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숲의 파수꾼, 그리고 추격자들
안개 숲의 밤은 죽음처럼 고요했다. 하지만 그 침묵의 이면에는 짐승들의 굶주린 숨결과 서늘한 살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황폐한 고대 성당의 예배당 한가운데, 지유한은 가슴을 움켜쥔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 새겨진 백흑의 낙인, ‘배덕의 성흔’이 심장 박동에 맞춰 기괴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살을 태우는 듯한 극통이 밀려올 때마다 은빛 머리칼 사이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입가에 묻은 검붉은 피를 닦아내는 그의 청색 눈동자에는 지독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유한…….”
어둠 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유된 칠흑의 날개를 우아하게 접은 루시엘라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은발이 달빛을 받아 신비롭게 빛났고, 붉은 눈동자에는 유한을 향한 맹목적인 집착과 소유욕이 일렁이고 있었다. 영혼이 묶인 계약의 힘 때문일까, 그녀는 유한이 느끼는 고통을 고스란히 나누어 받으며 가슴을 죄어오는 통증에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날개를 고쳐준 대가가 고작 인간으로서의 수명을 깎아 먹는 저주라니. 역시 인간의 신이란 가증스럽기 짝이 없군. 차라리 내가 저 밖에 있는 놈들을 전부 찢어 죽이고 오겠다.”
루시엘라가 마검의 자루를 쥐며 살기를 뿜어냈다. 그녀의 몸 주변으로 검은 마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유한은 부드럽게 그녀의 손목을 잡아 말렸다. 차갑고 가녀린 손목을 쥐는 유한의 손길은 온화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는 단호했다.
“지금 나가면 제국의 신성 감시망에 네 마력이 고스란히 노출된다. 그레고리는 내 백색 신성력만을 쫓고 있지만, 마왕녀의 마기가 감지되는 순간 제국 본대가 움직일 거다. 여기 머물며 마력을 안정이 최우선이다.”
“하지만 네 몸이…….”
“내 걱정은 하지 마라. 이 정도 고통은 교단의 위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유한은 차갑게 미소 지으며 품속에서 빛바랜 은빛 성경을 꺼냈다. 가문 대대로 내려온 성물이자, 제국의 신성 탐지망을 일시적으로 왜곡해 주는 유일한 보물이었다.
숲 너머에서 들려오는 사냥개들의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제국 이단 심문소의 광신적인 지휘관, 인퀴지터 그레고리가 보낸 사냥개 조련사 ‘킬러’의 광견들이 마기의 냄새를 맡고 안개 숲 경계선까지 당도한 것이 분명했다.
“내가 잠시 외곽을 정찰하고 오마. 넌 성당 지하 크립트에 숨어 있어라. 내 허락 없이는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마라.”
루시엘라는 불만스러운 듯 붉은 입술을 깨물었지만, 영혼 깊숙이 각인된 복종의 본능과 유한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지하 통로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유한은 은빛 성경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은은한 은백색 기류가 그의 전신을 감싸 안으며, 그의 성스러운 신성 파장을 평범한 자연 마나의 흐름으로 기만하기 시작했다.
유한은 성당 문을 열고 안개 숲의 축축한 대지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
안개 숲의 외곽은 짙은 마력 안개로 가득 차 시야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유한은 나무 둥지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오감을 극대화하여 주변을 탐색했다. 사방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숲의 정령들이 경고하듯 귓가에 속삭였다.
바스락.
낙엽이 밟히는 미세한 소리와 함께, 등 뒤의 안개가 비자연적으로 일렁였다.
유한의 진실의 안광(眞實의 眼光)이 본능적으로 가동되었다. 그의 청색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나며, 안개 너머에서 접근하는 거대한 실루엣의 마력 궤적을 꿰뚫어 보았다.
쉬이익!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거대한 강철 대검이 안개를 가르며 유한의 목덜미를 향해 수평으로 그어졌다.
유한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상체를 뒤로 젖혔다. 서늘한 칼날이 그의 코끝을 간발의 차이로 스쳐 지나갔다. 대검이 품고 있는 묵직한 투기가 바람을 일으키며 유한의 은발을 세차게 흔들었다.
“쥐새끼 같은 제국의 사제 놈이 용케도 피하는군.”
안개 속에서 걸어 나온 자는 거구의 사내였다. 검은 머리를 대충 뒤로 묶고, 온갖 전투의 흉터가 가득한 얼굴에 냉소적인 미소를 지은 사내. 낡은 가죽 갑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그가 뿜어내는 기운은 제국의 최정예 성기사단원조차 압도할 만큼 묵직했다.
탈영병이자 방랑 검사, 칼스였다.
칼스는 대검의 궤도를 부드럽게 꺾어 다시 한번 유한의 가슴을 겨눴다. 칼끝이 유한의 찢어진 백색 사제복 정중앙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그대로 심장을 꿰뚫을 형세였다.
“그 하얗고 가증스러운 옷을 보니 역겨움이 치미는군. 이단 심문소의 첩자 놈이 이 깊은 안개 숲까지 무슨 일로 기어들어 왔지? 대답에 따라 네 목과 몸을 분리해 주마.”
칼스의 목소리에는 뼈에 사무친 증오가 서려 있었다. 그는 유한을 그레고리가 보낸 심문소의 프락치로 오해하고 있었다.
유한은 목에 칼끝이 닿아 있는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기를 쥐지 않은 양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평온하고 자비로운 태도를 유지했다.
