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랑의 전초전
지유한의 왼쪽 어깨가 검붉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사신의 부식 독약이 살점을 녹여내며 뼈마디를 갉아먹는 극통은, 수많은 고문을 견뎌냈던 그의 정신마저 아득하게 만들 정도로 지독했다. 상처 부위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은빛 사제복을 태우며 불길한 악취를 풍겼다. 독기는 혈맥을 타고 심장을 향해 무자비하게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바보 같은 인간……! 왜 피하지 않은 거야? 왜 나를 두고 네가 다치는 건데!"
루시엘라가 유한을 품에 안은 채 절규했다. 그녀의 칠흑 같은 타락 천사의 날개가 부르르 떨렸다. 분노와 슬픔, 그리고 유한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미칠 듯한 두려움이 그녀의 붉은 눈동자를 피빛으로 물들였다.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유한의 상처를 움켜쥐고 자신의 칠흑 같은 마력을 밀어 넣었다. 독기의 확산을 막기 위한 필사적인 조치였다. 마왕녀의 마기가 유한의 체내로 흘러들자, 가슴에 새겨진 배덕의 성흔이 격렬하게 공명하며 백색과 흑색의 광채를 번갈아 뿜어냈다.
“윽……!”
유한의 입술 사이로 검은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성흔의 균열 통증이 어깨의 맹독과 결합하여 전신을 찢어발기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맑고 푸른 눈동자만큼은 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얼음처럼 차갑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전직 교황 후보이자 지독한 현실주의자인 그는 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감정에 휩쓸리지 않았다.
“울지 마라, 루시엘라. 자객의 독약이 우물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으니…… 그걸로 됐다. 그리고 아직 절망하기에는 이르다.”
따르르릉! 따르릉!
그때, 성당 종탑 위에서 로빈의 날카로운 비상 호각 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며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숲을 가득 메운 백야단의 수백 개 붉은 횃불이 성당 정문을 향해 파도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결계가 깨진 지금, 황폐한 고대 성당은 그들에게 발가벗겨진 것처럼 노출된 상태였다.
쿠구구구!
예배당 문이 거칠게 열리며, 거구의 사내가 굳은 표정으로 들이닥쳤다. 방랑 검사 칼스였다. 그의 손에는 마기를 머금은 거대한 제식 흑강 대검이 들려 있었다. 칼스는 어깨에 깊은 자상을 입고 피를 흘리는 유한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성자님! 습격입니까? 외부의 안개가 걷히며 백야단의 정찰조가 벌써 숲 외곽을 돌파해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칼스, 당황하지 마라.”
유한은 루시엘라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어깨의 상처가 욱신거릴 때마다 은발 끝자락이 검게 변해갔지만, 그의 목소리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단호했다.
“적들의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정찰조가 성당 내부의 정확한 전력을 파악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칼스, 너는 성당으로 통하는 유일한 목구멍인 협곡 진입로를 막아서라. 좁은 지형을 활용해 적의 돌격을 지연시키는 거다.”
“알겠습니다. 놈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 길바닥에 뿌려놓겠나이다!”
“아니, 정면에서 적들을 완전히 섬멸하려 들지 마라. 적들의 수가 너무 많다. 오직 방어선을 사수하며 시간을 버는 것에 집중해라. 로빈이 종탑에서 너를 엄호할 것이다.”
유한은 품속에서 은은한 은백색 기류를 발산하는 ‘빛바랜 은빛 성경’을 꺼내 칼스의 대검에 가볍게 접촉시켰다. 성경에서 흘러나온 미세한 정화의 파동이 흑강 대검의 검신에 얇은 광채의 막을 씌웠.
“성경의 기운이 네 검의 투기를 일시적으로 감출 것이다. 기습의 이점을 살려라.”
“성자님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칼스는 대검을 고쳐 쥐고 폭풍처럼 성당 밖으로 뛰어나갔. 유한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 뒤, 곁에서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루시엘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루시엘라, 나를 지하 제단으로 인도해다오. 고대 결계 수정에 가해진 독기를 정화하고 결계를 임시로라도 복구해야 한다. 결계가 살아나지 않으면 우리는 이 성당째로 제국의 화망에 증발할 것이다.”
