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령의 검은 그림자
가쁜 숨결이 차가운 어둠을 갈랐다.
지유한은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전신을 타고 흐르는 낯설고도 익숙한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심장 박동에 맞춰 맥박을 타고 도는 에너지는 차갑고 무거우면서도, 동시에 기묘할 정도로 부드럽게 그의 혈맥을 감싸 안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신성력이 아니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마계의 마기. 하지만 그 흐름은 유한의 체내에 존재하는 ‘시원의 성체’와 한 치의 반동도 없이 완벽하게 어우러져 심장을 뛰게 만들고 있었다.
“깨어났어……? 정말 깨어난 거지, 유한?”
지독하리만큼 애절하고, 동시에 소름 끼치도록 집착 어린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유한이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두 개의 안광이 보였다. 은발을 길게 늘어뜨린 제1마왕녀, 루시엘라였다. 그녀는 유한의 침대 맡에 무릎을 꿇은 채, 그의 손을 두 손으로 터질 듯이 꽉 쥐고 있었다. 그녀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칠흑빛 타락 천사의 날개가 유한의 몸을 덮쳐 감싸 안듯 둥글게 펼쳐져 있었다.
“일주일 만이야…….”
루시엘라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오만하기 짝이 없던 마왕녀의 얼굴은 눈물자국과 초조함으로 얼룩져 있었다.
“네 심장이 멈추려 할 때마다, 내 마력을 네 가슴의 성흔에 주입했어.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아니, 당신이 사라진 세상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야? 왜 자신을 태워가며 결계를 고친 거냐고!”
그녀의 손가락이 유한의 가슴팍에 새겨진 ‘배덕의 성흔’ 위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백색과 흑색의 나선 문양이 새겨진 그 자리에는, 지난번 폭주로 인해 검붉은 피가 흐르는 듯한 미세한 균열 흉터가 더욱 깊게 새겨져 있었다. 성흔의 저주가 그의 수명을 갉아먹고 있다는 증거였다.
유한은 창백한 안색으로 나지막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뺨에 묻은 눈물을 닦아주었다.
“내가 말했지, 루시엘라. 멈추지 않는다고. 결계가 무너지면 우리에겐 미래가 없다. 그리고…… 네가 살아있는 한, 나는 쉽게 죽지 않아.”
“유한…….”
루시엘라는 그의 따뜻한 손길바닥에 자신의 뺨을 비비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영혼은 이미 유한에게 완벽하게 종속되어 있었다. 단순한 성흔의 계약을 넘어, 자신을 위해 목숨과 수명을 바친 이 인간 사제에게 미칠 듯한 집착과 사랑을 품게 된 것이다.
그때, 성당 예배당 쪽에서 급박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벌컥 열리며 표범 수인 상인 바르토가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들이닥쳤다. 그의 화려한 상인 로브는 흙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표범 특유의 기민한 귀가 극도의 불안감으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성자님! 깨어나셨군요!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아니, 지금은 기뻐할 때가 아닙니다! 국경지대에 대재앙이 닥쳤습니다!”
유한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깨의 부식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의 청색 눈동자는 순식간에 차갑고 예리하게 가라앉았다.
“바르토, 진정하고 말해라. 무슨 일인가?”
“제국에서…… 교황청에서 움직였습니다! 성자님의 양부인 대주교 마르쿠스가 은밀히 군대를 움직여, 성자님의 친여동생인 지유아 님을 국경의 ‘제7검문소’로 압송하고 있습니다!”
쿵.
유한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가슴팍의 성흔이 그의 감정에 반응하듯 검붉은 빛을 내뿜었다. 지유아. 그의 유일한 역린이자 가문이 멸문당한 후 교단에 인질로 잡혀 있던 소중한 여동생이었다.
“유아를…… 국경으로?”
“예! 마르쿠스 그 위선자 놈이 성자님의 생존을 확신하고, 유아 님을 미끼로 삼아 성당 밖으로 끌어내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이 지역의 영주인 남작 발렌타인이 자신의 사설 기사단과 연금술 마수들을 동원해 군사적 백업을 맡고 있습니다. 검문소 주변은 이미 개미 한 마리 통과할 수 없는 죽음의 덫이 되어 있습니다!”
