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검굴의 추위와 정화의 연기
“독수 당뇌가 보초들에게 끌려가며 남긴 사도광의 밀약서라니…….”
한시우는 어두컴컴한 주방 탁자 밑에서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채, 제 손바닥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 뱉어낸 만두의 끔찍한 쓰고 비린 맛이 아직도 혀끝에 맴도는 듯했다.
만약 자신이 그 만두를 평소처럼 한입에 삼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가 비전의 극독인 망우산이 단전을 얼려버리고 심장을 멈추게 했을 것이다. 자신이 미식가마냥 팽가의 요리 실력을 탓하며 뱉어내지 않았다면, 지금쯤 차가운 시체가 되어 마당에 누워 있었을 터였다.
소름이 쫙 돋았다.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 식은땀이 도포를 축축하게 적셨다.
‘여기는 지옥이다. 진짜 미친 지옥이야…….’
문밖에서는 철면장로 위지관과 사제들이 횃불을 높이 치켜든 채, 시우를 향해 거의 종교적인 광신에 가까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위지관은 당뇌의 품에서 수거한 철검문주 사도광의 밀약서를 손에 쥔 채, 분노로 온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대사형! 사도광 그 비열한 역도가 당뇌를 보내 대사형을 독살하려 한 명백한 물증이 여기 있사옵니다! 감히 우리 청명검종의 등불이자 무림의 구세주이신 대사형을 해하려 들다니, 이는 전 정파 무림을 향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습니다!”
“맞습니다! 대사형! 철검문을 당장 토벌해야 합니다!”
사제들의 우렁찬 함성이 주방 유리창을 흔들었다.
탁자 밑에 웅크리고 있던 시우는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왔다. 사도광의 밀약서가 발견되었으니, 이제 청명검종과 철검문 사이에는 피바람이 부는 전면전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전쟁이 터지면 가장 먼저 최전선에 서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대사형 한시우’였다.
‘내가 왜 전면에 서야 하는데? 난 무공의 무 자도 모르는 쌩초보 일반인이라고!’
은자 50냥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 평화롭게 감자 농사나 지으려던 소박한 은퇴 계획이 완전히 박살 나다 못해 가루가 되어 날아가고 있었다. 게다가 황실 하사금 1,000냥과 자신의 은자 50냥은 이미 위지관 장로에 의해 문파 대증축 공사비로 묶여 동결된 상태였다. 수중에 돈은 단 1푼도 없었고, 목숨은 매일 밤 자객들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도망쳐야 한다. 오늘 밤이 마지막 기회야.’
시우는 결심했다. 철검문과의 전쟁 소동으로 문파 내부가 극도로 혼란스러운 지금이야말로, 감시망을 뚫고 야반도주할 유일한 타이밍이었다. 마침 자신이 이전에 제정하게 만든 ‘대사형 수련 방해 금지령’ 덕분에, 보초 무사들은 시우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 처소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에만 배치되어 있었다. 자신이 만든 꼼수가 역설적으로 탈출의 완벽한 조건을 만들어준 셈이었다.
심야의 고요함이 청명산을 덮었을 무렵, 시우는 낡은 봇짐 하나를 등에 메고 처소의 창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짙은 안개가 산등성이를 따라 내려앉아 시야를 가려주고 있었다. 도망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날씨는 없었다.
“하느님, 부처님, 조상님…… 제발 이번에는 고향 감자밭으로 무사히 가게 해주십시오.”
시우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를 올리며 개구멍을 향해 몸을 굽혔다.
***
같은 시각, 청명산 초입의 어두운 수풀 속.
검은 야행복을 입고 날카로운 안광을 번뜩이는 사내들이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는 붉은색 검사 옷을 걸치고 오만한 표정을 지은 청년이 서 있었다. 철검문의 문주 사도광의 수석제자이자 이류 초입의 강자, 팽표였다.
팽표는 당뇌의 독살 음모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도광의 지령에 따라 정예 자객들을 이끌고 직접 시우의 목을 베기 위해 침투한 참이었다.