루시엘라는 유한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며 그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움직이지 마. 내가 안고 갈 테니까. 네 몸은 지금 한 걸음만 걸어도 혈맥이 터질 상태야. 그러니까…… 내게 기대.”
그녀의 목소리에는 타락 천사의 오만함 대신, 오직 유한만을 살리겠다는 맹목적인 집착과 소유욕이 서려 있었다. 루시엘라는 유한을 가볍게 안아 들고 성당 제단 아래 숨겨진 지하 통로를 향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
성당 외곽, 짙은 안개가 빠르게 걷혀가는 숲의 진입로.
백야단의 정찰조 기사 수십 명이 은빛 갑옷을 번쩍이며 나무 사이를 헤집고 있었다. 그들의 투구에는 마기를 감지하는 붉은 보석이 박혀 있어, 성당 방향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어둠의 기운을 쫓고 있었다.
“결계가 붕괴한 것이 확실하다! 이 앞의 이끼 낀 협곡 너머에 이단 성자의 은신처가 있다!”
정찰조의 대장이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그들이 협곡의 좁은 길목에 들어선 순간.
슝! 팟!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종탑 높은 곳에서 날아온 화살 한 발이 대장의 목덜미를 정확히 꿰뚫었다. 철갑의 틈새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파고든 화살이었다. 대장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저격이다! 종탑 위를 봐라!”
기사들이 혼란에 빠져 하늘을 올려다보는 찰나, 종탑의 난간 틈새로 로빈이 차가운 눈빛으로 강철 복합 활의 시위를 다시 당기고 있었다. 그의 손끝에서 신성과 마기가 미세하게 뒤섞인 화살이 장전되었다.
“이교도의 사냥개들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발을 들이느냐.”
로빈의 손가락이 튕겨 나갔다. 연이어 발사된 세 발의 화살이 허공에서 궤도를 미세하게 꺾으며, 후방에서 통신용 마법 수정을 가동하려던 마법 사제들의 손목을 정확히 관통했다. 수색대의 눈과 귀가 순식간에 차단되는 순간이었다.
“차라아앗!”
동시에, 좁은 협곡의 바위 그늘 속에서 검은 실루엣이 폭풍처럼 솟구쳤다. 칼스였다.
그의 제식 흑강 대검이 은빛 성경의 가호를 받아 마력 흔적을 감춘 채, 적들의 사각지대에서 수평으로 크게 그어졌다.
서걱! 콰아앙!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던 전위 기사 세 명의 갑옷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가며 피분수가 치솟았다. 묵직한 투기가 협곡 벽면을 강타하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탈영병 칼스! 네 이놈, 감히 신성 제국을 배신하고 이단의 앞잡이가 되었느냐!”
살아남은 기사들이 방패를 맞대며 방진을 짜려 했다. 칼스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검을 어깨에 걸쳤다.
“배신이라니. 나는 그저 위선자들의 가짜 빛에 눈이 멀었다가, 이제야 진짜 성자님을 만나 눈을 떴을 뿐이다. 내 칼날이 너희들의 그 가증스러운 투구를 쪼개줄 것이다.”
칼스는 대검을 내려치며 좁은 길목을 완벽하게 가로막았다. 적들의 숫자가 뒤편에서 계속해서 밀려들고 있었기에, 유한의 명령대로 무리하게 돌격하는 대신 협곡의 병목 지형을 활용해 철저히 방어 전술로 임했다. 적들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칼스는 대검의 넓은 면으로 공격을 받아내며 묵직한 참격으로 적들의 전열을 끊어놓았다.
***
황폐한 고대 성당 지하, 고대 정화 결계 핵이 위치한 제단 방.
사방의 석벽에 새겨진 고대 마법 문양들이 검붉은 독기에 오염되어 기괴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제단의 중심부에 박혀 있는 거대한 백색 마력 수정, 즉 고대 결계 수정의 표면에는 자객 섀도우V의 죽음과 함께 터진 독기가 거미줄처럼 엉겨 붙어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수정의 부식이 심각하군.”
유한은 루시엘라의 품에서 내려와 제단 앞으로 다가갔다. 어깨의 부식 상처가 혈맥을 타고 심장 근처까지 침투해 갈비뼈 부근의 살결이 검게 변해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속에서 불덩이가 굴러다니는 듯한 반동 고통이 몰아쳤다.
