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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의 약속, 촛불 아래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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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옹기 저장고의 공기는 서늘하고 축축했다. 흙냄새와 오래된 벽돌의 그을음 냄새가 섞인 어둠 속에서, 단 한 자루의 양초만이 가냘프게 흔들리며 붉은 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외부의 모든 소음이 완벽히 차단된 이 밀실의 침묵은 숨이 막힐 정도로 밀도가 높았다.


저장고의 무거운 나무 문 너머, 어두운 대나무 숲길 어귀에는 대학생 인턴 김민우가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 황두식이 보낸 용역들이나 서진우의 감시자들이 언제 백산요를 습격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 민우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숨을 죽이고 있었고, 지하의 두 사람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걸작을 빚어내기 위해 스스로를 어둠 속에 봉인했다.


안수민의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퇴부부터 발끝까지 차갑게 죽어 있는 신체는 50kg에 달하는 거대한 백토 점토가 물레 위에서 회전할 때 발생하는 원심력을 자력으로 버텨낼 수 없었다. 물레 위의 흙이 회전하기 시작하면, 그 저항력은 고스란히 수민의 가냘픈 척추와 어깨로 쏟아져 내릴 터였다.


수민은 새로 개조된 카본 보강형 휠체어에 깊숙이 앉아 가죽 벨트로 자신의 가슴을 등받이에 단단히 고정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거대한 진흙 기둥의 중심을 잡기 위해선 휠체어의 금속 프레임 너머로 그녀의 몸을 받쳐줄 더 단단한 물리적 지지대가 필요했다.


“시작해요, 강준 씨.”


수민의 낮고 떨리는 목소리에, 등 뒤의 어둠 속에 서 있던 최강준이 천천히 다가왔다. 강준에게는 손가락이 없었다. 사고로 잃어버린 두 손은 차가운 유압식 전자의수로 대체되어 있었고, 정밀한 감각을 잃어버린 그 금속 의수는 미세한 진흙의 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수민의 다리가 되어줄 단단한 허벅지와, 그녀의 등이 되어줄 넓은 어깨가 있었다.


강준은 수민의 휠체어 등받이 바로 뒤로 밀착해 섰다. 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휠체어 프레임을 양옆에서 조였고, 양손이 없는 그의 잔존하는 두 팔이 수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넓은 가슴이 수민의 가냘픈 등을 빈틈없이 밀착해 받쳐주는 순간, 차가운 지하 저장고의 공기 속으로 두 사람의 체온이 얽히며 팽팽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내 몸에 체중을 실어, 수민아. 내가 당신의 뼈가 될 테니까.”


강준의 묵직한 숨결이 수민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수민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의 심장박동을 자신의 맥박 삼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두 사람은 이미 서로의 호흡 소리만으로 물레의 속도를 조율하는 ‘수동 물레 회전 속도 미세 조절 프로토콜’을 가동하고 있었다. 강준이 어깨 근육의 미세한 신호로 수동 물레 하부의 거대한 나무 원판에 발을 얹어 회전 속도를 제어하기 시작했다. 슥, 슥, 하는 아날로그적인 마찰음과 함께 물레가 부드럽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수민은 두 손으로 물레 위에 얹힌 거대한 백토 더미를 움켜쥐었다. 백사천 상류에서 채취해 지하 숙성고에서 1년 동안 세 번 걸러낸 천연 고령토는 실크처럼 매끄러우면서도 차갑고 묵직했다. 수민은 눈을 감았다. 그녀의 초감각적인 손끝이 점토 내부의 미세한 수분량과 기포를 감지해 냈다.


물레의 회전력이 빨라질수록, 50kg의 진흙 덩어리가 수민의 양손을 사정없이 밖으로 밀어내려 했다. 수민의 척추가 비틀거리며 왼쪽으로 쏠리려는 찰나, 강준이 자신의 온몸으로 그녀의 몸통을 단단히 고정하며 무게중심을 중앙으로 잡아주었다. 두 사람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맞물려 거대한 흙 기둥을 물레 중앙으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기는 이내 찾아왔다. 물레의 회전을 유지하기 위해 상체 근육을 과도하게 긴장시키던 수민의 어깨에 극심한 만성 신경통 발작이 찾아온 것이다. 척추를 타고 내려가는 타는 듯한 통증이 뇌 신경을 사정없이 찔렀다. 수민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고, 물레 위의 진흙 기둥이 한쪽으로 크게 주저앉으려 흔들렸다.