“수석님, 저기 보십시오. 대사형 처소의 창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밖으로 나옵니다.”
한 자객이 손가락으로 시우의 처소를 가리켰다. 팽표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형체를 주시했다. 과연, 낡은 봇짐을 메고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안개 속을 걸어가는 사내가 보였다. 낡은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좌우로 흐느적거리는 그 기묘한 실루엣은 영락없는 한시우였다.
팽표는 콧방귀를 꼈다.
“흥, 저 자가 바로 천년 영맥을 뚫고 백운하를 기권시켰다는 한시우인가? 소문과는 달리 기운의 흐름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군. 완전히 허점투성이의 범인처럼 보이지 않느냐?”
옆에 있던 노련한 자객이 긴장한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수석님. 저 자는 무색무취의 망우산마저 한 입 만에 간파하고 동물을 조종해 독수를 제압한 괴물입니다. 저토록 기운을 완벽하게 숨긴 채 밤중에 홀로 움직인다는 것은, 필시 우리 철검문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하고 유인하려는 고도의 함정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팽표는 자객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무협의 세계에서 진짜 강자들은 자신의 실력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법이었다. 저 무기력해 보이는 걸음걸이와 헐렁한 도포 자락이야말로, 자신들의 방심을 유도해 한 번에 몰살하려는 무서운 ‘허허실실’의 위장술일 터였다.
“좋다. 섣불리 덤비지 말고 거리를 두고 추적한다. 저 자가 어디로 향하는지 확인한 뒤, 가장 확실한 사각지대에서 일격에 목을 벤다.”
팽표와 자객들은 검을 꽉 쥔 채,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시우의 뒤를 은밀하게 쫓기 시작했다.
***
‘아이고, 여기가 어디야…….’
시우는 가시덤불을 헤치며 속으로 울부짖었다.
그의 고질적인 길치 본능이 또다시 발동한 것이었다. 분명 고향으로 향하는 남쪽 평탄한 하산길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사방이 험준한 바위벽으로 가러막힌 음산한 계곡 한가운데 서 있었다. 짙은 안개 때문에 방향 감각은 완전히 상실되었고, 산바람은 칼날처럼 차갑게 뺨을 때려왔다.
설상가상으로, 계곡 깊은 곳에서부터 뼈를 깎는 듯한 지독한 냉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전신이 사정없이 덜덜 떨렸고, 입술은 순식간에 보랏빛으로 변해갔다.
그때, 시우의 눈앞에 거대한 동굴 입구가 나타났다. 동굴 위쪽 바위벽에는 이끼가 가득 낀 거친 글씨로 ‘만검굴(萬劍窟)’이라 새겨져 있었다.
시우는 그곳이 청명검종 역대 고수들의 흉포한 검기와 원한이 봉인되어 있어 평범한 무인은 뼈도 못 추린다는 최악의 금지구역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저 눈앞의 미친 듯한 추위와 칼바람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대피소로 보였을 뿐이었다.
“살고 봐야지, 일단 들어가자…….”
시우는 이빨을 딱딱 마주치며 만검굴 내부로 비틀거리며 걸어 들어갔다.
동굴 안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추웠다. 단순히 기온이 낮은 것이 아니었다. 수백 년 동안 동굴 벽면에 잔존해 있던 흉포한 검기(劍氣)들이 음기(陰氣)와 결합하여, 살가죽을 찢어발길 듯한 기류의 폭풍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내공이 없는 시우의 육체는 이 서늘한 검기의 압박을 고스란히 받으며 급격한 저체온증 상태로 빠져들었다.
“으으으…… 추워…… 얼어 죽겠다…… 진짜로 죽어…….”
시우는 동굴 바닥에 주저앉아 온몸을 웅크렸다. 손가락 끝이 감각을 잃고 굳어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몇 분만 더 방치된다면, 자객의 칼에 맞기도 전에 동굴의 냉기에 얼어 죽을 것이 뻔했다.
