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 성채 침투 작전
비가 그친 밤의 공기는 지독할 정도로 축축하고 차가웠다.
안개 숲을 빠져나온 세 개의 검은 그림자가 발렌타인 남작 성채의 거대한 석조 외벽 아래에 이르렀다. 높이 치솟은 검은 벽면은 빗물을 머금어 음산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성벽 군데군데 걸린 횃불만이 바람에 흔들리며 위태로운 불씨를 흩날렸다.
“과연 영주성답게 경비가 삼엄하군요. 정문 수색대뿐만 아니라 성벽 위에도 경비병들이 가득합니다.”
갈색 머리로 위장한 한스가 특유의 날렵한 눈매를 가늘게 뜨며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지만, 입가에는 여전히 특유의 얄팍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지유아를 구출하기 위한 사흘이라는 짧은 시간. 그 시간 안에 제7검문소를 백업하는 남작의 자금줄과 보급선을 끊어야 했다. 유한은 차갑게 가라앉은 회색 눈동자로 성채의 어둠을 응시했다. 현재 그는 ‘로엔의 환각 위장술’을 펼쳐 성스러운 은발과 청색 눈동자를 평범한 갈색 머리와 회색 눈의 약초상 모습으로 철저히 숨기고 있었다. 성흔의 수명 단축 저주로 가슴팍이 욱신거렸지만, 내색할 시간조차 없었다.
“칼스, 한스. 준비해라. 지금부터 성채 내부로 진입한다.”
유한의 나직한 명령에 칼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천에 감싼 거대한 흑강 대검을 고쳐 메었다.
유한은 숨을 깊이 들이쉬며 손끝에 미세한 신성력을 모았다. 그리고 그 힘을 숲의 자연 마나와 동조시키며 자신들의 신체 주변으로 방출했다.
‘빛의 은신막(빛의 隱身幕).’
스으으윽.
순간 세 사람의 신체 주변의 공기가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더니, 주변의 어둠과 완벽하게 동화되며 시각적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빛의 굴절을 조절해 완벽한 투명 상태를 만드는 극도의 정밀한 기예였다.
세 사람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성벽 아래의 좁은 배수구 통로를 향해 움직였다. 바르토의 지도가 없었다면 존재조차 몰랐을 성채 내부로 통하는 은밀한 침투로였다.
통로 내부로 진입하자마자 횃불을 든 사설 경비병 두 명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좁은 통로 안에서 발소리가 무겁게 울려 퍼졌다. 칼스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경비병의 목덜미를 쳐서 기절시키려 했다.
“멈춰라, 칼스.”
유한이 급히 칼스의 손목을 붙잡았다. 유한은 ‘진실의 안광’을 가볍게 가동해 다가오는 경비병들의 투구를 투시했다.
“투구 안쪽에 미세한 붉은색 마법 각인이 보인다. 제국 교단이 하사한 경보 술식이다. 저들의 신체에 강한 물리적 충격이 가해지거나 의식을 잃는 순간, 성채 전체에 경보가 울리게 설계되어 있다.”
칼스가 침을 꿀꺽 삼키며 손을 거두었다. 적들의 보안은 상상 이상으로 치밀했다. 유한은 은신막을 더욱 두껍게 두르며 벽면에 밀착했다. 경비병들은 투명하게 변한 세 사람의 바로 옆을 지나치면서도 아무런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무심히 걸어갔다. 물리적인 타격 대신 빛의 굴절을 이용한 완벽한 기만이었다.
경비병들이 사라지자 한스가 앞장섰다. 그들이 도달한 곳은 성채 지하 깊은 곳으로 통하는 거대한 삼중 철문 앞이었다. 철문의 표면에는 제국 교단의 은빛 성력 각인이 촘촘하게 새겨져 있어, 허가받지 않은 자가 만지면 즉시 성력 폭발과 함께 경보를 울리게 되어 있었다.
“제법 까다로운 장난감이군요.”
한스가 씩 웃으며 품속에서 ‘만능 열쇠’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제 손가락이 가장 좋아하는 종류의 잠금장치입니다. 제국의 잘난 성직자놈들은 기계적인 정교함보다 마법적인 각인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한스가 조심스럽게 자물쇠 구멍에 열쇠를 밀어 넣었다. 그의 손끝에서 미세한 바람의 정령력이 흘러나와 자물쇠 내부의 마법 회로를 부드럽게 헤집기 시작했다. 유한은 한스의 뒤편에서 빛바랜 은빛 성경을 가볍게 쥐고, 그가 작업하는 동안 새어 나올 수 있는 마력의 파동을 완벽하게 왜곡하여 차단했다.
째깍, 째깍.
시간이 멈춘 듯한 긴장감 속에서 자물쇠 내부의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철문에 새겨져 있던 은빛 성력 각인이 흐릿해지며 소리 없이 녹아내렸다.
철컥.
“해제했습니다. 무소음입니다.”
