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도장과 붉은 낙인
안수호의 비명 섞인 협박 전화가 끊긴 후, 백산요의 밤은 질식할 것 같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수민은 떨리는 손으로 폴더폰을 닫았다. 귓가에는 여전히 오빠의 절박한 목소리와 그 너머로 들려오던 사채업자 마광태의 서늘한 웃음소리가 이명처럼 맴돌았다.
"도장 안 내놓으면 가마고 너고 싹 다 짓밟아 버린대!"
수민은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휠체어 바퀴를 움켜쥐었다. 낮에 안수호가 난장판으로 만들고 간 작업실의 흙먼지가 코끝을 찔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허벅지 아래를 더듬었다. 붉은색 체크무늬 담요 깊숙한 곳, 낡은 카본 시트의 틈새에 숨겨둔 아버지가 평생 지켜온 진짜 인감도장의 단단한 감각이 손끝에 닿았다. 백산요의 소유권을 증명할 최후의 보루. 이것만큼은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빼앗길 수 없었다.
수민은 서둘러 휠체어를 밀어 안채로 향했다. 문턱이 없는 경사로를 따라 바퀴가 굴러갈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버지는 진폐증 약 기운에 취해 안방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거친 숨소리만이 고요한 한옥 안채를 채우고 있었다.
‘내가 지켜야 해. 아버지가 평생을 바친 이 가마터를 오빠의 도박 빚 따위로 날려버릴 수는 없어.’
수민은 안방 문을 조용히 닫고 거실 한구석에 휠체어를 세운 채 불을 껐다. 어둠이 밀려오자 사소한 소리조차 극대화되었다. 마당 너머 사랑채에는 은사님이 데려온 사내, 최강준이 머물고 있을 터였다. 양손을 잃고 괴물이 되어버린 천재 조각가. 첫 만남에서 자신을 향해 ‘애처로운 서커스단’이라 조롱하던 그의 차가운 눈빛이 떠올라 수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역시 자신만큼이나 깊은 나락에 빠진 존재였지만, 지금 당장 닥쳐온 위기 앞에서는 그를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스산한 밤바람이 백산요 뒤편 대나무 숲을 흔들며 서글픈 소리를 냈다. 그리고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안채 뒷마당으로 통하는 유리창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스윽, 스윽.
발소리를 죽이려 애쓰는 기척이 들렸다. 수민은 숨을 멈추고 어둠 속에서 소리가 나는 쪽을 주시했다. 미세하게 열린 미닫이문 틈새로 들어온 것은 마광태의 부하들이 아니었다. 낯익은 체구, 구겨진 명품 셔츠의 실루엣. 안수호였다.
수호는 사채업자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도장을 훔쳐 달아날 생각이었는지, 미친 듯이 거실 서랍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서류를 헤집으며 나지막이 욕설을 뱉는 오빠의 모습에 수민은 차가운 환멸을 느꼈다.
수민은 바퀴 소리를 죽이며 수호의 등 뒤로 다가갔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여기서 무슨 짓이야, 오빠."
"으악!"
수호가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휠체어에 앉아 자신을 서늘하게 내려다보는 동생의 눈빛을 마주한 수호는 이내 비열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 깜짝이야... 야, 너 인기척도 없이 뭐 하는 거야? 잘됐네. 아버지 진짜 도장 어디 있어? 빨리 내놔! 마광태가 지금 공방 입구까지 와 있어! 나 진짜 죽는다고!"
수호가 수민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댔다. 수민은 손바닥의 찰과상 통증을 참으며 수호의 손목을 꽉 쥐었다. 대추나무 조각 칼을 쥘 때처럼 단단한 아귀힘이었다.
"없어. 설령 있어도 오빠한테는 절대 안 줘. 당장 나가."
"이 고집불통 년이 진짜!"
수호의 눈에 광기가 서렸다. 더 이상 설득할 시간도, 이성도 남아있지 않은 듯했다. 수호는 거칠게 수민의 손을 뿌리치고 그녀의 어깨를 밀쳤다. 하반신의 지지력이 없는 수민의 몸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무력하게 흔들렸다.
쿵!
"아앗!"