“난 제국의 첩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위선에 맞서다 파문당하고 쫓기는 몸이지.”
“하! 파문당한 성자라니, 거짓말치고는 제법 그럴듯하군. 하지만 네 사제복에 새겨진 문양은 속이지 못한다. 제국의 개들이 입는 옷이지.”
칼스의 검날이 유한의 목 피부를 미세하게 긁었다. 붉은 피 한 방울이 은빛 칼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유한은 진실의 안광을 깊게 작동시켰다. 투명한 청색 눈동자가 칼스의 영혼 깊은 곳을 투시했다. 칼스의 영혼은 거대하고 강인했지만, 그 중심부는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는 상처로 가득했다. 그것은 죄 없는 수인족과 이종족을 학살하는 전장에 강제로 동원되어 자행했던 피비린내 나는 행위에 대한 깊은 죄책감과 자기혐오의 사슬이었다.
유한은 나지막이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상대의 영혼을 흔드는 기묘한 주파수, ‘영혼의 고해성사’의 마력이 실려 있었다.
“방랑하는 검사여. 네 검 끝이 흔들리고 있군. 네 분노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제국의 깃발 아래서 무고한 수인들의 목을 베었던 과거의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닌가?”
“……뭐라?”
칼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의 강철 같은 악력이 순간적으로 미세하게 느슨해졌다.
“네 검날의 홈 사이에 박힌 검붉은 흔적. 그것은 악마의 피가 아니다. 제국의 성전군이 ‘정화’라는 이름 아래 무참히 학살했던, 살려달라 울부짖던 수인 아이들의 피지. 늙은 사제 요한은 말했다. 참회하지 않는 칼날은 결국 스스로의 영혼을 베어 넘길 뿐이라고.”
“닥쳐라! 네놈이 뭘 안다고 그 입을 함부로 놀려!”
칼스가 분노를 터뜨리며 대검을 내리쳤다.
쿠우웅!
대검이 유한의 발바닥 바로 옆 대지를 내리찍으며 거대한 먼지 폭풍을 일으켰다. 유한은 피하지 않고 그 파괴적인 참격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칼스의 검은 유한의 살결을 비껴갔다. 분노에 찬 외침과 달리, 그의 검로에는 살기가 아닌 극심한 고뇌와 고통만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유한은 대지에 박힌 대검을 내려다보며, 한 걸음 다가가 칼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끝에서 따뜻하고 온화한 정화의 은빛 광채가 흘러나와 칼스의 가죽 갑옷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죄책감에 짓눌려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은 기사도가 아니다. 진정한 참회는 검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검으로 위선적인 포식자들의 목을 베어 약자들을 수호하는 것이다. 나와 함께 제국의 위선을 무너뜨리지 않겠나, 칼스?”
유한의 영혼의 고해성사가 칼스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죄책감의 사슬을 강타했다. 칼스의 머릿속에 과거 자신이 자행했던 학살의 환각과 무고한 비명 소리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의 오만한 신념이 안에서부터 완벽하게 붕괴되고 있었다.
“아…… 으아아악!”
칼스는 대검의 자루를 놓치며 무릎을 꿇었다. 거구의 사내가 대지에 머리를 처박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넓은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평생 그를 괴롭히던 죄책감의 무게가, 유한의 자비로운 정화 마력과 참회 교리 앞 세련된 고발에 의해 비로소 구원의 방향을 찾은 것이다.
“내 검이…… 진정으로 속죄할 길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칼스가 충혈된 눈으로 유한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냉소나 적대감이 없었다. 오직 구원을 갈구하는 숭고한 무인의 신뢰만이 서려 있었다.
“내 곁에 서라. 네 검은 이제 무고한 피를 흘리는 도구가 아닌, 위선의 제단을 부수는 심판의 검이 될 것이다.”
유한이 손을 내밀었다. 칼스는 떨리는 손으로 유한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리고 대지에 박힌 자신의 대검을 뽑아 들어 유한의 발아래 비장하게 바쳤다.
“방랑 검사 칼스. 오늘부터 성자님의 첫 번째 검이 되어 성당의 외곽 방어를 책임지겠나이다. 제국의 개들이 이 성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칼스는 가슴에 손을 얹고 기사도의 맹세를 바쳤다. 유한의 통찰력과 지략이 무력한 강적을 완벽한 동맹으로 포섭해 낸 순간이었다. 유한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칼스의 대검을 돌려주었다.
“든든하군. 칼스, 네게 성당의 외곽 경비를 맡기마. 제국군의 동태를…….”
유한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짙은 안개 너머에서 등등한 살기가 성당 결계의 경계선을 향해 좁혀오기 시작했다.
그르르르……! 컹! 컹!
소름 끼치는 짐승들의 으르렁거림과 함께,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가 안개 속에서 울려 퍼졌다. 마기를 감지하고 피에 굶주린 제국 이단 심문소의 사냥개들이 마침내 고대 성당을 감싸고 있는 환각 결계의 바로 앞까지 도달한 것이다.
“성자님, 적들의 사냥개입니다! 결계의 주파수를 감지한 모양입니다!”
칼스가 즉시 대검을 고쳐 잡으며 유한의 앞을 막아섰다. 안개 너머로 붉게 빛나는 광견들의 눈동자가 수십 개씩 어둠 속에서 번뜩이기 시작했다.
조련사 킬러가 이끄는 사냥개들이 결계 경계선에 코를 처박고 맹렬하게 짖어대며, 성당의 평화로운 침묵을 사정없이 깨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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