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장 풀린 과거의 사슬
서울 삼청동 대안 예술 공간 ‘인디고’를 덮쳤던 대필 사기 의혹의 폭풍은 백산요의 고요한 앞마당까지 시커먼 먹구름을 몰고 왔다. 여론의 독설과 거래처들의 일방적인 계약 파기 통보를 뒤로하고 이천으로 돌아온 날 밤, 백산요를 감싼 대나무 숲은 유난히도 서글픈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안수민은 안채 작업실의 불을 끈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비된 다리를 감싼 붉은 체크무늬 담요 위로 떨어지는 달빛이 차갑기 그지없었다. 낮에 보았던 자극적인 기사들과 오빠 안수호의 배신, 그리고 백산요를 향해 뻗쳐오는 서진우 관장의 비열한 손길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어깨 인대의 만성 통증이 욱신거리며 골반을 타고 내려가 하지 신경을 자극했지만, 수민은 진통제를 찾는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보다 더 깊은 심연에 빠져있을 사랑채의 최강준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마당 한구석, 강준이 임시 거처로 사용하고 있는 사랑채의 창문 틈새로 미세한 손전등 불빛이 새어 나왔다. 야간 순찰을 도는 방범대의 오토바이 소리도 이미 끊긴 시각이었다. 강준은 의수가 없어 밤중에는 불을 켜고 홀로 움직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수민의 척추를 타고 스쳤다.
수민은 조용히 카본 보강형 휠체어의 바퀴를 굴렸다. 소음을 줄이기 위해 새로 피팅한 고무 림이 밤이슬이 내려앉은 마당의 흙바닥을 매끄럽게 굴러갔다. 사랑채의 낡은 창살 틈새로 안을 들여다본 순간, 수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사랑채 방 한가운데, 며칠 전 백산요에 자원봉사를 자처하며 들어온 단정한 단발머리의 여대생, 아니 문화부 기자 한혜원이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대학생의 전공 서적이 아닌 고성능 DSLR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한혜원은 책상 위에 펼쳐진 강준의 분실된 조각 드로잉 북 복사본을 한 페이지씩 정밀하게 촬영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강준이 수민의 안전을 위해 설계해 둔 특수 휠체어의 인체공학적 도면까지 늘어놓은 상태였다.
‘한혜원 기자…….’
수민은 그녀의 진짜 정체를 깨닫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단순한 도예과 자원봉사자인 줄 알았던 그녀가 실은 최강준의 생존설과 대필 의혹의 결정적 물증을 잡기 위해 침투한 스파이였던 것이다. 여기서 저 사진들이 기사화된다면, 서진우가 짜놓은 ‘장애를 이용한 대필 사기극’ 프레임은 완성되고 백산요는 영원히 문을 닫아야 했다.
수민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사랑채의 미닫이문을 거칠게 밀어젖혔다. 동시에 휠체어 전면에 장착된 고휘도 LED 전등을 켰다. 눈을 찌르는 백색 광선이 어두운 사랑채 내부를 대낮처럼 비추며 한혜원의 얼굴을 정면으로 강타했다.
“거기까지 해요, 한혜원 기자님.”
갑작스러운 광선과 목소리에 한혜원이 비명을 지르며 카메라를 품에 안았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에 당혹감과 경계심이 스쳤지만, 이내 기자 특유의 냉정함을 되찾으며 수민을 쏘아보았다.
“안수민 씨…… 언제부터 알고 있었죠?”
“자원봉사자라면서 흙 만지는 손끝에 굳은살 하나 없는 것부터 이상했어요. 목적이 뭐죠? 우리를 사기꾼으로 만들어 기사 한 줄 더 쓰는 건가요?”
수민은 휠체어 바퀴를 밀어 좁은 사랑채 문틀을 완전히 가로막았다. 한혜원은 침을 꿀꺽 삼키며 카메라의 메모리 카드를 움켜쥐었다.
“이건 단순한 특종이 아니에요. 사고로 양손을 잃은 천재 조각가 최강준이 살아있고, 무명 도예가의 대필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는 건 대중이 알아야 할 진실이에요. 비켜주세요, 수민 씨. 전 기사를 써야 합니다.”
한혜원이 카메라 백팩을 메고 문을 향해 거칠게 걸어 나왔다. 수민은 이를 악물고 휠체어의 브레이크 레버를 당기려 했으나, 극심한 긴장으로 인해 손가락 끝의 감각이 둔해져 레버를 놓치고 말았다. 휠체어 바퀴가 미끄러지며 수민의 상체가 앞으로 크게 기울었다.
“아앗!”
