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필이라는 올가미
전시장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꺼진 하역장의 복도는 유난히도 차갑고 음산했다. 백산요의 첫 협업작인 ‘무언의 고백’이 설봉공원 세계도자센터 전시홀 중앙에서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받으며 빛나고 있었지만, 그 영광의 이면에서 기어 나오는 어둠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고 집요했다.
“서진우…….”
안수민은 카본 보강형 휠체어의 바퀴를 꼭 쥔 채, 방금 전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았던 서진우 관장의 거대한 그림자가 남긴 한기를 곱씹었다. 그의 비열한 미소와 가늘어진 눈동자는 경고였다. 특히 강준의 찢어진 셔츠 사이로 드러난 왼쪽 어깨의 참혹한 화상 흉터와 비어 있는 소매 끝을 집요하게 훑어내리던 그 시선은, 사냥감을 발견한 포식자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강준은 수민의 휠체어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 전자의수가 완전히 파손되어 뭉툭하게 남은 그의 왼쪽 손목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가마 사고 당시 수민을 구하려다 다친 어깨의 화상 상처가 다시 벌어졌는지, 흰 셔츠의 깃 너머로 붉은 피가 조금씩 배어 나와 살을 찌르는 통증을 유발하고 있었지만 그는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오직 서진우가 사라진 복도 끝을 서늘하게 노려볼 뿐이었다.
“강준 씨, 어깨가…….”
수민이 걱정스레 손을 뻗어 그의 굳어 있는 팔목 부근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의수가 없는 그의 살결은 차가웠지만, 그 안에서 요동치는 맥박은 뜨겁다 못해 터질 것처럼 가팔랐다.
“괜찮아.”
강준이 낮게 읊조렸다.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수민을 안심시키려는 듯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수민은 알고 있었다. 서진우라는 이름 석 자가 강준의 영혼에 새겨놓은 트라우마의 깊이를. 3년 전, 그의 천재적인 조각 드로잉을 훔치고 표절 작가라는 낙인을 찍어 화단에서 매장한 것도 모자라, 양손을 잃게 만든 의문의 사고 배후에 있는 그 악마가 다시 그들의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위기는 다음 날 아침, 그들이 임시로 머물고 있던 대안 예술 공간 ‘인디고’의 대기실에서 본격적으로 터져 나왔다.
“수민 누나! 강준 형! 이거 큰일 났어요! 당장 스마트폰 좀 보세요!”
백산요의 대학생 인턴 김민우가 사시나무 떨듯 떨며 대기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 들린 태블릿 PC 화면에는 이미 포털 사이트 메인을 도배하고 있는 자극적인 헤드라인들이 붉은 글씨로 번쩍이고 있었다.
[예술인가, 사기인가? 설봉 공모전 화제의 대작 ‘무언의 고백’ 대필 의혹 제기]
[양손 없는 조각가와 하반신 마비 도예가의 기적? 미술 평론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쇼” 폭로]
수민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민우가 내민 화면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자, 서진우의 자금 지원을 받는 주류 어용 평론가 홍세진이 기고한 칼럼이 눈에 들어왔다.
‘……물레질은 온몸의 코어 근육과 하체의 단단한 지지력이 필수적인 극한의 육체노동이다. 하반신이 완전히 마비되어 휠체어에 의지하는 무명 도예가가 어떻게 1미터가 넘는 대작의 중심을 잡고 두께를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사고로 양손을 모두 잃어 도구조차 쥘 수 없는 전직 조각가가 그 위에 살아 숨 쉬는 듯한 인체 해부학적 양각을 새겼다는 주장은 미학적 기만에 가깝다. 이것은 신체적 장애를 이용해 대중의 동정심을 자극하려는 비열한 장애 마케팅이자, 배후에 실제 제작자가 따로 존재하는 대필 사기극이라는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설봉 도예 공모전 심사위원회는 이 기만적인 작품을 즉각 실격 처리해야 마땅하다.’
글자 하나하나가 독침이 되어 수민의 가슴을 찔렀다. 평생 타인의 동정을 거부하며 오직 손끝의 정직한 노동만으로 가마를 지켜왔던 그녀였다. 100년 된 대추나무 조각 칼을 쥐고 손가락 지문이 닳아 없어지도록 물레를 돌렸던 그 처절한 밤들이, 단 한 줄의 악의적인 비평으로 인해 ‘비열한 사기극’으로 난도질당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우리가 어떻게 그 작품을 만들었는데…….”
수민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가슴 벨트로 휠체어 등받이에 고정된 그녀의 상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다리에 감각이 없다는 현실이, 이 냉혹한 사회적 편견 앞에서는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으로 다가와 그녀의 숨통을 조였다.
설상가상으로 인터넷 찌라시 매체의 정경식 기자가 작성한 파파라치 보도가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어제 전통시장 오일장터 주변에서 수민이 휠체어 바퀴를 굴리며 흙 묻은 얼굴로 생활 자기를 팔던 모습, 그리고 낡은 휠체어 바퀴가 진흙에 미끄러져 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리던 비참한 순간들이 고스란히 촬영되어 기사에 실려 있었다.
[‘눈물의 사부곡’ 뒤에 숨겨진 기만? 카본 휠체어 탄 여도예가의 호화로운 연출과 동정 쇼.]
