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문당한 성자, 심연의 무덤으로
허파를 찌르는 차가운 안개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올 때마다 비린 혈향이 섞여 나왔다.
지유한은 이를 악물고 젖은 흙바닥을 디뎠다. 한때 신성 제국 엘라시온의 모든 신도들이 우러러보며 찬송하던 백색의 사제복은 이미 진흙과 핏물로 얼룩진 누더기에 불과했다. 가슴팍, 심장 바로 위에는 아직도 검붉은 피가 배어 나오는 잔혹한 낙인이 새겨져 있었다.
제국 교단이 이단에게 내리는 영혼의 형벌, 파문 성흔이었다.
"유한아, 너는 우리 교단의 가장 완벽한 걸작이자, 주님을 모실 가장 고결한 그릇이란다."
머릿속에서 자애롭게 미소 짓던 양아버지, 대주교 마르쿠스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맴돌았다. 평생을 진짜 아버지라 믿고 따랐던 사내였다. 그 온화한 미소 뒤에 사신(邪神) 오르쿠스에게 자신의 육신을 제물로 바치려는 추악한 탐욕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유한에게 남은 것은 처절한 배신감과 무너져 내린 세계뿐이었다.
바스락.
안개 숲의 적막을 깨고 불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제국 이단 심문소의 최정예 추격대, 성도 백야단이 쏘아 올린 신성 탐지침(神聖 探知針)의 미세한 공명이 대기를 흔들고 있었다. 그들은 유한이 지닌 성자의 파장을 감지해 사방에서 포위망을 좁혀오는 중이었다.
'이대로 잡힐 수는 없다.'
유한은 단전 깊은 곳에서 본래 지니고 있던 5성의 성자급 신성력을 끌어올리려 했다. 그러나 빛의 마나가 심장 부근의 파문 성흔에 닿는 순간, 영혼의 핵이 찢어지는 듯한 극통이 전신을 강타했다.
"크흑...!"
유한은 나무 둥치를 붙잡으며 검붉은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시야가 붉게 번지며 다리가 풀렸다. 파문 의식 당시 입은 영혼의 상처가 너무 깊었다. 제국의 정통 신성력을 강제로 기동하려 할 때마다 체내의 마나가 역류해 스스로를 갉아먹는 치명적인 backlash(역반동)가 발생하고 있었다. 정면 돌파는 불가능했다. 적들은 유한이 평생 수련해 온 백색의 성력만을 쓸 것이라 단정하고 그 궤적을 쫓고 있었다.
유한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품속에서 낡고 빛바랜 은빛 성경을 꺼냈다.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온 유일한 유품이자, 제국의 감시망을 일시적으로 교란할 수 있는 특수한 성물이었다.
"...어둠이 빛을 삼키지 못하고, 길 잃은 영혼이 대지의 품에 누우리라."
성경 위에 손을 얹은 유한이 나지막이 영창을 읊조렸다. 은빛 성경에서 흘러나온 미세한 은백색 기류가 유한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그는 정통 신성 호흡법을 멈추고, 과거 은밀히 전수받았던 변칙적인 정화 호흡을 전개했다. 자신의 신성 파장을 낮고 부드러운 형태로 굴절시켜 안개 숲의 축축하고 부패한 자연 마나와 동조시키는 기술이었다.
웅웅웅.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던 신성 탐지침의 붉은 광선이 유한의 몸을 그대로 통과했다. 탐지 장치는 유한의 존재를 그저 숲속의 썩어가는 고목이나 이끼 낀 바위로 인식하고 지나쳐 버렸다. 멀리서 추격대원들의 거친 외침과 사냥개들의 짖는 소리가 엉뚱한 방향으로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지독한 인간 불신과 피로가 유한의 어깨를 짓눌렀지만, 그의 청색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갑고 맑게 빛나고 있었다.
'마르쿠스. 당신들이 세운 그 위선적인 성역을 내 손으로 직접 무너뜨리기 전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
유한은 다시 한 번 몸을 움직였다. 안개 숲의 가장 깊은 곳, 일반적인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험준한 산길을 헤치고 나아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짙은 마력 안개 너머로 기묘한 기운을 내뿜는 거대한 석조 건축물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이끼와 담쟁이덩굴로 뒤덮여 숲의 일부처럼 변해버린, 황폐한 고대 성당이었다.
