두르려 했다.
“합—!”
그러나 뇌진탕의 여파와 극도의 긴장감으로 인해, 시우가 발을 내딛는 순간 다리의 근육이 완전히 풀려버렸다. 무공이 전혀 없는 뻣뻣한 육체는 균열을 이기지 못하고 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어, 어어어?!”
중심을 잃은 시우는 바닥에 놓여 있던 청소용 물대야를 밟고 미끄러졌다. 뒤로 자빠져 머리가 깨질 위기에 처하자, 시우는 살기 위해 온몸을 버둥거리며 팔다리를 풍차처럼 마구 휘저었다. 몸이 기괴한 각도로 꺾이며 좌우 갈지자(之)로 요동쳤다. 간신히 창고 벽면의 기둥을 붙잡고 서서 헐떡였다.
“하아, 하아…… 봤지? 나 이렇게 엉망진창이야! 서 있지도 못한다고!”
시우는 땀을 흘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진소희는 이미 붓을 떨어뜨린 채, 입을 벌리고 굳어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경외심이 서려 있었다.
“이, 이것은…… ‘허허실실보(虛虛實實步)’……!”
“뭐?”
“방금 대사형의 신형은 분명 뒤로 넘어지는 듯하였으나, 팔다리의 기묘한 궤적이 공기의 흐름을 타고 인과율을 비틀어 회피하셨습니다! 물대야라는 장애물을 디딤돌 삼아 기류의 결을 따라 움직이시다니…… 의도하지 않은 듯하면서도 적의 모든 살기를 흘려보내는 궁극의 보법이 분명합니다! 소매, 대사형의 가르침에 무릎을 탁 치고 갑니다!”
진소희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붓을 주워 공책에 미친 듯이 휘갈겨 썼다. 시우의 엉망진창인 헛발질과 비틀거림이 졸지에 ‘인과율을 회피하는 전설의 보법’으로 박제되는 순간이었다.
시우는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논리적 소통의 완벽한 단절.
이 문파의 인간들은 이미 자신을 ‘천재’라는 거대한 감옥에 가두어 놓았고, 무슨 짓을 해도 그 감옥의 벽을 부술 수 없었다. 진실을 말하면 겸손이 되고, 실수를 하면 신의 한 수가 되는 이 지독한 억까적인 세상 속에서 시우가 느낀 것은 만성 피로와 극심한 공포뿐이었다.
시우의 얼굴이 귀찮음과 절망, 그리고 들통나면 죽는다는 공포로 인해 급격히 어둡게 굳어졌다. 반쯤 감긴 졸린 눈빛과 일자로 다문 입술.
시우 특유의 ‘오해 유발 아우라’가 창고방 안을 무겁게 짓눌렀다. 진소희는 그 차가운 정적 속에서 대사형의 압도적인 살기와 세상의 번뇌를 초탈한 자비심을 동시에 느끼며 숨을 죽였다.
“……귀찮다. 다 필요 없으니 그냥 잠이나 자자.”
시우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침상으로 기어 들어가 먼지 쌓인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진짜로 현실을 도피하고 싶었다.
진소희는 이불속에서 들려오는 그 한마디를 듣고,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냥 잠이나 자자……!’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세상의 모든 헛된 명예와 투쟁을 한낱 꿈으로 여기시고, 만물을 무(無)로 돌려보내 정화하시겠다는 위대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선언이로구나! 대사형께서는 이미 속세의 번뇌를 초월하여 잠이라는 궁극의 참선에 드신 것이다!’
진소희는 조용히 흐느끼며 어록의 첫 페이지를 완성했다.
[대사형의 교시: “그냥 잠이나 자자.” - 이는 세상의 모든 집착과 투쟁을 버리고, 무위의 상태로 돌아가 천지의 기운과 하나가 되라는 궁극의 심법이다.]
그녀는 대사형의 삼매 수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살금살금 창고방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이불속에서 훌쩍이던 시우는 문밖에서 들려오는 기묘한 소리에 눈을 떴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웅장하고 일정한 박자의 음성이 대연무장 쪽에서부터 메아리치듯 청명산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냥 잠이나 자자…….”
“그냥 잠이나 자자…….”
시우는 소름이 돋아 황급히 창문 틈새로 밖을 내다보았다.
대연무장 한가운데, 철면장로 위지관을 필두로 삼십여 명의 제자들이 일제히 바닥에 가사를 깔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눈을 감은 채, 시우가 내뱉은 불평을 주문처럼 외우며 집단 정좌 수련에 돌입해 있었다. 진소희는 옆에서 그 장엄한 광경을 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붓을 놀리고 있었다.
“미친…… 진짜 미친놈들이야……”
시우는 이불을 꽉 쥐며 덜덜 떨었다. 퇴직금 50냥을 받아 도망치기는커녕, 광신도 집단의 교주가 되어버린 이 비극적인 현실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시각, 대연무장 너머 음침한 소나무 숲 그늘 아래서, 청명검종의 이장로이자 야심가인 오진태의 차가운 눈빛이 시우의 처소를 향해 뱀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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