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계 복구와 어둠의 계약
지하 제단의 천장이 낮게 울렸다. 붉은 성력의 광선들이 석조 틈새를 뚫고 송곳처럼 내리꽂힐 때마다, 고대 백색 대리석 바닥이 잘게 떨리며 먼지를 토해냈다. 제국 이단 심문소의 지휘관 그레고리가 전개한 대규모 탐지 마법진이 마침내 안개 숲의 심장부까지 뻗어온 것이다.
지하 제단 중앙에 안치된 고대 결계 수정은 이미 한계였다. 자객 섀도우V가 남긴 사신의 독기가 수정 표면을 검붉게 오염시키며 거미줄 같은 균열을 넓혀가고 있었다. 쩍, 쩌적 하는 불길한 파열음이 들릴 때마다 성당 외곽을 지탱하던 은폐의 장막이 한 겹씩 벗겨져 나갔다.
“유한! 더는 무리야! 네 어깨의 독기가 벌써 심장 근처까지 닿았어!”
루시엘라가 유한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은 채 절규했다. 그녀의 칠흑 같은 타락 천사의 날개가 유한의 몸을 보호하듯 둥글게 감싸 안았다. 5성 마왕급의 마력을 완전히 복원한 그녀였지만, 지금 가슴의 성흔을 통해 전해지는 유한의 고통 앞에서는 한낱 나약한 여인처럼 떨고 있었다. 유한의 은발 끝자락은 이미 독소의 침식으로 인해 검게 물들어가고 있었고, 맑고 청초했던 청색 눈동자는 흐려져 가고 있었다.
“비켜라, 루시엘라. 결계가 완전히 무너지면 외곽에서 버티고 있는 칼스와 로빈이 먼저 개죽음을 당한다. 그리고 우리 역시 제국의 화망에 증발하겠지.”
유한은 들이닥치는 각혈을 억지로 삼키며 차갑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파문당한 성자로서의 냉철한 현실주의와,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결코 저버리지 않겠다는 기묘한 자비심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때, 제단 한구석의 음습한 공동에서 보라색 안개가 기괴하게 일렁였다. 성당 지하 깊은 곳의 봉인석에 깃들어 있던 전대 마왕 아스타르의 잔혼이었다. 안개 형상 중앙에서 붉게 빛나는 두 눈이 유한과 루시엘라를 조소하듯 응시했다.
“킥킥, 가당치도 않은 필멸자의 영웅놀이로군. 꼬마야, 네 그 얄팍한 신성력만으로는 저 수정을 정화하려다 영혼 핵이 먼저 산산조각 날 것이다. 마왕녀의 마기를 억지로 융합하려 들지 마라. 빛과 어둠은 본래 서로를 갉아먹는 법이니까.”
“아스타르. 비웃을 시간선이 있다면 해결책이나 제시해라.”
유한이 제단 수정을 붙잡은 채 이빨을 악물었다. 아스타르의 안개가 유한의 머리 위를 가볍게 맴돌며 낮게 속삭였다.
“내가 전수해 준 ‘아스타르의 영혼 조율법’을 잊었느냐? 신성과 마성을 단전에서 억지로 섞으려 하지 마라. 심장의 박동을 맞추어라. 마왕녀의 심장 고동과 네 심장의 박동을 완벽한 동조 상태로 이끄는 거다. 너희 가슴에 새겨진 ‘배덕의 성흔’이 그 주파수를 매개해 줄 터이니.”
유한은 아스타르의 조언을 즉시 이해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안고 있는 루시엘라의 붉은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루시엘라, 내 호흡에 맞춰라. 네 심장 소리를 내게 들려다오.”
“유한…….”
루시엘라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유한의 가슴팍에 자신의 심장을 바짝 밀착시켰다. 쿵, 쿵, 쿵. 가슴과 가슴이 맞닿자, 두 사람의 심장 박동이 성흔의 검붉은 낙인을 통해 서로에게 생생하게 전도되기 시작했다.
유한은 깊은 호흡을 가동했다.
‘신성력 역류 억제 호흡.’
단전에 남아있던 백색 성력을 미세한 파동으로 쪼개어 심장으로 올리고, 루시엘라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칠흑의 마기를 성흔을 통해 받아들였다.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두 에너지가 심장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부딪치려 할 때마다, 유한은 아스타르의 조율법에 따라 심장 박동의 주파수를 미세하게 조절했다.
쿵. 쿵. 쿵.
어느 순간, 두 사람의 심장 박동이 완벽하게 일치했다.
두 존재의 영혼 주파수가 하나로 묶이는 순간, 두 사람의 가슴에 새겨진 배덕의 성흔이 백색과 흑색의 나선 광채를 뿜어내며 폭발적으로 공명하기 시작했다. ‘배덕의 성흔 1단계: 공명’ 상태가 완벽하게 가동된 것이다. 유한의 단전에서 신성과 마성이 반동 없이 공존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아아아악!”