불을 피워야 했다. 어떻게든 불을 피워 체온을 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우는 필사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동굴 구석에는 과거 누군가 두고 간 부서진 나무 탁자와 낡은 썩은 목조 책장이 방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책장 칸칸이 먼지가 뽀얗게 쌓인 오래되고 누런 종이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그 고서들은 다름 아닌, 백 년 전 중원을 뒤흔들고 실종되었던 전설의 검선, 소화선인(小華仙人)이 남긴 진짜 비전 구결이 적힌 절대의 비급서들이었다. 무림인들이 평생을 바쳐서라도 단 한 장이라도 얻고자 피를 흘리는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하지만 무공을 전혀 모르는 시우의 눈에는, 그저 아궁이에 집어넣기 딱 좋은 훌륭한 불쏘시개이자 땔감일 뿐이었다.
“이거라도 태워야 해…… 제발 불 좀 붙어라!”
시우는 감각이 없어진 손가락으로 책장에서 누렇게 바랜 비급서들을 무작위로 한 움큼 찢어내어 바닥에 쌓았다. 그리고 품속에서 부싯돌을 꺼내 들었다. 손이 바들바들 떨려 부싯돌을 부딪치는 것조차 버거웠다.
탁! 탁! 타닥!
몇 번의 실패 끝에 마침내 작은 불꽃이 찢어진 비급서 종이 모퉁이에 옮겨붙었다.
소화선인의 비급서 종이는 일반 한지가 아니었다. 백 년 동안 벌레가 먹지 않고 습기에 훼손되지 않도록, 고대 선계의 희귀한 약재 성분과 정화의 묘약 액체를 가득 코팅해 특수 제작한 영험한 종이였다.
그 귀중한 종이가 시우가 피운 불꽃에 타들어 가기 시작하자, 종이 표면에 코팅되어 있던 약재 성분들이 열 반응을 일으키며 기묘한 청색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매캐한 냄새 대신, 맑고 청량한 향기를 머금은 짙은 청색 연기가 화로 주변에서 피어올라 순식간에 만검굴 내부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
동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팽표와 철검문 자객들은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수석님, 한시우 저 자가 만검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저곳은 청명검종 최고의 금지구역이자, 잔존 검기가 들끓어 화경의 고수조차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흉지입니다!”
팽표가 매서운 미소를 지었다.
“흐흥, 역시 내 예측이 맞았군. 저 자는 만검굴 내부의 흉포한 검기를 이용해 우리를 유인한 뒤, 동굴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우리를 몰살하려는 계략을 꾸민 것이다. 참으로 교활한 자로다.”
“그럼 어찌합니까?”
“어찌하긴? 적이 파놓은 함정 속으로 직접 들어가 그 오만함을 깨부숴주는 것이 무인의 도리다. 더구나 만검굴의 검기는 저 자에게도 치명적일 터. 우리 철검문의 ‘철검전수 쾌검식’으로 단숨에 목을 베고 퇴각한다. 들어가자!”
팽표는 검을 뽑아 들고 자객들과 함께 만검굴 안으로 신속하게 침투했다.
동굴 내부로 진입하자마자, 팽표 일당은 숨이 턱 막히는 냉기와 함께 사방에서 살을 에는 듯한 검기의 기류를 느꼈다. 그들은 즉시 내력을 Circulating(운기조식)하며 전신에 무형의 방어 기막을 형성했다.
그런데 동굴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그들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짙은 청색 연기가 동굴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그 연기가 닿는 곳마다 동굴 벽면에서 날뛰던 흉포한 검기(음기)들이 기적처럼 정화되어 소멸하고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은 간데없고, 동굴 안은 마치 봄날의 온천처럼 따뜻하고 온화한 기운으로 가득 차 가고 있었다.
“이, 이것은…… 수화기제의 정화 진법?! 동굴 전체의 잔존 검기를 연기 하나로 정화하고 있단 말인가!”
자객 대장이 경악하여 비명을 질렀다.
