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주의 포옹과 가로막힌 감자밭
“아이고, 내 삭신이야…….”
아침 햇살이 창창하게 내리쬐는 청명검종 뒤뜰 창고방. 한시우는 침상에서 일어나려다 전신을 엄습하는 지독한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허리는 맷돌에 갈린 듯 뻐근했고, 어깨와 양팔은 물먹은 솜뭉치마저 들지 못할 정도로 무거웠다.
어젯밤 꿈속에서 수천 마리의 대왕 모기 떼와 사투를 벌이며 빗자루를 미친 듯이 휘둘렀던 대가였다. 무공의 ‘무’ 자도 모르는 평범한 범인의 육체로 밤새도록 격렬한 노동(실제로는 몽유병 청소)을 자행했으니, 근육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쥐를 잡았으면 잡았지 왜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픈 거야? 설마 그 사이에 자객이라도 다녀간 건가?”
시우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랫배를 만져보았다. 다행히 방광은 무사했고, 바지에도 대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품속을 뒤적였다. 고향으로 도망칠 유일한 자금이 될 은자 50냥을 담아두려 했던 낡고 텅 빈 가죽 주머니가 손끝에 만져졌다.
‘돈은 한 푼도 없고, 몸은 걸레짝이 되었고…… 그래도 오늘 밤에는 꼭 도망쳐야 한다.’
시우는 입술을 깨물며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섰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대연무장 중앙에는 인근 철검문의 문주 사도광과 그의 심복 장로 맹호가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철면장로 위지관이 서서 사도광이 바친 ‘철검문 귀순 및 영토 헌납 문서’를 엄숙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연무장 주변을 가득 메운 청명검종의 사제들은 축제라도 열린 듯 대사형의 이름을 목청껏 연호하고 있었다.
“대사형! 대사형! 한시우 대사형!”
“어젯밤 자는 동안 빗자루질 한 번으로 철검문을 굴복시키시다니! 참으로 무림의 살아있는 전설이십니다!”
시우는 멍하니 서서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어젯밤에? 빗자루질로 철검문을 이겼다고?’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꿈속에서 윙윙거리던 모기 떼를 쫓아내려 빗자루를 마구 휘두른 기억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헛짓거리가 일류 고수인 사도광을 항복시키고 가문 전체를 청명검종의 하급 지부로 귀순하게 만들었다니,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란 말인가.
위지관 장로가 시우를 발견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아아, 대사형! 어젯밤 몽유(夢遊)의 경지 속에서도 문파를 침공하려던 철검문의 사도광 일당을 단숨에 제압하시고, 그들의 가문마저 청명검종의 하급 지부로 귀속시키셨습니다! 이로써 청명검종은 청명현을 넘어 전 영지를 지배하는 거대 가문으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장로님…… 잠깐만요. 저는 그냥 청소를…….”
“그렇습니다! 대사형께서는 먼지를 쓰는 척하시며 적들의 숨통을 완벽하게 조이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물욕을 초탈하신 성자의 풍모로다! 대사형의 뜻을 받들어, 철검문이 바친 모든 영토와 재산은 청명검종의 대대적인 확장과 대사형의 안위를 지킬 경비대 창설에 전액 집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아니, 제 돈은요? 제 은자 50냥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시우가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위지관은 그저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허허, 역시 대사형이십니다. 가문을 대기업으로 키우는 이 중차대한 순간에도 오직 소박한 청빈함만을 연기하시다니요. 걱정 마십시오! 대사형의 그 숭고한 정신을 기려, 문파 뒤뜰의 감자밭을 세 배로 확장해 드리겠습니다!”
‘누가 감자밭을 늘려달래?! 내 퇴직금 50냥 내놓으라고, 이 미친 가스라이팅 장로야!’
시우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피눈물을 흘렸지만, 사제들의 우렁찬 함성 소리에 그의 비명은 흔적도 없이 묻혀버렸다. 이제 청명검종은 파산 직전의 가난한 문파가 아니라, 대기업 수준의 거대 세력으로 급성장하고 있었다. 즉, 시우가 ‘가난해서 망해가는 문파’를 핑계로 합법적으로 탈출할 명분이 완벽하게 소멸했다는 뜻이었다.
절망에 빠진 시우가 바닥에 주저앉으려던 바로 그 순간, 문파 정문 일주문 너머에서 장엄한 나팔 소리와 함께 황실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거대한 황금빛 가마 행렬이 들이닥쳤다.
둥! 둥! 둥!
웅장한 북소리와 함께 연무장을 가득 채운 것은 백색과 황금색 비단 전포를 입은 황실 근위대 금위군 무사들이었다. 그들의 중심에 서 있는 거대한 가마의 비단 휘장이 걷히더니, 백옥 같은 피부에 도도한 눈빛을 지닌 절세가인, 황실의 셋째 옹주 주예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예린은 가마에서 내리자마자 연무장 한가운데에 서 있는 시우를 발견하고는, 도도한 옹주의 품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비처럼 날아와 시우의 목을 끌어안았다.
“대사형! 나의 정인! 드디어 당신을 다시 만났군요!”
덥석.
시우는 옹주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숨이 턱 막혔다. 주예린 옹주는 비록 철부지였으나 황실 비전 태극보를 연마한 이류 수준의 호신술 고수였다. 그녀가 감격에 겨워 꽉 껴안는 힘은 범인인 시우의 갈비뼈를 으스러뜨리기에 충분했다.
“켁…… 옹, 옹주님…… 숨이…….”
시우는 얼굴이 보랏빛으로 변하며 캑캑거렸지만, 주변에서 이를 지켜보던 사제들과 위지관 장로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기 시작했다.