쿵 하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수민의 몸이 휠체어에서 이탈하여 차가운 사랑채 바닥으로 사정없이 굴러떨어졌다. 하반신의 감각이 없는 무거운 다리가 꺾이며 바닥에 부딪혔고, 그 충격으로 척추 마비 부위에서 타는 듯한 하지 만성 신경통 발작이 다시금 뇌를 관통했다. 눈앞이 하얗게 흐려지는 고통 속에서도 수민은 도망치려는 한혜원의 바짓가랑이를 두 손으로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가지 마요…… 제발, 기사를 쓰지 말아 주세요.”
바닥에 엎드린 채 흙먼지를 뒤집어쓴 수민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평생 타인의 동정을 거부하며 고고하게 살아온 도예가 안수민이, 기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고 있었다. 자신의 파멸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오직 등 뒤의 어둠 속에 서 있는 한 남자를 지키기 위한 처절한 굴굴이었다.
“수민 씨, 이러지 마세요! 놔요!”
한혜원이 바짓가랑이를 빼내려 몸부림쳤지만, 수민의 손가락 끝은 대추나무 조각 칼을 쥘 때보다 더 단단하게 그녀의 옷자락을 물고 늘어졌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이미 모든 걸 잃었어요. 양손을 잃고, 명예를 잃고,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겨우 이곳 백산요의 흙 뒤에 숨어 숨을 쉬고 있단 말이에요! 서진우가 그 사람의 영혼을 어떻게 짓밟았는지 알면서, 당신마저 그 악마의 칼날이 되려는 건가요?”
수민의 피맺힌 절규가 좁은 사랑채 방안을 가득 채웠다. 한혜원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기자의 차가운 사명감 아래에 숨겨져 있던 인간적인 도덕심이 흔들리는 틈새였다.
“하지만 최강준의 조각 스타일이 당신 작품에 고스란히 묻어있어요. 이건 대중을 기만하는—”
“기만이 아니야.”
어둠 속에서 지옥의 밑바닥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랑채 문가에 최강준이 서 있었다. 그는 양손이 없었다. 부서진 전자의수를 벗어던진 그의 왼쪽 소매 끝은 텅 비어 있었고, 셔츠 깃 너머로 드러난 왼쪽 어깨와 가슴 부근에는 가마 사고 당시 수민을 구하려다 입은 붉고 참혹한 화상 흉터가 엉겨 붙어 있었다. 상처에서는 여전히 미세한 핏방울이 배어 나와 그의 하얀 셔츠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강준은 묵묵히 걸어 들어와 바닥에 쓰러진 수민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손이 없는 잔존하는 두 팔로 수민의 떨리는 상체를 조심스레 감싸 안아 자신의 단단한 가슴에 밀착시켰다. 그리고 한혜원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매서운 눈동자에는 분노가 아닌, 깊고 고요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보시다시피, 난 손이 없습니다. 내 머릿속에 든 해부학적 비례를 지시할 수는 있어도, 단 1그램의 진흙조차 스스로 만질 수 없는 병신입니다. 수민이가 밤새 어깨 뼈가 부러지도록 물레를 돌리지 않았다면, 저 작품은 세상에 나올 수 없었습니다. 이게 대필입니까? 아니면 서로의 부러진 뼈를 맞대고 빚어낸 생존의 몸부림입니까?”
강준의 텅 빈 소매 끝이 한혜원의 카메라 렌즈를 향해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의 참혹한 화상 흉터와 뭉툭한 신체적 현실은 그 어떤 논리적인 기사보다 더 강력한 진실을 웅변하고 있었다.
한혜원은 들이대던 카메라를 서서히 내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특종을 잡았다는 기쁨 대신, 한 인간의 가장 아픈 상처를 후벼 파고 있었다는 지독한 도덕적 죄책감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최강준 씨…… 당신의 상처가 이 정도일 줄은…….”
한혜원은 깊은 한숨을 쉬며 카메라의 메모리 카드를 꺼내 수민의 흙 묻은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기자로서의 정의를 걸죠. 전 이 기사를 쓰지 않겠습니다. 대신, 서진우를 무너뜨릴 진짜 진실을 취재하겠어요.”
한혜원은 품 안에서 낡은 취재 수첩과 서류 한 장을 꺼내 강준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3년 전 강준이 양손을 잃었던 의문의 교통사고 가해 차량 운전사의 금융 거래 내역서였다.
“가해 차량 운전사의 계좌로 거액의 영치금을 송금한 배후 회사의 이름을 추적했어요. ‘성진 C&D’…… 황두식이 운영하는 철거 용역업체이자, 서진우 관장의 비밀 자금 세탁 통로더군요. 당신의 사고는 단순 재해가 아니라, 기획된 청부 범죄였습니다.”
성진 C&D라는 글자를 마주한 순간, 강준의 동공이 광기로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3년 동안 자신의 신체를 빼앗아 간 원인이 단순한 불운이 아닌 계획된 살인 미수였다는 추악한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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