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금고와 분노의 단죄
“쿠구구구구—!”
지하 피의 연금술 실험실의 사방 벽면을 뒤덮은 붉은 마법진이 기괴한 맥박처럼 고동치기 시작했다. 펠릭스가 도주하며 가동한 자폭 장치. 석실의 천장에서부터 무거운 대리석 가루와 돌덩이들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바닥에 새겨진 마법 각인들이 붉은 빛을 내뿜으며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은 단 3분.
“형님! 지하가 완전히 무너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의적 출신 도둑 한스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나선형 돌계단 쪽을 가리켰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지유한은 위장된 갈색 머리와 회색 눈동자 너머로 냉철하게 전황을 짚어냈다. 어깨의 상처는 안정되었으나, 가슴속 ‘배덕의 성흔’이 사방의 광포한 마력에 반응해 욱신거리는 통증을 유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한은 흔들리지 않았다.
“칼스, 칸을 부축해라. 한스는 앞장서서 남작의 집무실로 향한다. 우리의 목표는 남작의 비밀 금고다.”
“알겠습니다, 성자님!”
칼스가 산성 가스에 부식되어 찢어진 왼쪽 어깨의 가죽 갑옷을 움켜쥐면서도, 흑강 대검을 고쳐 잡고 호랑이 수인 전사 칸의 거구를 지탱했다. 유한의 자비로운 정화 광휘로 고문의 상처를 치유받은 칸은, 붉은 눈동자에 깃든 불신을 완전히 거두고 무거운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성자여, 내 몸은 이미 움직일 수 있다. 내 등을 빌려주지.”
칸은 쇠사슬에서 해방된 거대한 근육질 구릿빛 육체를 일으켜 세우더니, 철창 속에 갇혀 신음하던 쇠약한 수인 난민 두 명을 양팔로 가볍게 안아 올렸다. 야수 전사의 압도적인 괴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가자!”
유한 일행은 무너져 내리는 지하 석실을 뒤로하고 가파른 계단을 향해 질주했다. 발밑의 대지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쿠르릉! 쾅! 그들이 통과한 직후 계단의 아랫부분이 거대한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며 어두운 심연 속으로 사라졌다. 일말의 지체도 허용되지 않는 한계 상황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성채 상층부에 위치한 남작 발렌타인의 화려한 집무실에 당도했다. 붉은 융단이 깔린 넓은 방안은 지하의 진동 여파로 액자들이 비뚤어지고 도자기가 깨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남은 시간은 1분 30초.
“한스, 초상화 뒤편이다.”
유한의 지시에 한스가 남작의 책상 뒤에 걸린 거대한 영주 초상화를 거칠게 찢어발겼다. 그 뒤로 강철로 주조된 복잡한 마법 기하학 자물쇠가 새겨진 비밀 문이 드러났다. 제국의 고위 보안 각인이 촘촘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건 일반적인 도구로는 풀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스가 비열하게 웃으며 품속에서 마법 각인이 새겨진 열쇠를 꺼내 들었다. 15화의 난전 속에서 도망치던 남작 발렌타인의 품에서 소리 없이 소매치기해 확보한 ‘남작의 비밀 마법 열쇠’였다.
철컥.
열쇠가 자물쇠의 정중앙에 부드럽게 맞물려 들어갔다. 한스가 미세한 바람의 마력을 주입하자, 금빛 마법 회로가 ‘웅—’ 하는 공명음과 함께 양옆으로 갈라지며 벽면 전체가 열려젖혀졌다.
그곳이 바로 제국 교단과 남작이 불법으로 축적한 부의 원천, ‘발렌타인의 비밀 금고’였다.
“이, 이게 다 뭐야……!”
한스가 입을 쩍 벌렸다. 금고 내부의 선반에는 교단이 면죄부를 판매하며 무고한 신도들에게 강탈한 고가치의 ‘속죄 보석’들이 붉고 푸른 마력을 뿜어내며 쌓여 있었다. 그 아래에는 제국의 표준 화폐인 ‘신성 금화’가 가득 담긴 무거운 철제 상자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주저할 시간 없다. 전부 쓸어 담아라. 이 재화들은 제국의 위선을 깨부수고 우리 동맹을 지탱할 피와 살이 될 것이다.”
유한의 냉철한 명령에 한스가 자신의 차원 주머니를 열어젖혔다. 촤르르륵! 보석들과 수천 닢의 신성 금화 상자들이 순식간에 주머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유한 역시 정제된 순수 성수 병들을 품속에 신속하게 챙겨 넣었다.
남은 시간은 40초.
탈출하려던 바로 그 순간, 집무실의 대리석 문이 거칠게 부서지며 수십 명의 중장갑 사병들이 복도를 가로막아섰다.
“이 더러운 쥐새끼들이 감히 내 금고에 손을 대느냐!”
