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의 대사형과 막힌 퇴로
“커헉……! 이, 이럴 수는 없다…….”
청명검종의 최정예 밀사이자 일류 도주 전문가인 독고랑은 차가운 흙바닥에 처박힌 채 핏덩이를 울컥 토해냈다. 갈비뼈가 산산조각 나며 명치를 압박하는 고통은 차라리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의 영혼을 송두리째 짓밟은 것은, 자신을 덮쳐 누른 대사형 한시우의 얼굴에 서린 기괴할 정도의 평온함이었다.
살기가 전혀 없었다.
보통 일류 고수의 기습이라면 몸을 에이는 듯한 서슬 퍼런 살기나 폭발적인 내력의 흐름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시우에게선 그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심한 바윗덩어리에 깔린 듯한 절망감. 독고랑은 그것이 살기를 완벽하게 갈무리해 자연의 일부가 된 ‘반박귀진(返璞歸真)’의 경지라고 굳게 믿었다.
“대, 대사형! 이 자는 오진태 장로의 밀사 독고랑이 아닙니다!”
횃불을 든 혁무진이 비명을 지르며 다가왔다. 그 뒤로 전담 마당쇠와 수십 명의 사제들이 산비탈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수십 개의 횃불이 어두운 골목길을 대낮처럼 밝히자, 가시덤불을 온몸으로 관통해 걸레짝이 된 회색 도포를 걸친 한시우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시우는 전신을 두들겨 맞은 듯한 근육통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꼬리뼈는 금이라도 간 것처럼 욱신거렸고, 입안에는 구르면서 씹은 풀잎과 흙먼지가 가득했다. 당장이라도 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고 싶었으나, 사방을 가득 채운 사제들의 이글거리는 눈빛 때문에 억지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아이고, 내 허리야…… 진짜 죽는 줄 알았네. 그나저나 이 자식은 왜 내 밑에 깔려서 피를 토하고 난리야?’
시우는 멍청한 표정으로 제 발끝에 쓰러진 독고랑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깔고 뭉개며 손으로 꽉 쥐었던 가죽 종이가 생각났다. 시우는 그것이 주방장 팽가가 만두를 싸준 포장지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기름때가 묻을까 봐 품속 깊은 곳에 소중히 쑤셔 넣었던 가죽 종이를 슬쩍 꺼내 보았다.
“대사형, 품속에 쥐고 계신 그것은 무엇입니까?”
진소희 사매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시우는 흙먼지 묻은 입술을 떼며 비굴하게 웃었다.
“아, 이거? 별거 아니야. 그냥 만두…….”
“만두라니요! 그 가죽 주머니에 찍힌 문양은……!”
돌연 수풀을 헤치며 나타난 철면장로 위지관이 시우의 손에 든 가죽 종이를 보고 벼락같이 소리쳤다. 위지관의 철면피 같은 얼굴이 극도의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거의 날아가듯 다가와 시우의 손에서 가죽 종이를 조심스럽게 낚아챘다.
“이, 이것은…… 청명검종의 이장로, 오진태의 개인 인장이 찍힌 극비 역모 밀서가 아닌가!”
“예?”
시우의 입이 떡 벌어졌다. 만두 포장지가 아니라 역모 밀서라고?
위지관은 떨리는 손으로 가죽 종이를 펼쳤다. 횃불 불빛 아래 드러난 글씨들은 오진태가 외부 세력인 철검문과 마교에 청명검종을 팔아넘기고 전복시키자고 제안하는 추악한 배신 공작의 전말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오진태 이 죽일 놈이 기어코 문파를 팔아넘기려 했구나! 그런데…… 대사형 한시우는 이 모든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단 말인가?”
위지관이 시우를 바라보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아아, 대사형! 밤새 잠도 자지 않고 문파의 안위를 위해 은밀히 암행시찰을 도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군요! 보초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개구멍을 이용하시고, 적의 가장 날렵한 밀사인 독고랑의 도주 경로를 정확히 예측해 산비탈을 굴러내려 오시며 일격에 제압하시다니!”
