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바닥이 기억하는 무게
백산요의 아침은 차가운 안개와 함께 시작되었다. 허물어진 황토 담장 사이로 스며드는 이천의 새벽바람은 유난히 시렸지만, 작업실 내부는 이영순 아주머니가 피워둔 작은 난로 덕분에 겨우 온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갈한 앞치마를 두른 영순 아주머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리차 두 잔과 소박한 시골 밥상을 내려놓으며, 물레 앞에 앉아 있는 수민과 멍하니 벽을 응시하고 있는 강준을 번갈아 살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너무 무거워, 영순 아주머니는 조용히 한숨을 쉬며 안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 등록은 마쳤어요. 이제 정식으로 내 어시스턴트예요, 최강준 씨."
수민이 먼저 침묵을 깨며 낡은 휠체어 바퀴를 굴려 물레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의 하반신은 붉은색 체크무늬 담요로 덮여 있었지만, 상체만큼은 꼿꼿했다. 수민은 작업대 위에 놓인 100년 된 대추나무 조각 칼을 손끝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가문의 신물이자, 그녀가 세상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
강준은 대답 대신 자신의 양손 소매 아래 숨겨진 의수를 내려다보았다. 독일제 최첨단 유압식 전자의수.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물건이었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그저 차가운 쇳덩어리에 불과했다. 어젯밤 안수호와 몸싸움을 벌이느라 서보모터가 과열되어 유압 밸브가 굳어버린 탓에, 손가락 끝의 미세한 제어가 전혀 되지 않았다. 삐걱거리는 금속음만이 작업실의 고요를 깨뜨릴 뿐이었다.
"도와주겠다고 한 약속, 기억하죠? 당장 오늘부터 점토 반죽을 해야 해요."
수민의 말에 강준이 차가운 실소를 터뜨렸다. "손가락 하나 내 의지대로 쥐지 못하는 병신한테 반죽을 시키겠다고? 흙이 아니라 내 자존심을 짓이기고 싶은 모양이군."
"난 최강준 씨의 자존심에는 관심 없어요. 백산요를 지키기 위해선 당장 지원금이 필요하고, 그러려면 당신이 어시스턴트로서 밥값을 해야 해요. 흙을 치대서 기포를 빼내지 않으면 물레 위에서 대접 하나도 빚을 수 없으니까요."
수민은 단호했다. 동정심 따위는 배제한 철저한 비즈니스적 태도. 그것이 오히려 강준의 뒤틀린 가슴에 기묘한 승부욕을 자극했다. 강준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작업대 위에 놓인 20kg짜리 고령토 덩어리 앞으로 다가갔다.
"시작하지."
강준이 의수 끝의 서보모터를 강제로 가동했다. 징 하는 기계음과 함께 금속 손가락이 점토 더미를 움켜쥐려 했다. 하지만 미세한 촉각 피드백이 없는 기계 손은 점토의 저항력을 계산하지 못했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점토 덩어리가 비대칭적으로 짓눌리며 사방으로 뭉개졌다. 흙 속에 갇혀 있던 공기 방울이 터지는 대신, 점토의 밀도가 완전히 깨져버렸다.
"그렇게 쥐어짜면 안 돼요! 흙을 안쪽으로 밀어 넣으면서 회전시켜야 기포가 빠져나가요!"
수민이 다급히 소리쳤지만, 강준의 의수는 제멋대로 움직였다. 다시 한번 힘을 주자 이번에는 서보모터가 과열 경고음을 울리며 고정되어 버렸다. 손가락이 굳어버린 강준은 흙 묻은 기계 손을 허공에 둔 채 허탈하게 서 있었다. 천재 조각가라 불리던 사내가 흙덩이 하나 통제하지 못하는 비참한 현실이 작업실 바닥에 적나라하게 폭로되었다.
수민 역시 마음이 급했다. 보류된 지원금을 살리기 위해선 당장 이번 주 안으로 초급 물레사 수준의 결과물이라도 내놓아야 했다. 그녀는 직접 수민의 낡은 나무 수동 물레 앞에 자리를 잡았다. 다리가 마비된 그녀는 발판을 밟아 물레를 돌릴 수 없었기에, 상체를 가죽 벨트로 휠체어 등받이에 단단히 고정했다. 그리고 왼손으로 물레 하부의 나무 원판을 힘껏 돌려 회전 관성을 얻은 뒤, 오른손으로 흙의 중심을 잡으려 했다.
"으윽..."
하지만 수동 물레의 회전력을 상체 근육만으로 버텨내는 것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어깨 관절과 척추 신경에 가해지는 과도한 하중 때문에,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중심이 어긋난 점토가 비틀거리며 물레 위에서 주저앉아 버렸다. 어깨 인대를 찌르는 극심한 통증에 수민은 신음하며 물레 위로 쓰러졌다. 붕대 틈새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거봐, 너나 나나 이 부러진 몸뚱이로 뭘 하겠다는 거야!" 강준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다리도 쓰지 못하는 도예가와 손도 없는 조각가가 만나서 걸작을 빚겠다고? 세상 사람들이 비웃는 이유가 바로 이거야! 우리는 그냥 깨진 그릇 조각일 뿐이라고!"