그 청색 연기의 발원지 중앙에는, 한시우가 낡은 봇짐을 바닥에 내려놓은 채 불쏘시개(비급서)를 화로 아궁이에 쑤셔 넣으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시우의 얼굴은 불길의 붉은 빛과 청색 연기가 뒤섞여 묘한 후광을 풍기고 있었고, 그의 눈빛은 피로와 안도감으로 인해 극도로 심오하고 무심해 보였다.
팽표는 그 모습을 보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저 자는…… 만검굴의 천년 검기를 정화하는 의식을 펼치고 있었던 건가? 우리를 유인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우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는 듯 대담하게 문파의 영지를 정화하며 수련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극도의 인지부조화와 심리적 압박감이 팽표의 뇌리를 강타했다. 팽표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검을 치켜들며 사자후를 질렀다.
“한시우! 네놈이 아무리 대단한 진법을 펼치고 있다 한들, 내 철검문의 검날 앞에서는 한 줌의 먼지일 뿐이다! 죽어라!”
팽표는 전신 내력을 폭발시키며 시우를 향해 돌진하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팽표와 자객들이 정화의 청색 연기를 허파 깊숙이 들이마셨다.
소화선인의 비급이 타면서 발생한 청색 연기는, 내공이 없는 일반인 시우에게는 그저 따뜻하고 향기로운 연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내력을 급격히 순환시키며 기맥을 열어둔 무인들에게는 치명적인 역반응을 일으키는 ‘내력 정화제’였다. 무인들의 기맥 속에 흐르는 인위적인 기의 파동을 대자연의 무(無)의 상태로 되돌리려는 강한 간섭 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쿨럭! 쿨럭! 켁!”
돌진하려던 팽표가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며 격렬하게 기침을 토해냈다.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던 내력이 청색 연기와 충돌하며 기맥 내부에서 사정없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기맥이…… 막힌다…… 내력이 역류해!”
자객들 역시 무기를 떨어뜨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목을 쥐어짜며 비명을 질렀. 그들이 억지로 내력을 Circulating하려 할수록, 청색 연기의 정화 기운이 그들의 단전을 압박하여 극심한 주화입마 증세를 유발했다.
“으아아악! 기가 역류한다! 혈도가 막혔어!”
팽표는 눈이 뒤집힐 듯한 통통한 고통 속에서 시우를 바라보았다.
시우는 자객들이 갑자기 단체로 기침을 하며 바닥을 구르는 모습을 보고 기겁하여 화로 뒤로 숨었다.
‘엄마야! 저 사람들 왜 저래? 단체로 전염병이라도 걸린 거야? 나한테 옮기지 마!’
시우는 너무 무서워서 얼굴이 창백해진 채, 자객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바닥에 떨어진 다른 비급서 낙장들을 허겁지겁 찢어 화로 아궁이에 더 밀어 넣었다. 불길이 확 타오르며 더 짙고 웅장한 청색 연기가 동굴 전체를 집어삼키듯 뿜어져 나왔다.
팽표의 눈에는 그 행동이 마치 ‘자신들을 완벽하게 파멸시키기 위해 진법의 위력을 극대화하는 절대자의 자비 없는 결단’으로 비쳤다.
“아아…… 과연…… 검선의 경지……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연기 하나로 우리의 내력을 무력화시키다니…….”
팽표는 극도의 공포와 주화입마의 후유증으로 인해 심맥이 완전히 차단되며, 뇌 정지와 함께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기절했다. 자객들 역시 전원 동공이 풀린 채 전신 마비 상태로 바닥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동굴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타닥, 타다닥…….
오직 시우가 피워놓은 화로 불꽃만이 붉게 타오르며 찢어진 소화선인의 비급서 조각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시우는 굳어버린 자객들을 흘금 쳐다보며, 추위를 이기기 위해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다른 비급서의 겉장을 더 찢어 아궁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아우, 추워라. 불 꺼지면 안 되니까 이것도 다 태워버려야지.”
무림인들이 평생을 구하려던 전설의 비급서 절반이, 한시우의 엉덩이를 따뜻하게 데워줄 불쏘시개로 변해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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