“아니, 장로님…… 저는 그냥 만두가 먹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만두를 먹으러 간다는 핑계로 아군 내부의 밀정마저 안심시키고, 한 치의 살기도 풍기지 않은 채 대자연의 중력만을 이용해 적의 허점을 찌르신 거군요! 참으로 무서운 지략이자 신산귀모(神算鬼謀)이십니다!”
진소희 사매가 감격에 겨워 붓을 들고 공책에 미친 듯이 받아적기 시작했다.
[대사형 어록 제3장: 지존의 행보는 평범한 만두 속에 천하의 기틀을 숨기니, 어리석은 자들은 그저 먹는 즐거움이라 오해할 뿐이다.]
시우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아니라고! 진짜 만두였다고! 팽가가 구워준 고기만두 두 알이었다고!’
하지만 시우가 억울해서 입을 벌릴 때마다, 주변 사제들은 “대사형께서 공을 겸손히 물리치려 하신다!”라며 일제히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통곡했다. 가시덤불을 구르느라 찢어진 도포 자락은 ‘문파를 구하기 위해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은 성자의 흔적’으로 승화되었고, 입가에 묻은 만두 기름은 ‘천기를 다스린 자의 신비로운 후광’으로 포장되었다.
결국, 오진태 일파의 가문 전복 음모는 한시우의 ‘만두 야식 탈출기’ 덕분에 현장에서 완벽하게 진압되었다. 감옥에 갇혀 있던 오진태는 마지막 보루였던 밀사마저 생포되었다는 소식에 피를 토하며 절망했고, 그의 모든 추종 세력은 하룻밤 사이에 완벽하게 숙청당했다.
***
다음 날 아침, 청명검종의 장문전 ‘청명각’은 축제 분위기로 터질 듯했다.
파산 직전에 몰려 기와조차 고치지 못하던 문파의 마당에는 황실과 남궁세가에서 보낸 화려한 마차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오진태의 역모 진압과 문파의 부흥 소식을 들은 황실의 옹주 주예린이 보낸 전령들이 웅장한 금빛 하사금 상자들을 마당 가득 내려놓고 있었다.
“태상장로 독고엽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웅장한 외침과 함께, 평소 치매 증세로 벽을 보고 검질을 하던 늙은 태상장로 독고엽이 정정하게 걸어 들어왔다. 그의 흐릿하던 안광은 오늘따라 기적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독고엽은 청명각 상석에 앉아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한시우에게 다가갔다. 시우는 전날 구른 여파로 온몸이 쑤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시우.”
독고엽의 묵직한 목소리가 청명각을 울렸다. 시우는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설마 이 할아버지는 내 진짜 무공 실력을 눈치챈 건 아니겠지? 제발 살려주세요…….’
그러나 독고엽은 시우의 어깨를 단단한 손으로 꽉 짚었다.
“내 십 년간 흐려졌던 정신이, 어제 네놈이 보여준 거룩한 의행 덕분에 번쩍 깨어났다. 검을 쥐지 않고도 가문의 역도를 단죄하고, 천년의 영맥을 부활시켜 문파를 구한 기재가 내 눈앞에 있거늘 내가 어찌 잠들어 있을 수 있겠느냐!”
독고엽은 뒤돌아서서 연무장에 모인 전 제자들과 장로들을 향해 청명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나 청명검종의 태상장로 독고엽은, 오늘부로 대사형 한시우를 문파의 공식 정통 후계자이자 청명검종의 차기 장문인으로 선포하노라!”
와아아아아!
연무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제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시우의 이름을 연호했다.
시우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후계자라니? 장문인이라니? 그렇다면 평생 이 썩을 문파에 뼈를 묻어야 한단 말인가? 시우는 울상을 지으며 독고엽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사래를 쳤다.
“장, 장문인! 아닙니다!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제발 저를 파문해 주십시오! 저는 그저 평범한 범인일 뿐입니다! 제발 은자 50냥만 주시면 당장 고향으로 돌아가 감자나 키우며 살겠습니다!”
시우의 목소리는 처절했다. 진짜 은퇴하고 싶다는 진심이 100% 담긴 비명이었다.