그 왜곡된 기사 아래에는 수민의 대학 동기들과 익명의 네티즌들이 작성한 악의적인 댓글들이 쉴 새 없이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 대학 다닐 때도 장애인 전형으로 들어와서 유난 떨더니 결국 대필 사기였네.
- 손 없는 남주인공 얼굴 반반한 거 믿고 감성 팔이 제대로 하네. 도자기 뒤에서 진짜로 물레 돌려준 대필 작가는 얼마 받았을까?
- 예술이 장난인가? 장애가 벼슬도 아니고 대중을 기만하는 사기꾼들은 미술계에서 영원히 매장해야 한다.
“누나, 제가 댓글로 해명하려고 계속 글을 올리고 있는데, 매크로 계정들이 조직적으로 제 글을 묻어버리고 있어요. 대학 게시판에도 누나 비하 글이 계속 올라오고…… 어떡해요, 진짜?”
민우가 억울함에 눈물을 글썽이며 발을 동동 굴렀지만, 거대 자본이 움직이는 여론의 화력은 평범한 대학생의 해명 따위는 가볍게 짓밟아 뭉개버렸다.
대기실 안의 온도가 급격히 식어갔다. 백산요의 온라인 쇼핑몰에는 이미 주문 취소와 환불 요청이 빗발치고 있었고, 이천의 거래처들로부터 걸려오는 항의 전화로 민우의 휴대폰은 끊임없이 진동했다. 병상에 누워 계신 수민의 부친 안태환 명장의 병세가 이 소식을 듣고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는 이영순 아주머니의 문자 메시지까지 도착하자, 수민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어깨를 들썩였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잘게 떨렸다. 100년 된 대추나무 조각 칼을 쥘 때의 그 단단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세상의 날카로운 손가락질에 갈기갈기 찢긴 나약한 여인의 손만 남겨져 있었다.
‘정말 내 욕심이었을까? 손이 없는 강준 씨를 내 다리로 삼고, 내 마비된 다리를 채우기 위해 그의 재능을 이용한 대가가 이런 파멸이었을까…….’
자괴감과 죄책감이 진흙처럼 온몸을 덮쳐와 그녀를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던 그 순간이었다.
스윽.
어둠을 가르는 듯한 묵직한 마찰음과 함께, 강준이 수민의 휠체어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는 양손이 없었다. 부서진 의수조차 벗어던진 그의 왼쪽 소매 끝은 텅 비어 있었고, 셔츠 자락에는 어깨 상처에서 번진 핏자국이 선명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가마 속에서 1300도의 온도로 타오르던 그 푸른 불꽃보다 더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강준은 조용히 몸을 숙였다. 그리고 손가락이 없는 자신의 뭉툭한 왼쪽 소매 끝을, 수민의 떨리는 오른쪽 어깨 위로 묵직하게 얹었다. 차가운 기계의 온기가 아닌, 피와 땀이 섞인 인간 최강준의 뜨거운 체온이 얇은 옷감 너머로 수민의 피부를 파고들었다.
그의 넓고 단단한 가슴이 수민의 흔들리는 등을 뒤에서 단단히 받쳐주었다. 마치 어두운 지하 저장고에서 한 몸이 되어 물레를 돌리던 그 순간처럼, 그의 신체적 지탱은 수민의 떨리는 척추를 단숨에 고정해 주는 가장 완벽한 지지대가 되었다.
“안수민, 나를 봐.”
강준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수민의 귓가를 울렸다. 수민은 눈물 고인 눈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덥수룩한 머리칼 사이로 흔들림 없는 그의 눈동자가 오롯이 자신만을 담고 있었다.
“손가락이 잘려 나간 날, 난 내 인생이 끝난 줄 알았어. 세상이 나를 퇴물이라 부르고 표절범이라 손가락질할 때, 난 도망치는 것밖에 몰랐지. 하지만 네가 나를 흙 앞으로 다시 끌고 왔어.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네가, 손이 없는 나를 업고 그 험한 산길을 오르면서 내게 가르쳐 줬잖아. 우리의 결핍은 부끄러운 흉터가 아니라, 진실을 빚어내는 도구라고.”
강준은 뭉툭한 소매 끝으로 수민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었다. 그의 거친 옷감의 질감이 뺨을 스쳤지만, 그 어떤 비단보다 따뜻했다.
“홍세진의 펜대 따위가, 서진우의 더러운 돈이 우리가 밤새 흘린 땀방울을 가짜로 만들 순 없어. 내가 네 다리가 되어 줄 거고, 네가 내 손이 되어 줄 거야. 이깟 올가미 따위에 걸려 무너지지 않아.”
강준의 단단한 다리가 바닥을 굳건히 지탱했고, 그의 넓은 어깨가 수민의 몸을 감싸 안았다. 수민은 그의 품 안에서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뛋속까지 파고들던 만성 신경통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도망치지 않아, 수민아. 끝까지 네 곁에 서 있을 테니까.”
강준이 수민의 어깨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조용히 눈빛으로 맹세했다. 그들의 부러진 신체가 서로를 메워가며 형성한 완벽한 아치 구조는, 주류 미술계가 던진 그 어떤 더러운 올가미로도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가장 단단한 걸작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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