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에 피어난 검은 불꽃
그림자 속에서 솟구친 섀도우V가 독이 묻은 단검을 휘두르며 유한의 목덜미를 향해 소리 없이 찔러 들어왔다.
찰나의 순간, 지유한의 두 눈에 깃든 ‘진실의 안광’이 기괴하게 비틀리는 붉은 살기의 궤적을 완벽히 포착했다. 자객의 움직임은 바람조차 일으키지 않을 만큼 은밀했으나, 안광의 시야 속에서는 붉은 연기를 뿜어내며 날아드는 불길한 화살표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머리로 인지하는 것과 육체가 반응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현재 유한의 육체는 성흔의 균열로 인한 내상과 피로로 인해 4성 사제급의 신성력만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6성 최정예 암살자의 전광석화 같은 기습을 완벽히 회피하기에는 신체적인 반응 속도가 미세하게 느렸다.
‘피할 수 없다면, 흘려보낸다!’
유한은 본능적으로 판단했다. 그는 억지로 몸을 비틀어 치명상인 목덜미를 피하는 동시에, 품속에서 ‘빛바랜 은빛 성경’을 꺼내 들어 단검의 궤도를 가로막았다.
깡!
은빛 성경의 표면에 깃든 고대 태양신의 미세한 결계가 단검의 끝을 튕겨내며 둔탁한 금속음을 흘렸다. 그러나 섀도우V는 기계처럼 정교한 살인 병기였다. 단검이 성경에 막히는 순간, 그는 손목의 각도를 기묘하게 꺾으며 칼날을 미끄러뜨렸다.
스으윽.
“윽……!”
차가운 감각과 함께 유한의 왼쪽 어깨가 깊게 베여 나갔다. 단순한 상처가 아니었다. 단검의 칼날에 도포되어 있던 사신의 맹독, ‘어둠의 부식 독약’이 상처 틈새로 침투하자마자 유한의 살점이 검붉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마치 끓는 쇳물을 어깨에 들이부은 듯한 극통이 전신을 세차게 뒤흔들었다.
치이이익!
상처 부위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유한의 하얀 사제복 소매가 순식간에 검게 부식되어 재가 되었다. 맹독은 유한의 혈맥을 타고 심장을 향해 무자비하게 뻗어 나갔다. 가슴팍에 새겨진 ‘배덕의 성흔’이 독기의 침입에 반응하여 찢어질 듯한 고통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유한의 입술 사이로 한 줌의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섀도우V의 가면 뒤에서 감정이 배제된 차가운 안광이 빛났다. 그는 유한이 독소로 인해 일시적으로 마비된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한번 단검을 치켜들어 유한의 심장을 향해 찔러 넣으려 했다.
바로 그 순간.
“감히…… 감히 누가 내 남자의 몸에 손을 대느냐!”
성당의 밤하늘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듯한, 분노로 가득 찬 여인의 포효가 우물가 전체에 울려 퍼졌다.
쿠구구구구!
압도적인 암흑의 마기가 폭풍처럼 몰아치며 성당 뒷마당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섀도우V의 단검이 유한의 가슴팍에 닿기 직전, 하늘에서 내려온 거대한 칠흑의 날개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콰아아앙!
단검이 단단한 타락 천사의 깃털 장벽에 부딪히며 거대한 스파크를 일으켰다. 섀도우V는 예상치 못한 엄청난 마력 반동에 밀려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섰다.
유한의 앞을 가로막고 선 존재는 제1마왕녀, 루시엘라였다.
그녀의 은발이 광포한 마력의 기류를 타고 사방으로 휘날렸고, 붉게 충혈된 두 눈동자는 살인적인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유한의 헌신적인 치유로 인해 날개의 신경이 완벽히 재건되고 5성 마왕급의 무력을 온전히 복원한 그녀는, 감히 자신의 구원자이자 유일한 반려인 유한을 상처 입힌 자객을 보며 이성을 잃었다.
“벌레 같은 제국의 사냥개 놈이…… 감히 내 성자님을 피 흘리게 만들어?”
루시엘라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으나, 그 안에 담긴 살기는 성당 정원의 잔디를 검게 얼려버릴 만큼 매서웠다. 그녀의 가슴에 새겨진 배덕의 성흔이 유한의 고통과 공명하며 붉고 검은 빛을 폭발적으로 뿜어냈다.
섀도우V는 본능적으로 눈앞의 마왕녀가 자신보다 상위의 존재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감정이 거세된 암살자에게 후퇴란 없었다. 그는 품속에서 그림자 마력을 짜내어 루시엘라의 발밑 대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림자 늪(Shadow Swamp).”
스우우우!
루시엘라의 발밑 대지가 순식간에 칠흑의 진흙탕처럼 변하며 그녀의 발목을 단단히 옭아맸다. 그림자 늪에서 뻗어 나온 수많은 검은 손들이 그녀의 다리를 타고 올라와 마력을 억제하려 들었다.
“하찮은 잔재주를!”
루시엘라는 코웃음을 쳤다. 그녀가 등 뒤의 거대한 칠흑 날개를 강하게 펄럭이자, 날개 깃털 사이에서 타락 천사 특유의 오만한 검은 불꽃이 폭풍처럼 뿜어져 나왔다.
화아아악!
