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구원의 기적
빗물이 칼스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찰나, 허공을 가르는 비명과 함께 보라색 종창으로 뒤덮인 어린 토끼 수인 소년, 토토가 덮쳐왔다.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소년의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 사이로 흘러내리는 검붉은 침은 빗물과 뒤섞여 골목길 바닥으로 튀었다. 역병이 소년의 뇌와 심장 핵을 완전히 잠식해 버린 탓에 발휘되는 기괴한 광포화 상태였다.
“성자님, 물러서십시오!”
칼스가 본능적으로 대검을 비스듬히 세우며 전면을 가로막으려 했다. 묵직한 투기가 검날을 감싸 쥐었지만, 유한은 다급히 칼스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안 돼, 칼스! 검을 거둬라!”
이곳은 하인즈 빈민가 외곽이다. 바로 수백 미터 너머 광장 상공에는 제국의 성력 감지 탑이 푸른 안광을 번뜩이며 사방을 감시하고 있었다. 칼스의 검기가 폭발하는 순간, 탐지 장치에 경보가 울릴 것은 불명관화했다. 게다가 소년의 몸을 검날로 받아쳤다가는 역병으로 극도로 약해진 심장 핵이 그대로 파열되어 즉사할 터였다.
유한은 눈동자에 맑은 은빛을 미세하게 집중시켰다.
‘진실의 안광(眞實의 眼光).’
순식간에 시야가 반전되며 흑백의 세상 속에서 토토의 체내를 흐르는 마력의 흐름이 선명하게 투시되었다. 소년의 심장 한가운데, 썩어 문드러진 보라색 역병의 기운이 쐐기처럼 박혀 미친 듯이 박동하고 있었다. 저것이 폭주를 유도하는 마기 핵이었다. 저 흐름을 일시적으로 정지시켜야 소란 없이 소년을 제압할 수 있었다.
유한은 로엔의 환각 위장술로 억제해 둔 자신의 단전에서 아주 정밀하고 미세한 성력을 손가락 끝으로 끌어올렸다. 겉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약초상의 손놀림처럼 보였지만, 그 끝에는 마기를 억누르는 날카로운 신성의 침이 응축되어 있었다.
‘마기 폭주 강제 억제(魔氣 暴走 强制 억제).’
유한은 도약해 오는 토토의 사각지대로 몸을 가볍게 틀었다. 빗줄기를 뚫고 스쳐 지나가는 소년의 가슴팍, 정확히 심장 주변의 세 군데 혈맥을 향해 유한의 검지와 중지가 전광석화처럼 내리꽂혔다.
탓, 타닷!
“끄, 으윽……!”
토토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유한의 손가락 끝에서 방출된 미세한 정화의 쐐기가 소년의 심장 핵을 감싸 안으며 날뛰던 마기 흐름을 강제로 동결시켰다. 폭포수처럼 뿜어지던 보라색 안광이 순식간에 사그라졌고, 소년의 가냘픈 몸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칼스의 품 안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칼스가 굳건한 팔로 토토를 받아 안았다. 소년의 토끼 귀가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소란 없이 제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성자님. 하지만 숨결이 너무 거칠고 피부가 계속해서 썩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칼스가 낮게 속삭이며 소년의 상태를 살폈다. 토토의 앳된 얼굴은 이미 역병의 종창으로 뒤덮여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제어된 마기 핵이 다시 폭발해 생명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성당으로 데려간다. 바르토가 확보해 둔 비밀 통로를 이용하지. 칼스, 서둘러라.”
유한은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위장술을 유지한 채 극도로 정밀한 성력 제어 기술을 사용한 탓에 마나가 일시적으로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두 사람은 빗물에 젖은 하인즈의 어두운 골목길을 유령처럼 빠져나와, 안개 숲 깊은 곳에 숨겨진 황폐한 고대 성당으로 신속하게 철수했다.
***
성당 예배당의 무거운 참나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은발을 길게 늘어뜨린 제1마왕녀 루시엘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날개의 상처를 완전히 치유하고 마력을 복원한 그녀는, 유한이 피투성이가 된 수인 소년을 데려오자 붉은 눈동자를 가늘게 좁히며 차가운 마기를 방출했다.