하지만 그 대가는 처절했다. 유한의 혈맥을 타고 흐르는 융합 마력은 어깨의 사신 독소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살가죽이 안쪽에서부터 타들어 가고 뼈마디가 바스러지는 극통에 유한이 비명을 지르며 각혈했다. 제단 위의 빛바랜 은빛 성경이 그 충격파에 쉴 새 없이 들썩였다.
루시엘라는 경악했다. 성흔의 연결망을 통해 유한이 겪고 있는 영혼의 마모와 극통이 그녀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더욱 끔찍한 것은, 유한이 이 결계를 복구하기 위해 자신의 필멸자로서의 수명과 생명력을 아낌없이 불태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은발 끝자락이 검게 타들어 가고, 그의 생명의 불꽃이 눈에 띄게 약화되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실시간으로 보였다.
‘배덕의 성흔이 지닌 저주’가 유한의 수명을 갉아먹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유한! 당장 멈춰! 이러다 네가 죽어! 차라리 제국군과 싸우다 죽겠어! 제발 멈춰줘!”
루시엘라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유한의 뺨을 적셨. 긍지 높고 오만했던 타락 천사의 마왕녀는 간데없고, 오직 자신의 반려를 잃을지 모른다는 미칠 듯한 죄책감과 광기 어린 집착만이 그녀의 영혼을 지배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 속에서 유한을 향한 맹목적인 소유욕이 무서운 기세로 피어올랐다. 이 남자는 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수명을 바쳤다. 그렇다면 나 역시 이 남자의 존재 없이는 단 1초도 살아가지 않으리라.
“닥쳐라, 루시엘라. 멈추지 않는다.”
유한은 피범벅이 된 오른손을 치켜들어 자신의 손바닥을 날카로운 제단 모서리에 그어버렸다. 붉고 고결한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의 피에는 수천 년에 한 번 태어나는 ‘시원의 성체’ 능력이 머물러 있었다. 절대적인 신성 적합성을 지닌 그의 피야말로 결계를 복구할 가장 완벽한 촉매였다.
유한은 피투성이가 된 손바닥을 고대 결계 수정의 거대한 균열 부위에 거침없이 밀착시켰다.
“고대 정화 결계 복구술(古代 淨化 結界 復舊術)…… 기동!”
콰아아아앙!
성당 지하 전체가 눈부신 백흑의 섬광으로 뒤덮였다. 유한의 피와 성흔의 융합 에너지가 수정의 균열 속으로 폭포수처럼 흘러들었다. 수정 표면을 오염시키고 있던 검붉은 사신의 독기들이 은빛 정화수로 변환되며 씻겨 내려갔고, 쩍쩍 갈라져 있던 틈새들이 완벽하게 맞물려 자가 수리를 시작했다.
위이이이잉!
지하 제단에서 시작된 거대한 정화의 마동 파동이 성당 예배당을 지나 안개 숲 전체로 퍼져나갔다. 숲을 찢어발기며 지하까지 뻗어오던 그레고리의 붉은 탐지 광선들이 백흑의 나선 장벽에 부딪혀 비명 지르듯 산산조각 나며 소멸했다.
숲 전체의 안개가 다시 한번 이전보다 훨씬 짙고 무겁게 가라앉으며 황폐한 고대 성당의 외관을 세상의 시야로부터 완벽하게 감추어버렸다. 결계가 완벽하게 복구된 것이다.
“하아…… 하아……”
결계가 복구되자마자, 유한의 몸에서 힘이 완전히 빠져나갔다. 그의 청색 눈동자가 빛을 잃고 감겼다. 왼쪽 어깨의 부식 상처는 더욱 검고 기괴하게 퍼져 있었고, 그의 호흡은 끊어질 듯 가냘펐다.
“유한! 정신 차려! 유한!”
루시엘라가 쓰러지는 유한을 다급히 받아 안으며 그의 가슴팍에 귀를 대었다. 심장 박동이 극도로 느려져 있었다. 그녀는 미칠 듯한 공포 속에서 자신의 마력을 억지로 짜내어 유한의 심장에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 순간, 제단 위의 보라색 안개가 서늘하게 일렁이며 아스타르의 목소리가 어두운 공간에 울려 퍼졌다.
“킥킥킥, 결국 결계를 수리해 냈군. 하지만 대가가 너무 크구나, 꼬마야. 성흔의 균열이 이제 필멸자의 육체가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주기적인 마왕녀의 마력 주입 없이는 심장이 멈추겠지. 그리고…… 제국의 독점 영약인 ‘천상성수’를 얻어 체질을 개조하지 못한다면, 이 꼬마의 영혼은 조만간 먼지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가슴의 성흔이 검붉은 핏빛으로 타오르는 가운데, 아스타르의 비웃음 섞인 경고가 유한의 흐려지는 의식 속으로 무겁게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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