성당 주변에는 제국의 신성 제단과는 다른 종류의, 아주 오래되고 순수한 고대 정화 결계가 희미하게 숨 쉬고 있었다. 유한이 성당의 경계선에 발을 들이는 순간, 시원한 물을 뒤집어쓴 듯 영혼의 상처가 미세하게 진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이라면 제국의 탐지망을 완벽히 차단하고 몸을 숨길 수 있을 터였다.
유한은 무거운 참나무 정문을 밀고 성당 예배당 내부로 들어섰다. 먼지 쌓인 석조 기둥들과 반쯤 깨진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고요함이 내려앉은 예배당은 상처 입은 망명객에게 유일한 안식처를 제공해 주는 듯했다.
그러나 유한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예배당 성단 뒤편으로 향했다. 바닥에 새겨진 십자가 문양의 석판을 발견한 그는 손끝에 미약한 성력을 실어 특정 순서대로 석판을 눌렀다.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지하로 내려가는 좁은 돌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계단을 내려가자 차갑고 음습한 공기가 피부를 스쳤다. 수백 년간 방치된 고대 성직자들의 공동 묘지, 지하 묘지 크립트였다.
유한은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는 낡은 사제 로브를 걸친 채 백골이 되어 안치된 한 유골이 있었다. 유한에게 진짜 신성의 본질이 정화와 치유에 있음을 남몰래 가르쳐 주었던 옛 스승이자 전직 심문관, 늙은 사제 요한의 유골이었다.
유골의 가슴팍에는 작은 금속 함이 놓여 있었다. 유한이 함을 열자, 그 안에는 낡은 가죽 표지의 서책이 보관되어 있었다. 요한 사제가 생전에 목숨을 걸고 기록했던 비밀 일지였다.
서책을 펼치자, 요한 사제의 떨리는 필체로 적힌 충격적인 진실들이 유한의 눈동자에 새겨졌다.
[제국이 섬기는 절대적인 빛의 신은 가짜다. 그것은 신도들의 순수한 신앙심과 영혼을 빨아먹으며 부활을 꿈꾸는 고대 사신(邪神) 오르쿠스에 불과하다. 제국의 건국 황제와 초대 성녀는 사실 마족과 이종족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 사신을 봉인했으나,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역사에서 그들의 공헌을 지우고 절대 악으로 왜곡했다...]
일지 장을 넘길 때마다 유한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제국이 자행해 온 마족 학살과 이종족 정화 작전은 신성한 의무가 아니었다. 그저 사신 오르쿠스에게 바칠 신선한 영혼의 제물을 수급하기 위한 잔혹한 도살극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이 거짓이었군."
유한은 허탈한 실소를 터뜨렸다. 자신이 성자로서 행해왔던 모든 기도와 축복이 결국 사신을 살찌우는 영양분이 되었다는 사실에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을 참을 수 없었다. 동시에,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차가운 분노와 복수심이 송곳처럼 솟구쳤다.
그는 더 이상 제국의 꼭두각시 성자가 아니었다. 위선으로 가득 찬 제국의 교단을 안에서부터 붕괴시키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진짜 구원을 이룩하리라.
유한은 요한 사제의 비밀 일지를 가슴속에 소중히 품었다. 이 버려진 고대 성당을 복수의 거점으로 삼아, 힘을 기르고 제국의 목줄을 죄어갈 준비를 시작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궁!
지하 묘지 전체가 무너질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성당 지하 깊은 공동에서부터 정체불명의 강력한 마력 폭풍이 휘몰아치며 대기를 찢어발겼다.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공간의 경계가 뒤틀리며 뿜어 나오는 압도적인 혼돈의 마기였다.
콰아아아앙!
뒤이어 예배당 천장을 뚫고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추락했다. 굉음과 함께 뿜어져 나온 붉은 충격파가 지하 묘지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유한은 반사적으로 은빛 성경을 가동해 신성 방어막을 펼치며 계단을 타고 예배당 위로 급히 뛰어 올라갔다.
예배당 중앙 제단은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고, 무너진 천장 틈새로 불타는 붉은 유성의 잔해가 연기를 뿜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너진 돌더미 한가운데, 칠흑처럼 어두운 날개 한쪽이 참혹하게 꺾인 채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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