“인간들의 슬럼가에서 결국 저런 더러운 짐승을 데려온 거야? 유한, 네 몸도 온전치 않으면서 왜 다른 존재의 생명 따위에 집착하는 거지?”
루시엘라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오만함 뒤로, 유한이 자신 외에 다른 존재를 구원하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것에 대한 묘한 질투심과 독점욕이 섞여 있었다. 그녀의 칠흑 같은 날개가 가볍게 떨렸다.
유한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 소년은 제국의 위선적인 성수가 빚어낸 역병의 희생자다, 루시엘라. 녀석을 살려내는 것은 제국의 거짓 기적을 깨부술 첫 번째 열쇠가 될 거다. 그리고…… 내 눈앞에서 죽어가는 생명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유한의 단호하면서도 자비로운 청색 눈동자를 바라보던 루시엘라는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영혼의 성흔으로 묶인 반려의 고결한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유한의 그 헌신적인 면모가 그녀의 마음을 더욱 깊이 움켜쥐고 있었다.
“미카엘! 엘린! 지하 기도실의 정화의 샘물로 갈 채비를 해라!”
유한의 외침에 성당 구석에서 대기하던 소년 수도사 미카엘과 의무병 엘린이 다급히 움직였다.
유한은 토토를 안고 성당 지하 깊숙한 곳, 태초의 신성 에너지가 살아 숨 쉬는 ‘정화의 샘’으로 내려갔다. 에메랄드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샘물 주변에는 강력한 자연 정화 결계가 흐르고 있어, 외부의 그 어떤 사악한 마기도 침범하지 못하는 성역이었다.
유한은 지하 묘지 깊은 곳에서 발견한 고대 백색 교단의 유물, ‘정화의 성배’를 꺼내 들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성배를 정화의 샘물에 담그자, 성배가 공명하듯 웅웅거리며 주변의 마나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성자님, 천선초를 가져왔습니다!”
미카엘이 안개 숲 절벽에서 채취해 보관해 두었던 귀중한 희귀 약초 천선초를 유한에게 건넸다. 유한은 천선초의 잎을 정화의 성배 안에 넣고, 자신의 손끝을 베어 붉은 피 한 방울을 그 위에 떨어뜨렸다.
건국 황실의 직계 핏줄이자 수천 년에 한 번 태어나는 ‘시원의 성체’를 타고난 유한의 피가 약초에 닿는 순간, 성배 내부에서 눈부신 은백색 광채가 폭발하듯 피어올랐다.
‘천선초 독성 제거 정제법(天仙草 毒性 除去 精製法).’
유한은 성배를 향해 정교한 정화 진언을 영창했다. 성배 안에서 천선초가 지닌 고유의 환각 독성이 검은 연기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가 사라졌고, 이내 정화의 샘물과 완벽히 융합되며 투명하고 맑은 에메랄드빛의 액체가 완성되었다.
요한 사제의 정화 성배 아티팩트 덕분에 약효의 순도와 치유력이 무려 200% 이상 증폭된 진짜 기적의 영약, ‘은빛 성수 정제액’이었다.
“으윽……!”
정제액을 완성한 유한은 가슴의 성흔이 찢어지는 듯한 극통에 무릎을 꿇었다. 입가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과도한 성력 방출로 인해 성흔의 균열 저주가 작동한 탓이었다. 루시엘라가 급히 다가와 유한의 어깨를 붙잡으며 자신의 마력을 주입해 그의 심장을 진정시켰다.
“바보 같은 인간…… 또 수명을 깎아 먹는 짓을 했어.”
루시엘라의 붉은 눈동자에 맺힌 눈물이 유한의 뺨 위로 떨어졌다. 그녀의 손길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마력 덕분에 유한은 겨우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유한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성배를 들고 토토에게 다가갔다.
“아직…… 끝내야 할 일이 있다.”