복도의 끝에서 푸르스름한 실험 부작용 피부와 붉게 충혈된 눈을 지닌 남작 발렌타인이 사설 기사단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마수들을 제어하는 지휘 홀이 쥐여 있었고, 그의 얼굴은 분노로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지하는 곧 무너진다! 하지만 너희는 이 성채를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 기사단, 방패진을 전개해 저놈들의 퇴로를 완벽히 봉쇄해라!”
철컥! 쾅!
남작의 명령에 따라 거대한 철제 방패를 든 중갑 기사들이 좁은 복도를 빈틈없이 가로막았다. 칼스가 대검을 쥐고 정면 돌파를 시도하려 했으나, 부식된 왼쪽 어깨의 통증과 좁은 지형 때문에 적의 단단한 방패진을 뚫어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대지가 다시 한 번 크게 흔들리며 천장에서 거대한 석조 기둥이 무너져 내렸다. 탈출할 시간은 이제 20초도 남지 않았다. 물리적인 전투로 시간을 허비했다간 성채와 함께 매몰될 터였다.
유한은 칼스를 제지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 그의 위장된 회색 눈동자가 순간 투명한 청색 빛으로 타올랐.
‘진실의 안광(眞實의 眼光).’
유한의 시야 속에서 남작 발렌타인의 영혼이 투시되었다. 남작의 영혼 핵 주변에는 제국 교단의 공금을 횡령한 탐욕의 흔적, 수인들을 납치해 피를 짜내며 느꼈던 비열한 죄책감, 그리고 신의 이름을 사칭하면서도 스스로가 타락했음을 인지하는 위선적인 공포가 얽히고설킨 붉은 파동으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유한은 단전의 성력을 끌어올려 목소리에 실었다. 그것은 단순한 음성이 아닌, 상대방의 영혼에 직접 신벌의 낙인을 찍는 초월적인 정신 공격이었다.
“발렌타인 남작.”
유한의 목소리가 좁은 집무실과 복도 전체에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영혼의 고해성사(靈魂의 告解聖事).’
“너는 신성한 교단의 이름 뒤에 숨어 무고한 이종족의 피를 갈아 위선의 성수를 정제했다. 네가 갈취한 신성 금화와 속죄 보석들은 신의 축복이 아닌, 네 목을 조르는 사신의 사슬이다. 네가 지하 감옥에서 학살한 수인들의 원혼이 지금 네 영혼을 심연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가?”
쿠구구구!
남작 발렌타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공포로 물들었다. 그의 머릿속에 자신이 가혹하게 채찍질하고 피를 뽑아 죽였던 수인들의 원혼들이 기괴한 환각이 되어 덮쳐오기 시작했다. 수천 닢의 황금 동전들이 뜨겁게 달아올라 자신의 살을 태우는 듯한 극심한 환통이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끄, 으아아악! 내 머리가! 내 몸이 타고 있다! 저 괴물들을 치워라!”
발렌타인은 머리를 감싸 쥐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의 칠공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넘쳤다. 자신이 평생 쌓아온 종교적 위선과 죄책감이 유한의 고해성사 진언에 의해 완벽하게 무기로 변해 그의 뇌를 파괴한 것이다.
“남작님이 쓰러지셨다! 대체 무슨 마법을……!”
중갑 기사들이 지휘관의 갑작스러운 정신 붕괴와 피를 토하는 모습에 극도의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방패진을 흐트러뜨렸다.
“지금이다! 쓸어버려라!”
유한의 외침과 동시에, 호랑이 수인 칸이 포효하며 앞으로 돌진했다. 칸의 거구에서 뿜어져 나온 야성의 투기가 흐트러진 방패진을 단숨에 들이받았다.
콰아아앙!
단단했던 철제 방패들이 칸의 무지막지한 돌격에 힘없이 깨어져 나갔고, 경비병들이 사방으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칼스가 그 뒤를 이어 대검을 휘둘러 남은 적들의 전열을 완전히 조각냈다.
“이쪽이다!”
한스가 미리 파악해 둔 집무실 옆의 테라스 창문을 가리켰다. 유한 일행은 무너지기 시작한 테라스 난간을 딛고 성채 외곽의 정원을 향해 몸을 날렸다.
쿠구구구구구—! 콰아아아앙!
그들이 정원의 잔디밭에 착지하여 숲의 경계로 달리기 시작한 순간, 발렌타인 남작 성채의 지하 실험실에서부터 시작된 대폭발이 상층부까지 치솟았다. 웅장하고 사치스러웠던 영주성이 거대한 불꽃과 먼지 구름을 뿜어내며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
무너지는 성채의 먼지 더미 속에서, 유한 일행은 무사히 수인들을 데리고 안개 숲 외곽으로 대피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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