하지만 이 눈물겨운 애원을 들은 위지관 장로는 가슴을 쥐어짜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아아! 들으셨습니까, 장문인! 천하제일의 천재이자 문파의 구세주가 되었음에도, 명예와 권력을 돌같이 보며 스스로 파문을 청하고 고향의 흙으로 돌아가려 하십니다! 저 성인 같은 청빈함과 무욕(無慾)의 대도 철학! 참으로 눈물이 앞을 가리는군요!”
“그렇구나…….”
독고엽 역시 감격 어린 눈빛으로 시우를 바라보았다.
“권력을 탐하지 않고 오직 무위자연의 도를 실천하려는 자야말로 우리 청명검종의 진정한 장문인이 될 자격이 있다. 시우야, 네가 아무리 거절하려 해도 천하의 대도가 너를 놓아주지 않는구나. 파문 요청은 영구히 기각한다!”
털썩.
시우는 휠체어 급의 절망감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때, 마당쇠가 웅장한 목조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상자 안에는 황실에서 보낸 순금 1,000냥이 번쩍이고 있었다. 시우는 눈을 번뜩이며 위지관의 도포 자락을 붙잡았다.
“장로님! 저기 황실에서 보낸 돈이 저렇게 많지 않습니까! 제 퇴직금 50냥만 저기서 떼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예?”
위지관은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시우의 손을 다스렸다.
“대사형, 걱정 마십시오. 대사형의 그 청빈한 뜻을 기리기 위해, 황실 하사금 1,000냥은 단 한 푼도 사적으로 쓰지 않고 전액 ‘한시우 대사형 기념 도서관’과 초호화 문파 전각 증축 예산으로 동결해 두었습니다. 대사형의 50냥 수령 계획은 문파의 정직함을 위해 영구히 반려되었으니, 안심하고 수련에 정진하십시오!”
‘안심은 무슨…… 이 사기꾼 장로 늙은이야! 내 돈 내놔!’
시우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문파는 대기업 수준으로 부활하여 대증축 공사 소음으로 시끄러운데, 자신은 은퇴 자금 50냥을 영원히 받지 못하는 ‘명예의 감옥’에 갇혀버린 것이다.
***
그날 밤, 시우는 자신의 아늑하고 먼지 가득한 처소 창고방 침상에 누워 있었다.
밖에서는 사제들이 대사형의 구국 결단을 축하하며 밤새 횃불을 들고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천하제일 대사형 한시우!”를 연호하는 웅장한 함성이 창문 틈새로 끊임없이 흘러들어왔다.
시우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품속에서 텅 빈 50냥짜리 은자 주머니를 꺼내 보았다. 고향에서 아버지가 보내준 흙 묻은 감자 한 알이 덩그러니 굴러나왔다.
“흑흑…… 감자 농사짓고 싶다. 집에 가고 싶어…….”
시우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감자를 꼭 쥐었다. 문파를 망쳐서 쫓겨나려던 그의 모든 꼼수가 기적으로 둔갑하여, 이제는 도망치려 해도 황실 근위대와 사제들이 24시간 감시하는 철옹성이 되어버렸다. 막혀버린 퇴로와 억울한 명성 속에서 시우의 한숨은 깊어만 갔다.
바로 그때였다.
쾅!
창고방의 낡은 목조 문이 부서질 듯이 열리며, 전령 무사가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들이닥쳤다.
“대, 대사형! 큰일났습니다!”
시우는 깜짝 놀라 이불을 내팽개치며 일어섰다.
“왜, 왜 그래? 설마 마교가 쳐들어왔어?”
“그것이 아니라……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벽 님과, 무림맹의 정예 감사단장 모용강 님이 이끄는 삼엄한 감사단이 청명산 초입에 도착했다는 전갈입니다! 대사형의 실력을 직접 검증하겠다며 들이닥치고 계십니다!”
연무장 너머 밤하늘 위로, 남궁세가의 청색 깃발과 무림맹의 삼엄한 횃불 행렬이 청명산을 향해 좁혀오는 광경이 창문 너머로 붉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시우는 사색이 된 채 굳어버렸다. 드디어 문파 외부의 진짜 무서운 괴물들이 자신의 가짜 실력을 털어내기 위해 칼날을 들이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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