“유한, 더 이상 성력을 쓰면 네 영혼 핵이 먼저 붕괴해 버릴 거야. 내가 내 마력으로 저 수정을 정화할게.”
루시엘라가 다급하게 유한의 앞을 막아서며 손을 뻗으려 했다. 유한은 그녀의 손목을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붙잡았다.
“안 된다, 루시엘라. 네 마력은 순수한 어둠의 마기다. 이 수정은 고대 백색 교단의 정화 에너지를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어. 네 마력이 닿는 순간, 결계는 복구되는 것이 아니라 과부하로 대폭발을 일으켜 이 안개 숲 전체를 날려버릴 것이다.”
유한은 피 묻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품속에서 빛바랜 은빛 성경을 꺼내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오직 내 신성력과 네 마력이 성흔을 통해 완벽하게 조율된 ‘배덕의 성흔 1단계: 공명’ 에너지와 나의 피만이 이 수정을 임시로 복구할 수 있다.”
그는 성경을 펼치고 고대 정화 결계 복구술의 진언을 나지막이 읊조리기 시작했다.
“……빛이 어둠을 거부하지 않고, 어둠이 빛의 그림자가 되어 대지의 균열을 메우리라.”
웅웅웅!
유한의 영창과 함께 그의 가슴에 새겨진 백흑의 성흔 문양이 터질 듯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왼쪽 어깨의 독소가 성력의 방출에 반응하여 날뛰자, 유한의 전신 근육이 비명 지르듯 뒤틀렸다. 그의 입술 사이로 다시 한번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와 제단 위의 수정 표면을 적셨다.
“유한……!”
루시엘라는 눈물을 흘리며 유한의 등 뒤에서 그를 껴안았다. 그녀는 자신의 이마를 유한의 등덜미에 밀착시키고, 성흔의 연결고리를 통해 자신의 마력을 부드럽고 정밀하게 흘려보냈다.
그녀의 영혼 깊은 곳에서 오직 유한만을 구원하겠다는 맹목적인 애착과 집착이 솟구쳤다. 타락 천사 특유의 오만함은 온데간데없고, 반려를 잃을지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가 그녀의 마력을 극도로 정순하게 순화시켰다.
두 사람의 힘이 성흔을 매개로 융합되자, 백색의 신성과 칠흑의 마기가 나선형으로 뒤얽힌 초월적인 공명 에너지가 발현되었다. 유한의 피가 스며든 결계 수정의 갈라진 틈새로 백흑의 나선 광채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부식되어 가던 검은 독기들이 은빛 이슬로 정화되며 수정의 균열이 아주 미세하게 메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복구 속도는 더뎠고, 유한의 생명력 소모는 극심했다. 각혈이 멈추지 않았고 그의 어깨 상처는 더욱 검게 타들어 갔다.
동시에, 유한은 성경의 주파수를 가동하여 성당 외부로 방출되는 미세한 신성 파동을 일시적으로 왜곡했다. 적들의 탐지망에 혼란을 주기 위한 지략적인 기만이었다.
***
안개 숲 외곽, 백야단 본대의 중심부.
피칠갑된 붉은 이단 심문관 예복을 입은 그레고리가 거대한 말을 탄 채 숲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매서운 얼굴에 광기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정찰조로부터 연락이 끊겼군. 그리고 방금 전까지 감지되던 이단의 파동이 기묘하게 굴절되어 사라졌다.”
그레고리는 고문용 성력 가시 채찍을 만지작거리며 읊조렸다.
“쥐새끼 같은 지유한 놈, 성경의 힘으로 좌표를 숨기려 발악하는구나. 하지만 내 눈은 속이지 못한다.”
그는 뒤편에 대기하고 있던 수십 명의 광신도 사제들을 향해 채찍을 치켜들었다.
“모두 제단 진형을 짜라! 대규모 성력 탐지 마법진을 가동한다! 숲 전체의 마나 주파수를 강제로 고정하여, 놈의 은신처 좌표를 이 대지에 낙인찍어라!”
“오직 신의 심판을 위하여!”
사제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부정한 성력을 대지에 주입하기 시작했다. 거대하고 붉은 빛의 마법 문양들이 안개 숲의 바닥에 그려지며, 성당을 향해 붉은 탐지의 광선들이 촉수처럼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대지가 웅웅거리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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