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 50냥과 몽당빗자루
“은자 50냥. 딱 50냥이면 된다.”
청명검종의 뒤뜰, 먼지가 자욱하게 쌓인 창고방 구석에서 한시우는 제 품속을 더듬었다. 손끝에 닿는 것은 텅 빈 주머니뿐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고향 땅에 마련할 푸릇푸릇한 감자밭의 풍경이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시우의 고향 마을 이장인 최영감은 늘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농사꾼은 흙을 배신하지 않고, 흙 역시 농사꾼을 배신하지 않는다고. 명문이랍시고 허세만 가득한 검종에서 매일 무거운 물동이를 나르고 마당을 쓰는 잡역부 생활을 하느니, 고향으로 돌아가 감자 농사나 지으며 유유자적하게 늙어가는 것이 백번 천번 나았다.
하지만 무림맹의 공인 규율상, 문파의 잡역부라 할지라도 함부로 도망치면 ‘배문(背門)의 죄’를 물어 관청에 고발당하거나 무림 추적대에게 흠씬 두들겨 맞기 십상이었다. 합법적으로 이 지옥 같은 문파를 탈출할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청명검종 규율 제17조. 승급 시험에서 연속 3회 낙제한 잡역부는 무공의 자질이 전무한 것으로 판단하여, 위로금 및 퇴직금 은자 50냥을 지급하고 파문한다.’
내일이 바로 그 영광스러운 세 번째 승급 시험날이었다. 시우는 이미 완벽한 낙제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다. 시험지에 먹물로 동그라미나 몇 개 그리고, 실기 시험에서는 목검을 대충 휘두르다 바닥에 자빠지면 끝이다. 그러면 꿈에 그리던 은자 50냥을 받고 합법적으로 쫓겨날 수 있었다.
“한시우! 거기서 또 농땡이 피우고 있느냐!”
그때 창고방의 낡은 나무문이 벼락같이 열리며 웅장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청명검종의 기강을 책임지는 철면장로, 위지관이었다. 그의 뒤에는 언제나 시우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열혈 사매 진소희와 분석형 천재 사제 육청풍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빛내며 서 있었다.
시우는 황급히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몽당빗자루를 붙잡고 마당을 쓰는 시늉을 했다. 털이 다 빠져 먼지 한 톨 제대로 쓸지 못하는, 그야말로 제구실을 못하는 쓰레기 빗자루였다.
“장로님! 어찌 제 처소까지 직접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저는 그저 문파의 청결을 위해 이 한 몸 불사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시우는 비굴하리만큼 싹싹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제발 시험 전날 쓸데없는 꼬투리가 잡혀 퇴직금 전선에 이상이 생기면 안 되니까.
위지관은 굳게 다문 입술과 단단한 턱선으로 시우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매서운 눈빛이 시우가 쥐고 있는 몽당빗자루와 그의 낡은 회색 잡역부 도포를 훑었다. 보통의 장로라면 꾀병을 부리는 게으름뱅이라며 회초리를 들었겠지만, 위지관은 달랐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기묘한 착각의 회로로 가득 차 있었다.
‘보아라. 저 낡아 빠진 빗자루를 쥐고 있으면서도 어깨의 힘이 완벽하게 빠져 있구나. 보통의 범인이라면 장로의 기세에 눌려 사지를 떨 터인데, 한시우 저 녀석은 아무런 내공도 풍기지 않으면서 태산 같은 부동심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필시 기운을 단전 깊은 곳에 완벽히 갈무리한 반로환동의 경지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위지관은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감동을 느꼈다. 쇠락해가는 청명검종에 드디어 천년의 기재가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다만 그 재능을 시기하는 자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고 잡역부의 신분으로 숨어 지내고 있는 것이리라.
“시우야, 내일이 드디어 승급 시험이로구나. 문파의 제자라면 모름지기 대연무장에 나가 기운을 맑게 닦아야 하거늘, 너는 어찌 이 어두운 창고방 구석에서 먼지만 쓸고 있느냐. 어서 대연무장으로 나아가거라.”
“예? 하지만 저는 잡역부라 대연무장 한구석에서 청소나 하는 것이 맞사온데…….”
“허허, 겸손이 지나치구나. 어서 가거라. 전 제자들이 너의 그 고결한 태도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위지관의 단호한 명령에 시우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귀찮게 진짜 왜 이러는 거야.’
결국 시우는 몽당빗자루와 땔감으로 쓰려던 이 빠진 목검을 겨드랑이에 낀 채 대연무장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청명검종 대연무장은 드넓은 앞마당이었지만, 영기가 고갈되어 바닥의 돌들이 여기저기 깨지고 황폐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제자들은 무거운 목검을 휘두르며 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시우의 관심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장로들의 눈을 피해 가장 편안하게 누워 졸 수 있을까.
시우는 슬금슬금 대연무장의 가장 구석진 곳, 커다란 바위 그늘 아래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은 위지관 장로의 날카로운 시선이 닿지 않는 완벽한 사각지대였다. 게다가 바위 틈새에서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와 낮잠을 자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명당이 없었다.
‘그래, 여기서 대충 청소하는 척하다가 한숨 자고 일어나면 내일 시험이다. 내일만 무사히 망치면 은자 50냥을 받고 이 지긋지긋한 무림을 탈출하는 거다.’
시우는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아,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이 빠진 목검을 품에 꼭 안았다. 나무가 썩어 이가 빠진 볼품없는 목검이었지만, 잘 때 품에 안고 있으면 꽤나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시우는 다리를 편안하게 뻗고 서서히 감겨오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한 채 깊은 졸음 속으로 빠져들었다.
새근새근하는 숨소리가 바위 그늘 사이에 퍼져나갔다. 시우의 의식이 완전히 안개 속으로 사라질 무렵, 그의 손아귀 힘이 스르륵 풀리기 시작했다.
품에 안고 있던 이 빠진 목검이 중력의 법칙에 따라 비스듬히 미끄러져 내렸다.
보통의 바닥이었다면 목검은 그저 딱 소리를 내며 평범하게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시우가 졸고 있던 바위 바로 아래에는, 천년 동안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아주 미세하고 깊은 바위 균열이 숨겨져 있었다.
스르륵.
목검의 끝부분이 기묘한 각도로 비틀어지며, 마치 자물쇠에 열쇠가 맞아 들어가듯 그 좁은 바위 균열 사이로 정확하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툭.
목검이 바닥 틈새 깊숙이 박히는 순간, 대연무장 전체를 지탱하던 거대한 대지맥의 흐름이 일순간 멈춰 섰다. 그리고 시우의 졸음 가득한 한숨 소리와 함께, 대지가 아주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바위 틈새 깊은 곳, 천년 동안 봉인되어 있던 영맥의 핵심 혈도가 평범한 나무막대기의 무게에 눌려 마침내 그 빗장을 열어젖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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