강준은 화를 참지 못하고 발길질을 해 작업실 바닥의 진흙 더미를 내팽개쳤다. 철퍽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진흙이 사방으로 튀었다. 수민은 진흙이 묻은 뺨을 닦아내지도 않은 채, 매서운 눈빛으로 강준을 쏘아보았다.
"깨진 조각이면 어때요? 깨진 조각이라도 서로 맞춰보면 물이라도 담을 수 있잖아요! 난 여기서 멈추지 않아요. 내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난 내 팔을 깎아서라도 물레를 돌릴 거예요. 최강준 씨, 당신은 손이 없다고 영혼까지 버린 거예요?"
수민의 처절한 일갈이 강준의 심장에 비수처럼 꽂혔다. 강준은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흩어진 진흙과 자신의 부러진 의수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터질 듯한 이명과 함께, 아주 오래전 강원도 삼척 탄광 지대의 기억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진폐증으로 기침을 토하면서도, 두꺼운 면장갑을 끼고 아들을 안아주던 아버지 최기철. 아버지는 탄광에서 캐낸 거친 흙 속에 섞인 석탄 원석을 골라내기 위해, 언제나 맨발로 진흙을 밟아댔다. 손의 힘보다 전신의 체중을 실어 진흙을 디딜 때, 흙 속의 이물질과 기포가 가장 정직하게 밀려나온다던 아버지의 거친 목소리.
'강준아, 조각은 손으로만 하는 게 아니다. 온몸의 무게를 실어 흙과 대화하는 거다.'
강준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달라졌다. 야성적인 예술가의 본능이 그의 척추를 타고 번뜩였다. 강준은 벨트를 풀고 양팔의 전자의수를 거칠게 벗어던졌다. 툭, 투둑 하며 무거운 의수들이 작업실 널빤지 바닥 위로 나뒹굴었다. 양손 소매가 허공에 쓸쓸하게 덜렁거렸지만,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패배자의 나약함이 없었다.
강준은 젖은 진흙이 가득 깔린 거적 매트 위로 맨발로 걸어 나갔다. 차가운 흙의 감촉이 그의 발바닥 전체를 타고 뇌 신경으로 짜릿하게 흘러 들어왔다. 손가락을 잃은 대신, 그의 발바닥 촉각 신경은 상상 이상으로 예민하게 발달해 있었다. 흙의 미세한 모래알과 습도가 발바닥 피부를 통해 실시간 데이터처럼 읽혔다.
강준은 벽에 어깨를 기댄 채, 단단한 허벅지와 발바닥 전체로 점토 더미를 힘껏 밟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아버지에게 배웠던 '탄광 노동자식 점토 거친 반죽법'이자, 온몸의 무게를 활용하는 '전신 체중 진흙 디딤 기법'이었다.
철퍽. 쿵. 철퍽. 쿵.
강준의 탄탄한 하체 근육이 역동적으로 요동쳤다. 그의 넓은 어깨와 등이 벽을 지탱하며, 80kg에 달하는 체중이 발바닥을 통해 점토의 심장부로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손으로 치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압력이 점토를 압착했다.
"탁! 탁! 타닥!"
점토 내부에 갇혀 있던 미세한 공기 방울들이 강준의 발바닥 아래에서 비명을 지르며 터져 나갔다. 손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압도적인 찰기와 고밀도의 점력이 점토 더미 속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강준은 눈을 감았다. 발바닥 끝에 닿는 흙의 저항력이 균일해지는 순간을 온몸의 감각으로 느끼며, 그는 자신이 여전히 살아있는 창조자임을 온몸으로 자각했다.
수민은 휠체어 위에서 그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것은 서울의 세련된 갤러리에서 보던 가식적인 예술이 아니었다. 날것의 육체와 대지가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가장 원초적이고 장엄한 창작의 의식이었다. 강준의 거친 움직임 속에서, 수민은 물레 위의 정적인 비례를 뛰어넘는 거대한 야성적 영감을 수혈받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강준은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발바닥으로 완벽하게 다듬어진 우윳빛의 찰기 넘치는 점토 덩어리를 자신의 잔존하는 양팔 뼈와 가슴으로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흙의 묵직한 무게감이 그의 가슴뼈를 통해 심장으로 전달되었다.
스윽.
강준은 흙 묻은 몸으로 수민의 수동 물레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발바닥으로 정성껏 디뎌 기포를 완벽히 제거한, 온기가 감도는 진흙 더미를 수민의 낡은 나무 물레 원판 위에 툭 얹어 놓았다.
차가운 불신과 장애의 상처로 얼룩져 있던 두 사람의 거리 사이로, 밟혀서 단단해진 흙의 따뜻한 온기가 서서히 채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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