“보아라! 황실 옹주님의 뜨거운 포옹 앞에서도 대사형께서는 오직 차가운 부동심을 유지하고 계신다!”
“과연 만물을 포용하는 대도의 경지이로다! 황실의 권력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저 꼿꼿한 자세를 보라!”
‘꼿꼿한 게 아니라 뼈가 부러져서 굳은 거라고! 제발 이 미친 여자 좀 떼어내 줘!’
시우는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주예린은 시우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어젯밤 철검문의 기습을 자는 동안 빗자루 하나로 물리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내 한걸음에 달려왔답니다. 역시 내가 점찍은 정인답군요. 황실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이제 대사형의 신변은 우리 황실에서 직접 보호할 것입니다!”
주예린이 손을 가볍게 흔들자, 가마 뒤에 서 있던 붉은 제복의 일류 호위무사 강백이 거대한 환도를 찬 채 엄숙하게 걸어 나왔다. 강백의 서슬 퍼런 안광은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오줌을 지릴 만큼 매서웠다.
“금위군 대장 강백, 지존을 뵙습니다! 옹주님의 명에 따라, 오늘부로 저와 황실 정예 근위대 50명이 대사형의 처소와 일거수일투족을 철통같이 호위할 것입니다!”
강백의 웅장한 사자후가 연무장을 울리자, 시우의 등줄기에 얼음물이 쏟아지는 듯한 극도의 공포감이 몰아쳤다.
‘황실 근위대 50명이 나를 감시한다고? 그럼 내 야반도주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거야?’
시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강백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 강 대장…… 나는 그저 평범한 청명검종의 잡역부…… 아니, 대사형일 뿐이오. 굳이 황실의 귀한 군사들이 나 같은 사람을 지킬 필요는 없소. 그냥 철수하시는 것이 어떨지…….”
그러자 강백은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무릎을 꿇으며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아아! 자신의 위대한 신분을 숨기고 오직 서민과 대자연의 결실을 사랑하여 범인처럼 행동하시는 적강선(謫仙人)의 풍모로다! 이토록 겸손하신 분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황실 호위대의 영광입니다! 결코 철수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미친 과잉 충성 살수 녀석아! 제발 내 말 좀 곧이곧대로 들어라!’
시우는 절망에 차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날 오후, 강백의 황실 호위대는 즉각적인 작전에 돌입했다. 그들은 시우가 밤마다 야반도주를 하기 위해 처소 뒤뜰 구석에 눈물겹게 파놓았던 ‘비밀 개구멍’을 발견했다.
시우는 개구멍이 들통나 사기죄로 목이 날아갈까 봐 사색이 되어 구석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나 개구멍을 정밀하게 수색하던 강백의 안광이 돌연 번뜩였다.
“이, 이곳은……!”
강백은 개구멍 주변의 흙을 조심스럽게 만지며 경악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방위는 정확히 북서 삼십도. 크기는 성인 남성이 포복으로 지나가기에 가장 최적화된 각도다. 게다가 주변의 수풀이 기막히게 시선을 차단하고 있구나! 이것은 대사형께서 문파가 위기에 처했을 때 황실의 구원병을 은밀히 영접하기 위해 손수 설계하신 ‘비밀 안보 대피소’임이 분명하다!”
강백은 감탄을 금치 못하며 일어서더니, 대원들에게 호령했다.
“대사형의 이 깊은 지략을 헛되이 할 수 없다! 즉시 이 비밀 대피소를 황실 안보 구역으로 지정하고, 정예 근위대 10명을 상시 배치하여 24시간 철통 경비를 서도록 하라!”
“옛!”
시우의 눈앞에서, 그의 유일한 탈출구이자 희망이었던 비밀 개구멍 위에 황실의 붉은 깃발이 꽂히고 삼엄한 초소가 건설되었다. 무장한 군사들이 창을 꼬옥 쥔 채 개구멍 앞을 지키는 모습을 보며 시우는 영혼이 완전히 소멸하는 듯한 허탈함을 느꼈다.
‘내 개구멍…… 내 필생의 도주로가 황실 공인 초소가 되어버렸어…….’
돈은 묶였고, 문파는 대기업이 되었으며, 유일한 개구멍마저 군사들에게 점령당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억울함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시우는, 품속의 낡고 텅 빈 가죽 주머니—은자 50냥을 담으려던 꿈의 흔적—를 꼭 쥔 채, 유일한 마음의 안식처인 청명산 감자밭 구석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감자밭 주변 역시 황실 근위대원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서 시우를 향해 삼엄하고도 경외 가득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시우는 그 시선들을 무시한 채, 흙바닥에 주저앉아 호미를 쥐고 감자를 캐기 시작했다.
서러움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흐윽…… 집에 가고 싶다. 진짜 집에 가서 아버지랑 감자나 캐고 평화롭게 살고 싶단 말이다…….”
시우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져 감자밭의 흙을 적셨다. 그 눈물은 억울함과 절망, 그리고 은퇴의 길이 영원히 막혀버린 나약한 범인의 처절한 한탄이었다.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금위군 대장 강백은 깊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가에도 붉은 감동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아아…… 보아라. 대사형께서는 천하를 구하고 황실의 비호를 받는 정점의 자리에 오르셨음에도, 오직 대지의 기운과 백성들의 소박한 슬픔을 나누기 위해 저토록 눈물을 흘리며 흙을 만지고 계신다. 저것이야말로 만물을 보듬는 진정한 지존의 비애로다…….”
강백은 감히 대사형의 숭고한 정신을 방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허리를 구십 도로 숙이며 깊은 경배를 올렸다.
감자밭 한구석에서 흙 묻은 감자를 쥔 채 엉엉 울고 있는 시우의 머리 위로, 황실의 웅장한 깃발들이 바람에 휘날리며 서글프게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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