유한은 조심스럽게 토토의 입을 벌려 은빛 성수 정제액을 흘려 넣어주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은빛 정제액이 소년의 목덜미를 타고 넘어가자마자, 토토의 전신을 감싸고 있던 검붉은 역병의 종창들이 눈 녹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부패하여 진물이 흐르던 피부가 은빛 광채에 휩싸이며 순식간에 새하얗고 깨끗한 살결로 재생되었다. 소년의 체내에서 날뛰던 뒤틀린 마기 핵 역시 유한의 성스러운 정화 광휘에 닿아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우음…….”
토토가 길고 쫑긋한 토끼 귀를 미세하게 움직이며 서서히 눈을 떴다. 충혈되었던 붉은 안광은 사라지고, 맑고 투명한 검은 눈망울이 유한을 향했다. 소년은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은은한 은빛 온기에 안도감을 느끼며, 피투성이가 된 유한의 손을 작은 두 손으로 꼭 쥐었다.
“형아…… 아프지 않아요. 몸이…… 따뜻해요.”
토토의 뺨을 타고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국의 가짜 성수에 유린당해 괴물이 되어가던 소년이, 마침내 진짜 성자의 손길에 의해 완벽하게 구원받은 순간이었다.
유한은 토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러내려 주었다. 그의 가슴속에 제국 교단을 향한 분노와 함께, 진정한 구원의 가치를 증명해 냈다는 깊은 카타르시스가 차올랐다. 루시엘라는 유한의 손을 꼭 쥔 토토를 질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면서도, 유한이 이룩해 낸 기적의 고결함에 압도되어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다.
***
다음 날 밤, 유한은 바르토의 비밀 밀수 상단을 가동했다. 정화의 성배로 대량 정제해 낸 ‘은빛 성수 정제액’을 하인즈 빈민가 구석구석에 은밀하게 배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제국의 오염된 성수를 마시고 좀비처럼 변해가던 빈민가 주민들과 수인들이, 은빛 정제액을 마시자마자 역병에서 완벽히 회복되었다. 부작용도, 중독성도 없는 진짜 치료제의 등장에 하인즈 빈민가는 열광했다.
“제국의 성수는 가짜였다! 안개 숲에 진짜 우리를 구원해 줄 성자님이 계신다!”
“자비로운 안개 숲의 성자님 만세!”
주민들은 정체불명의 구원자를 ‘안개 숲의 자비로운 성자’라 부르며 신봉하기 시작했다. 유한의 명성과 평판은 국경지대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갔고, 이는 제국 교단이 쌓아 올린 위선적인 지배 질서에 미세한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는 법이었다.
하인즈 빈민가의 중앙 광장, 사제 도널드의 화려한 천막 집무실 내부.
“이게 무슨 소리냐! 성수가 팔리지 않는다니!”
도널드 사제가 기름기 흐르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황금 성수 잔을 바닥에 거칠게 내던졌다.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가짜 성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은 제국 경비병들이 부들부들 떨며 보고했다.
“그, 그것이…… 안개 숲에서 나타난 정체불명의 성자가 은빛의 진짜 성수를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성수를 마신 자들은 역병이 완벽히 완치되어, 더 이상 저희 면죄부와 성수를 사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 매출이 십 분의 일로 줄었습니다!”
“뭐라? 진짜 성수라고?”
도널드의 눈에 탐욕과 두려움, 그리고 지독한 살기가 서려 들었다. 자신의 면죄부 판매와 남작의 오염된 성수 사기 사업이 이대로 가다간 완전히 파멸할 위기였다. 게다가 진짜 정화력을 지닌 존재가 국경지대에 살아있다는 사실이 교황청 상층부에 알려진다면, 자신의 목이 먼저 날아갈 터였다.
도널드는 손가락을 부르르 떨며 품속에서 붉은 통신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안개 숲 내부를 이 잡듯 뒤져라! 국경의 밀고꾼들을 모조리 매수해서라도 그 은빛 성수의 출처와 쥐새끼 같은 ‘가짜 성자’의 정체를 밝혀내야 한다! 내 사업을 망치는 놈은 기필코 화형대에 세우겠다!”
어두운 하인즈 빈민가의 하늘 위로, 유한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한 제국의 뒤틀린 추격의 음모가 다시금 붉은 횃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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