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벽의 살기와 끓는 소금물
남궁세가의 청색 깃발과 무림맹 감사단의 삼엄한 횃불 행렬이 청명산 정문을 넘어 대연무장으로 밀려들었을 때, 한시우는 진심으로 고향에 계신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망했다. 진짜로 망했어.’
시우는 화려하게 대증축된 청명각의 상석에 앉아 있었지만, 엉덩이 밑에 가시방석을 깐 것처럼 전신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청색 대사형 도포는 황실의 은실로 수놓아져 번쩍였으나, 그것은 시우에게 수의(壽衣)나 다름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문파 내부의 역모를 진압한 ‘구국의 대사형’으로 추앙받으며 축제를 즐겼건만, 하룻밤 사이에 무림맹의 칼날이 목전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청명검종의 대사형 한시우라 하옵니다.”
시우는 애써 안면 근육을 굳히며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자줏빛 비단 전포를 입고 태산 같은 기세를 풍기는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벽(南宮壁)이 앉아 있었다. 그 매서운 눈빛은 마치 시우의 영혼까지 꿰뚫어 볼 듯이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 옆에는 무림맹의 공식 관복을 입고 거만한 콧대를 세운 감사단장 모용강(慕容强)이 매서운 독사 같은 눈초리로 시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허허, 이 자가 바로 졸음 속에서 천년의 영맥을 뚫고, 밤눈이 어두운 척하며 마교의 밀사까지 일격에 생포했다는 그 소문의 대사형이로군.”
모용강이 찻잔을 탁자에 거칠게 내려놓으며 차갑게 비웃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적의와 의심이 가득 실려 있었다.
“우리가 무림맹의 공식 사법권을 위임받아 이곳에 온 이유는 하나요. 쇠락해가던 청명검종이 갑자기 천년 영맥을 발견하고 부흥한 과정이 혹여 무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기극이나 흑마공의 야합이 아닌지 검증하기 위함이지.”
모용강의 서슬 퍼런 다그침에 청명각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옆에 서 있던 철면장로 위지관의 얼굴이 분노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모용 단장! 어찌 청명검종의 영웅이자 대사형을 그토록 무례하게 신문하려 하십니까! 우리 대사형께서는 오직 문파와 무림의 정의를 위해—”
“장로님, 잠시 가만히 계시지요.”
모용강이 손을 들어 위지관의 말을 자른 뒤, 시우를 향해 상체를 바짝 기울였다.
“소문은 거창하나, 내가 보기에 이 한시우라는 자에게선 단 1푼의 내공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는군. 아무리 기운을 갈무리하는 반박귀진의 경지라 우겨댄들, 내 눈은 속일 수 없소. 대사형, 내 말이 틀렸소?”
‘맞아! 네 말이 100% 맞아! 나 진짜 무공 하나도 못 해!’
시우는 속으로 모용강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격하게 동의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예, 저 사실 사기꾼입니다”라고 이실직고했다간, 분노한 위지관 장로와 태상장로 독고엽의 칼날에 먼저 목이 날아갈 것이 뻔했다. 진실을 말해도 죽고, 거짓말을 해도 죽는 지옥 같은 외통수였다.
극도의 긴장감에 시우의 뇌 정지가 찾아왔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자, 시우의 얼굴은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는 차가운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졸린 눈빛에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그 표정은, 모용강의 눈에는 자신들의 압박을 완벽히 무시하는 ‘절대자의 오만한 침묵’으로 비쳤다.
모용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침묵으로 일관하시겠다? 그렇다면 남궁 가주께서 직접 대사형의 기세를 시험해 보시는 것은 어떻겠소?”
그 말에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남궁벽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천년 영맥을 부활시킨 검선(劍仙)의 기개가 어느 정도인지, 내 가볍게 확인해 보지.”
남궁벽이 눈을 가늘게 뜨는 순간, 그의 전신에서 초일류 현경 고수만이 뿜어낼 수 있는 무시무시한 제왕의 살기(殺氣)가 파도처럼 뿜어져 나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류의 압박이 청명각의 단단한 목조 기둥들을 삐걱거리게 만들었다.