“안 돼...!”


수민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흙이 무너지면 지난 몇 달간의 노력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갈 터였다. 강준은 수민의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고 즉각 자신의 넓은 가슴으로 그녀의 등을 더 강하게 밀착해 받쳤다.


“수민아, 내 숨소리를 들어.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어. 통증을 보지 마. 가마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만 생각해.”


강준은 그녀의 귀에 대고 천천히 호흡을 유도했다. 수민은 이를 악물고 ‘만성 하지 신경통 극복 몰입’ 기술을 발동했다. 뇌의 통증 인지 경로를 차단하듯, 온 신경을 오직 물레 위의 진흙과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강준의 뜨거운 체온에만 집중했다. 기적적으로 그녀의 손끝이 다시 안정을 찾았다.


수민은 작업대 위에 놓인 100년 된 대추나무 조각 칼을 쥐었다. 물레가 도는 일정한 박자에 맞춰, 그녀는 칼끝의 미세한 진동만을 이용해 도자 표면에 보이지 않는 정밀한 소용돌이 문양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유약을 발라 구웠을 때 빛의 굴절에 따라 은은하게 살아날 무지개 문양이었다. ‘전통 대추나무 칼날 미세 문양 각인’ 기술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며 우아한 백자의 곡선이 완성되어 갔다.


이제 강준의 차례였다. 강준은 자신의 전자의수 끝에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에서 주문 제작했던 극도로 날카로운 스테인리스 스틸 세조각 나이프를 단단히 고정했다. 그는 수민의 어깨너머로 몸을 더 깊숙이 밀착했다. 그의 숨결이 수민의 뺨에 닿았고, 두 사람의 살결이 스치며 좁은 저장고 안의 온도가 급격히 상승했다.


강준은 눈을 빛내며 ‘해부학적 골격 입체 투영’ 능력을 발휘했다. 수민이 빚어낸 둥근 백자 표면 위에, 남녀가 서로의 깨진 손을 움켜잡으려는 처절하고 아름다운 인체의 구조가 3차원 도면처럼 그려졌다. 강준이 나이프를 점토 표면에 가져가 조각을 시작하려던 순간, 전자의수의 미세 유압 벨브에서 붉은 경고등이 깜빡이며 유압 액이 누출되는 오작동이 발생했다. 칼끝이 빗나가 도자기 외벽을 찢어발기려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강준 씨, 내 손을 믿어요.”


수민이 자신의 떨리는 오른손을 뻗어 강준의 차가운 금속 의수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수민의 따뜻한 손끝 감각이 강준의 기계 팔에 전해지며 흔들리던 궤도가 기적적으로 수정되었다. 강준은 입술을 깨물며 어깨 근육의 힘만으로 나이프를 지탱했고, 수민의 손에 이끌려 점토 표면에 남녀의 얽힌 손가락 근육과 뼈대의 결을 정교하게 양각해 나갔.


차가운 금속과 따뜻한 살결, 거친 철의 비례와 부드러운 흙의 곡선이 소리 없이 융합되며 최초의 공동 걸작 ‘무언의 고백’의 성형이 마침내 완성되었다. 양초의 불빛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흔들리는 순간, 두 사람의 거친 호흡만이 지하 저장고의 침묵을 채웠다.


땀방울이 두 사람의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끝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강준의 뜨거운 이마가 수민의 젖은 뺨에 닿았다. 극도의 긴장감과 신체적 고통을 이겨낸 뒤 찾아온 관능적인 해방감 속에서, 강준은 소매 끝을 움직여 수민의 떨리는 손가락 끝을 자신의 입술로 조용히 가져갔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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