한스가 자랑스럽게 속삭이며 무거운 철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자, 지하 지하 통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정상적으로 차갑고 음습한 기운이 세 사람의 뺨을 때렸다.
그 공기 속에는 숲의 썩은 흙냄새와는 완전히 다른, 쇠붙이가 타들어 가는 듯한 지독한 피비린내(血腥味)가 섞여 있었다. 유한의 미간이 차갑게 좁혀졌다. 소문으로만 듣던 남작의 추악한 이면이 바로 이 아래에 잠들어 있음을 직감했다.
어두운 돌계단을 따라 지하 깊숙이 내려갈수록 피비린내는 점점 더 짙어졌다. 통로 모퉁이를 돌려던 찰나, 동굴 벽면 너머에서 기괴한 짐승들의 거친 숨소리와 으르렁거림이 들려왔다. 성력을 주입받아 마기를 감지하는 남작의 사설 마수 정찰견들이었다.
“냄새를 맡고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은신막으로도 냄새까지 숨길 수는 없습니다.”
칼스가 대검 자루를 꽉 쥐며 경계했다.
유한은 침착하게 한스에게 신호를 보냈다. 한스는 품속에서 은빛으로 조각된 소형 ‘환각의 안개 향로’를 꺼내 들었다. 유한이 향로 내부의 특수 약초에 미세한 마력을 불어넣자, 달콤하면서도 몽환적인 보라색 안개가 통로 바닥을 타고 빠르게 번져나갔. 국경지대의 귀한 안개 꽃 이슬 자원을 대량으로 소모한 연기였다.
보라색 안개가 정찰견들의 코끝에 닿는 순간, 거칠게 으르렁거리던 괴수들의 눈빛이 흐려졌다. 녀석들은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제자리를 맴돌더니, 이내 가장 끔찍하면서도 달콤한 환각에 빠져들어 바닥에 조용히 엎드렸다. 단 한 번의 소란도 없이 경비견들의 오감을 완벽하게 마비시킨 것이다.
“과연 성자님의 안개 향로군요. 아주 부드럽게 잠들었습니다.”
한스가 감탄하며 안개를 헤치고 나아갔다.
마침내 세 사람은 통로 끝의 거대한 석문을 열고 지하 중심부인 ‘피의 연금술 실험실’ 내부로 진입했다.
그리고 그곳에 펼쳐진 광경을 목격한 순간, 세 사람의 숨결이 완전히 멎었다.
“이…… 이 무슨 뒤틀린 지옥이란 말인가…….”
칼스의 목소리가 분노와 경악으로 부르르 떨렸다. 평생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참혹한 광경을 보아왔던 백전노장 기사조차도 눈앞의 광경에는 이성을 잃을 뻔했다.
넓고 음습한 지하 석실 사방에는 거대한 구리 증류기와 유리 파이프들이 기괴한 톱니바퀴 소리를 내며 가동되고 있었다. 파이프 내부를 흐르고 있는 것은 투명한 성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무스름하고 붉은, 지독한 원한의 마기가 서린 수인들의 피였다.
석실 벽면을 따라 겹겹이 쌓인 철창들 속에는 수많은 수인족 난민들이 갇혀 있었다. 늑대 수인, 토끼 수인, 표범 수인들의 팔다리에는 굵은 바늘과 호스들이 강제로 꽂혀 있었고, 그들의 생명력과 피가 실시간으로 추출되어 중앙의 대형 가마솥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그 붉은 피에 제국의 부정한 성력이 주입되자, 피는 기만적이게도 아름답고 영롱한 황금빛 액체로 탈바꿈했다.
제국 교단이 신도들에게 천상의 기적이라 속이며 팔아치우던 ‘기적의 성수’의 실체가 바로 이곳에서 수인들의 생명력을 쥐어짜 만들어진 추악한 마력 각성제였던 것이다.
“빛의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정화가…… 고작 이따위 학살과 착취였단 말인가.”
유한의 회색 눈동자 너머로 은밀하게 청색 안광이 번뜩였다. 그의 가슴속에서 위선적인 제국 교단과 양부 마르쿠스를 향한 맹렬한 분노가 불꽃처럼 치솟았다. 겉으로는 성스러움을 가장하며 뒤로는 이종족을 가축 이하로 부리는 제국의 민낯을 눈앞에서 확인한 순간이었다.
유한은 주먹을 꽉 쥐며 분노를 통제했다. 이 참혹한 증거와 수인들을 구출하는 것이야말로 제국을 무너뜨릴 가장 강력한 칼날이 될 터였다.
그가 철창을 부수고 수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지하 석실 가장 깊은 곳, 어두운 철창 구석에서 쇠사슬이 거칠게 쓸리는 소리와 함께 지독하게 낮고 거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윽…… 끄으으…….”
그것은 고통 속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은 맹수의 울음소리와도 같았다. 유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 어두운 철창 구석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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