바르토의 보고가 끝나기 무섭게, 문가에 대기하고 있던 방랑 검사 칼스가 굳은 표정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손은 이미 등에 멘 흑강 대검의 자루를 꽉 쥐고 있었다.
“성자님, 더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제 검이 앞장서겠습니다. 당장 제7검문소를 정면으로 돌파해 유아 님을 구출해야 합니다! 제국의 위선자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버리겠습니다!”
칼스의 뜨거운 분노가 예배당을 채웠다. 하지만 유한은 오히려 얼음처럼 차가운 침묵을 유지했다. 그의 두 눈은 투명할 정도로 맑은 청색 빛을 발하며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르쿠스. 과연 당신답군.’
유한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맹렬한 분노를 이성이라는 차가운 틀에 가두었다. 그는 전직 교황 후보이자 지략가였다. 적이 파놓은 덫이 뻔히 보임에도 감정에 휘둘려 정면으로 돌진하는 것은 자멸을 의미했다.
“아니, 칼스. 정면 돌파는 기각한다.”
유한의 단호한 목소리가 칼스의 말을 가로막았다.
“어째서입니까, 성자님! 여동생분이 제국의 손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르쿠스가 노리는 바다. 제7검문소는 개활지다. 게다가 백야단의 정예 매복 병력과 남작의 연금술 군대가 겹겹이 진을 치고 있겠지. 우리가 그곳으로 달려가는 순간, 사방에서 포위망이 좁혀올 것이다. 적의 의도대로 움직여주는 바보짓은 하지 않는다.”
유한은 몸을 돌려 바르토가 가져온 국경지대의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검문소가 아닌, 하인즈 빈민가 북쪽에 위치한 거대한 성채를 지목했다.
“남작 발렌타인 성채. 덫을 놓은 사냥꾼의 손목을 먼저 자른다.”
바르토와 칼스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영주성을 먼저 기습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발렌타인 남작은 검문소 압송 작전의 군사적 물주이자 핵심 백업 세력이다. 그들의 후방 보급 거점이자 본거지인 영주성을 선제 타격한다. 성채를 털어 적들의 지원망을 완전히 차단하고, 동시에 구출 작전에 필요한 군자금과 성수 재료를 확보한다. 적들이 우리가 검문소로 달려올 것이라 예상하고 방심한 찰나, 가장 허술해진 영주성의 배후를 찌르는 거다.”
유한의 냉철하고 치밀한 지략에 칼스는 꿀꺽 침을 삼켰다. 분노에 휩싸여 시야가 흐려졌던 자신과 달리, 유한은 판세의 가장 치명적인 급소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바르토, 성채 내부의 상세한 구조가 필요하다.”
유한의 요구에 바르토는 긴장된 표정으로 품속에서 가죽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제단 위에 펼쳤다.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성자님. 제 밀수 상단이 남작령을 드나들며 확보한 성채의 사설 경비대 순찰 주기와 비밀 통로의 지도입니다. 그리고…… 정보원 세실의 보고에 따르면, 성채 지하 깊은 곳에 제국 교단이 철저히 숨겨온 금지된 생체 실험실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수인들의 피를 뽑아 가짜 성수를 정제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지도를 바라보는 유한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생체 실험실이라…… 아주 유용한 패를 쥐고 있었군, 발렌타인.”
유한은 가슴의 통증을 억누르며 단호하게 선포했다.
“한스에게 연락해라. 이번 작전은 침투와 도둑질이다. ‘로엔의 환각 위장술’을 전개해 신성력을 숨기고 평민으로 위장하여 성채 내부로 잠입한다. 남작의 금고와 실험실을 통째로 털어버릴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위선적인 제국을 향한 타협 없는 복수심과, 여동생을 구하기 위한 배덕의 구원자로서의 카리스마가 가득 차 있었다.
“이송 마차가 제7검문소에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사흘. 사흘 안에 남작의 성채를 무너뜨리고, 유아를 구출할 완벽한 전력을 갖춘다. 야간 출정을 준비해라.”
바르토가 건넨 지도의 차가운 감촉이 유한의 손끝에 닿으며, 제국의 위선적인 후방을 뒤흔들 거대한 하이스트 작전의 서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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