무공이 전혀 없는 잡역부 출신의 시우에게 그 살기는 실존하는 거대한 바위산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듯한 물리적인 공포로 다가왔다. 호흡이 턱 막히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전신의 근육이 얼어붙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죽는다! 진짜 숨 막혀 죽을 것 같아!’
시우는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뇌세포를 굴렸다. 일단 비굴하게 굴어야 했다. 저 무서운 아저씨에게 따뜻한 차라도 대접하며 “아이고 가주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하고 싹싹하게 빌어야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우는 떨리는 팔을 뻗어 탁자 위에 놓인 뜨거운 주전자를 잡았다.
하지만 시우는 알지 못했다. 그 주전자에 담긴 물은 평범한 차 우린 물이 아니었다.
몇 시간 전, 주방장 팽가(팽가)가 어제 침투했던 마교 자객들의 피와 진흙으로 더러워진 연무장 바닥을 소독하고 먼지를 가라앉히기 위해, 굵은 소금을 가득 넣어 펄펄 끓여둔 고농도의 ‘끓는 소금물’ 양동이였다. 시우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주방 구석에 놓여 있던 그 뜨거운 소금물 주전자를 차 우린 주전자로 오해하고 그대로 들고 온 것이었다.
시우는 찻잔에 뜨거운 소금물을 졸졸 따랐다. 짭조름한 소금 냄새가 미세하게 풍겼으나, 극도의 공포로 후각마저 마비된 시우는 그저 차 향기려니 생각했다.
“차, 차 한 잔 드시지요…….”
시우는 찻잔을 들고 남궁벽을 향해 내밀었다.
바로 그 순간, 남궁벽이 시우의 실력을 완전히 발가벗기겠다는 듯, 자신의 제왕기세(帝王氣勢)를 한 단계 더 끌어올려 시우의 전신을 짓눌렀다. 쿵! 하는 소리가 뇌리에서 울리는 듯한 압박감에 시우의 손가락 근육이 완전히 비틀리며 통제를 잃었다.
시우의 필살기인 ‘찻잔 바들바들 떨기’가 비자발적으로 발동하는 순간이었다.
달달달달달달달달달!
찻잔이 받침대와 부딪히며 내는 날카롭고 웅장한 진동음이 청명각 내부를 진동시켰다. 고속으로 요동치는 찻잔의 움직임은 너무나 빠르고 정교하여, 마치 무형의 기운이 찻잔 주변의 공간을 왜곡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이것은……!”
옆에서 지켜보던 위지관 장로가 경악 어린 비명을 속으로 삼켰다.
‘찻잔의 진동만으로 남궁 가주님의 제왕기세를 완벽하게 상쇄하고 계시는구나! 검을 뽑지 않고도 천지의 공명을 다스리는 저 무서운 음공(音功)의 극의! 과연 대사형이시로다!’
하지만 남궁벽의 살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했고, 시우의 손가락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앗 뜨거! 손가락 풀린다! 지려버릴 것 같아!’
시우는 비명을 지르며 찻잔을 놓쳐버렸다.
하지만 그의 절대적인 운수대통은 이번에도 기상천외한 물리학적 궤적을 만들어냈다. 시우가 긴장해 손을 좌우로 크게 흔들며 찻잔을 떨어뜨린 반동으로 인해, 찻잔 속에 담겨 있던 펄펄 끓는 고농도 소금물이 포물선을 그리며 남궁벽의 무릎 관절을 향해 벼락같이 날아갔다.
치이이이익!
뜨거운 소금물이 자줏빛 비단 도포를 적시며 남궁벽의 무릎 관절 혈도 위로 정확하게 쏟아져 내렸다.
순간, 청명각 내부에 무서운 정적이 감돌았다.
모용강은 턱을 쩍 벌린 채 얼어붙었고, 위지관은 대사형이 남궁세가 가주에게 대형 테러를 저질렀다는 사실에 사색이 되었다. 뜨거운 소금물을 직격으로 맞은 남궁벽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은 대추 빛깔처럼 급격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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