검은 불꽃의 열기는 대지를 태우는 일반적인 화염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혼의 마력을 연료로 삼아 태워버리는 파멸의 불꽃이었다. 발목을 묶고 있던 그림자 늪과 검은 손들은 루시엘라의 불꽃이 닿자마자 단 1초도 버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흔적도 없이 소각되었다.
자신의 기술이 허망하게 깨지자, 섀도우V는 최후의 선택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사신 오르쿠스에게 제물로 바치는 금단 구절을 영창했다.
“……내 피와 영혼을 바치니, 사신의 장막이여 강림하라.”
자객의 몸이 기괴하게 부풀어 오르며, 그가 지니고 있던 어둠의 마력이 폭발했다. 그의 주변으로 수백 마리의 원혼들이 울부짖는 거대한 검은 구체 장벽, ‘원혼 장벽’이 형성되었다. 물리적, 신성적 공격을 모두 무효화하는 사신의 절대적인 방어막이었다.
루시엘라는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녀의 마검에 칠흑의 마기와 유한의 성흔에서 흘러나온 은빛 신성이 기묘하게 뒤섞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영혼이 성흔으로 묶여 있기에 가능한, 백과 흑이 교차하는 초월적인 공명 에너지였다.
“내 성자님을 다치게 한 대가는, 영혼의 소멸뿐이다.”
루시엘라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녀는 마검을 사선으로 강하게 내리치며 비전 검식을 시전했다.
“타락천사 검식: 천락(天落)!”
스콰아아앙!
성당의 밤하늘이 반으로 갈라지는 듯한 거대한 백흑의 나선 참격이 허공을 갈랐다. 참격의 궤적을 따라 검은 깃털들이 회오리치며 전방을 향해 쏟아졌다.
섀도우V가 영혼을 바쳐 세운 거대한 원혼 장벽은, 루시엘라의 천락 참격이 닿는 순간 비눗방울처럼 허망하게 찢겨 나갔다. 원혼들은 비명을 지를 시간조차 얻지 못한 채 백흑의 불꽃 속에서 하얗게 정화되어 소멸했다.
“……!!”
섀도우V의 가면 너머 눈동자에 처음으로 경악의 빛이 스쳤으나, 이미 늦어 있었다. 백흑의 참격은 그의 왜소한 신체를 정면으로 통과했다.
바스스스.
물리적인 타격음조차 없었다. 6성 최정예 암살자였던 섀도우V의 육체와 영혼은, 루시엘라의 단 한 번의 참격에 먼지 한 줌조차 남기지 않고 성당 정원에서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자객은 완벽하게 처단되었다.
“유한! 유한, 정신 차려!”
검을 거둔 루시엘라가 뒤를 돌아보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왼쪽 어깨를 부여잡은 채 거친 숨을 내쉬는 유한을 향해 달려갔다.
유한의 어깨 상처는 심각했다. 사신의 독기가 혈맥을 타고 퍼져나가며 그의 은발 끝자락이 미세하게 검게 변해가고 있었다. 극심한 고통에 유한의 이마에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이 바보 같은 인간…… 왜 피하지 않은 거야? 왜 나를 두고 네가 다치는 건데!”
루시엘라는 유한의 상처를 보며 미칠 듯한 집착과 소유욕, 그리고 깊은 슬픔이 뒤섞인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자신의 하얀 손으로 유한의 상처 부위를 감싸 쥐었다. 그녀의 체내에 흐르는 칠흑의 마력이 유한의 상처 속으로 스며들어 맹독의 확산을 필사적으로 억제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루시엘라. 녀석의 독약이 우물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으니…… 그걸로 됐다.”
유한은 고통 속에서도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따뜻한 손길에 루시엘라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감정적 동요를 느끼며 유한을 더욱 세차게 품에 안았다.
하지만 위기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섀도우V가 소멸한 자리에서, 그가 지니고 있던 사신의 독기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검붉은 독기의 해일이 성당 정원의 잔디와 나무들을 순식간에 부식시키며 지하를 향해 뻗어 나갔다.
지이이이잉!
성당 지하 깊은 곳에 박혀 있던 은신처의 핵심 보구, ‘고대 결계 수정’이 침투한 사신의 독기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었다. 수백 년간 성당을 외부의 탐지로부터 지켜주던 맑고 투명한 수정에 검붉은 독기가 엉겨 붙기 시작했다.
쩍! 쩌적!
성당 전체가 미세하게 흔들리며, 지하에서 불길한 균열음이 울려 퍼졌다. 고대 결계 수정의 표면에 거대한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성당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짙은 안개 장막이 급격하게 옅어지며, 성당의 백색 석조 외관이 안개 숲 외부를 향해 고스란히 노출되기 시작했다. 고대 정화 결계의 일시적 붕괴가 시작된 것이다.
따르르릉! 따르릉!
성당 종탑 위에서 보초를 서던 로빈의 다급한 비상 호각 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며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유한은 고통 속에서도 고개를 들어 안개 숲 외곽을 바라보았다.
결계가 걷힌 안개 숲의 어두운 경계선 너머로, 수백 개의 붉은 신성 횃불이 일제히 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횃불을 든 자들은 제국의 최정예 무력 집단, 인퀴지터 그레고리가 이끄는 성도 백야단 대군이었다.
“……위치가 노출되었군.”
유한의 청색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붉은 횃불의 대군이 성당의 위치를 확인하고, 무기를 치켜들며 숲속을 헤치고 성당을 향해 맹렬하게 진격을 시작하는 광경이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Chưa có bình luận nào. Hãy là người đầu tiê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