수민이 휠체어에서 완전히 이탈해 차가운 안채 마당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무릎과 손목이 거친 시멘트 바닥에 긁히며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다리에는 아무런 감각이 없었지만, 낙상의 충격으로 척추를 타고 올라온 극심한 통증이 상체를 마비시킬 듯 덮쳐왔다. 수민은 바닥에 쓰러진 채 다리를 움직이려 애썼지만, 끝내 힘이 들어가지 않아 버둥거릴 뿐이었다. 비참함과 굴욕감이 눈물이 되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거 봐, 다리도 못 쓰는 주제에 뭘 지키겠다고 지랄이야!"
수호는 바닥에 누워 신음하는 수민을 내려다보며 가방에서 서류 한 장과 붉은 인주를 꺼냈다. 마광태가 작성한 '백산요 부지 강제 양도 계약서'였다.
"진짜 도장이 없으면 지장이라도 찍어! 이거 하나면 나도 살고 너도 사는 거야!"
수호가 수민의 오른손을 강제로 잡아끌어 붉은 인주에 짓눌렀다. 끈적하고 붉은 액체가 수민의 엄지손가락을 물들였다. 수민은 온 힘을 다해 손을 빼려 버텼지만, 신체적 우위를 점한 수호의 아귀힘을 이겨낼 수 없었다. 계약서의 날인 란으로 그녀의 붉은 손가락이 서서히 내려앉으려던 그 찰나.
쾅!
안채의 나무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거대한 그림자가 안으로 들이닥쳤다.
최강준이었다.
그는 양손 소매를 길게 늘어뜨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사랑채에서 밤마다 손가락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환상통에 신음하던 그는 수민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듣고 달려온 것이었다. 그의 눈빛은 이성을 잃은 야수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무슨 짓거리야, 이 쓰레기 새끼가."
"뭐야? 웬 병신이... 악!"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준이 그대로 돌진했다. 그는 양손이 없는 상태였기에, 자신의 잔존 신체 능력을 냉철하게 계산해 몸 자체를 무기로 삼았다. 탄탄한 허벅지와 넓은 어깨뼈의 단단함을 이용해, 체중을 실어 수호의 가슴을 그대로들이받았다.
퍽!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안수호의 몸이 거실 벽으로 사정없이 날아가 부딪혔다. 수호는 벽을 등지고 바닥으로 고꾸라지며 단숨에 숨을 들이켰다. 강준은 쓰러진 수민의 앞을 가로막아 서며, 차가운 의수 끝을 소매 아래로 언뜻 드러냈다. 비록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는 기계였지만, 그의 거대한 체구와 살기등등한 기세는 수호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수호는 가슴을 움켜쥐며 간신히 일어났다. 그는 강준의 마비된 의수와 바닥에 쓰러진 수민을 번갈아 보며 비열하게 침을 뱉었다.
"하! 병신들끼리 아주 풍년이네. 다리 병신에 손 없는 병신까지... 아주 잘들 논다!"
수호는 강준의 매서운 눈빛에 겁을 먹고는, 바닥에 떨어진 서류 가방에서 삐져나온 몇 가지 불법 채무 문서들만 급히 챙겨 안채 밖 어둠 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의 다급한 발소리가 백산요 마당 너머로 사라졌다.
정적이 찾아온 안채 거실. 수민은 바닥에 쓰러진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무릎의 찰과상에서 흘러내린 피가 붉은 인주 자국과 뒤섞여 바닥을 물들이고 있었다. 진짜 인감도장은 지켜냈지만, 혈육에게 당한 모멸감과 신체적 취약성의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강준은 도망친 수호를 쫓아가는 대신, 천천히 몸을 돌려 수민을 내려다보았다. 수호를 밀쳐낼 때 어깨 근육에 가해진 과도한 하중 때문에, 그의 잔존 신경계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 손가락 마디마디가 칼로 베이는 듯한 극심한 환상통이 다시금 그를 덮쳐와, 그의 넓은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때, 수민의 눈길이 바닥 한구석으로 향했다. 안수호가 다급하게 도망치며 떨어뜨린 서류 가방의 열린 틈새로, 무언가 굴러 나와 멈춰 서 있었다.
그것은 마광태가 작성한 백산요 부지 강제 양도 계약서 초안, 그리고 안수호가 사설 도장방에서 몰래 파온 '위조된 백산요 인감도장'이었다. 붉은 인주가 묻은 가짜 도장이 바닥 위에서 쓸쓸하게 회전하며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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