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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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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의 지하 유리 연습실에서 흘러나오던 푸른 빛과 차가운 구리판의 한기가 아직 발바닥에 낙인처럼 남아 있는 듯했다. 차도현의 성북동 저택으로 돌아온 은수현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의 뒤틀린 소유욕과 집착이 서린 눈빛, 그리고 귓가에 닿았던 서늘한 숨결이 귓가에서 끊임없이 맴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현은 무너지지 않았다. 도현이 제공한 태안교향악단 상임지휘자라는 단상은 그녀가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클래식계의 거대한 음모를 파헤칠 수 있는 유일한 칼날이었다.


수현은 도현의 감시망이 일시적으로 느슨해진 틈을 타, 은사 오성환 교수를 만나기 위해 평창동으로 향했다. 도현의 사설 경호팀이 저택 외곽에서 그녀의 동선을 감시하고 있었지만, 도현은 수현이 지휘자로서 완벽한 감각을 재활하기 위해 은사를 만나는 것만큼은 묵인해 주었다. 어쩌면 그 냉혹한 후원자 역시 수현이 무대 위에서 완벽한 마에스트라로 서기를 누구보다 갈망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


북한산 자락의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오성환 교수의 자택은 낡은 석조 건물이었다. 수현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마당을 지나 지하 아틀리에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문을 열자, 낡은 오선지와 송진 가루, 그리고 오래된 나무 악기 특유의 텁텁하고 따뜻한 냄새가 수현의 후각을 가장 먼저 반겼다. 차도현의 유리 감옥이 지닌 숨 막히는 정적과 대조되는, 시간이 멈춘 듯한 평화로운 침묵의 공간이었다.


지하 음악실 한구석, 백발의 노신사가 먼지가 부얗게 앉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대한민국 클래식 지휘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수현의 청각 상실을 알고도 그녀에게 다시 지휘봉을 쥐여주었던 유일한 스승, 오성환 교수였다.


오성환은 수현이 들어오는 기척을 발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가벼운 문틀의 떨림으로 감지하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깊고 인자한 눈빛 속에 예술가 특유의 날카로움이 스쳐 지나갔다.


“왔느냐, 수현아.”


오성환의 입술이 천천히, 그리고 명확하게 움직였다. 수현은 구화술을 이용해 그의 입모양을 정교하게 읽어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세계에서 스승의 입술은 수현에게 유일한 정직한 언어였다.


“선생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수현의 목소리는 다소 굳어 있었지만 깊은 존경심이 묻어났다. 오성환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작은 가죽 상자 하나를 꺼냈다.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해진 낡은 상자였다. 그가 상자를 열자, 안쪽의 붉은 벨벳 시트 위에 차갑게 식어 있는 철제 도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은 네 아버지가 평생 자신의 분신처럼 쥐고 살던 유품이다.”


오성환의 입술이 무겁게 움직였다. 수현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상자 안에 누워 있는 것은 은민우가 독일 요하임 음악원 유학 시절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사용했던 표준 A음(440Hz) 명품 소리굽쇠였다. 수현은 떨리는 손으로 소리굽쇠를 집어 들었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차가운 강철의 촉감이 가슴을 아리게 찔러왔다.


“네 아버지는 첼로를 켜기 전, 항상 이 소리굽쇠를 관자놀이에 대고 기준 음을 잡았다. 귀가 아닌 뼈로 소리를 듣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게지.”


오성환은 수현을 피아노 옆 나무 의자에 앉혔다. 그의 표정이 이내 엄격한 거장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차도현 이사장이 네 발바닥 밑에 구리 진동판을 깔아주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발끝으로 느끼는 저음역대의 박자일 뿐이다. 진정한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전체의 미세한 음정의 높낮이까지 판별할 수 있어야 해. 귀가 들리지 않는 네가 무대 위에서 단원들을 장악하려면, 뼈가 소리를 기억하게 만들어야 한다.”


오성환은 수현의 이마와 관자놀이, 그리고 쇄골뼈를 차례로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부터 ‘오성환의 골전도 조율 훈련법’을 시작하겠다. 소리굽쇠의 미세한 진동 주파수를 네 두개골 뼈에 직접 각인시키는 훈련이다. 육체적으로 극심한 고통과 두통이 따를 게다. 하지만 이 주파수를 뇌에 새기지 못하면, 넌 평생 차도현이 만들어준 진동판 위에서만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할 뿐이야. 할 수 있겠느냐?”


수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단호하게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에 타협 없는 예술가로서의 존엄과 복수심의 불꽃이 번뜩였다. 꼭두각시 인형으로 박제되느니, 차라리 뼈가 부서지는 고통을 택하리라.


“좋다. 소리굽쇠를 단단한 피아노 모서리에 타격하거라.”


오성환의 지시에 따라 수현은 소리굽쇠를 피아노 목재 모서리에 강하게 두드렸다.


눈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귀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지독한 침묵이었다. 하지만 수현이 쥔 소리굽쇠의 손잡이 끝에서부터 손가락 피부 세포를 타고 미세하고 날카로운 떨림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440Hz의 주파수가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파동이었다.


“망설이지 말고 네 관자놀이에 대거라.”


수현은 떨리는 손으로 진동하는 소리굽쇠의 둥근 손잡이 끝을 오른쪽 관자놀이 뼈에 밀착시켰다.


“읏...!”


그 순간, 수현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소리가 아니었다. 뇌를 직접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물리적 충격파였다. 미세한 강철의 떨림이 측두골 피부를 뚫고 들어가 두개골 전체를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머릿속이 윙윙거리며 일순간 지독한 이명이 뇌 신경을 강타했고, 위장이 뒤집힐 듯한 극심한 구토 증세가 치밀어 올랐다. 수현은 반사적으로 소리굽쇠를 떨어뜨리려 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편두통에 시야가 흐릿하게 번져갔다.


“버텨라, 수현아!”


오성환이 수현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그의 완고한 손길이 그녀의 탈출을 막아섰다.


“진동에서 도망치려 하지 마라. 그 떨림을 밀어내지 말고, 네 뇌가 그 주파수를 온전히 흡수하게 두어라. 호흡을 가다듬고 심장 박동을 그 진동의 주기와 일치시키는 게야!”


수현은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 혀끝을 강하게 깨물어 피 맛을 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는 머릿속에 가득 찬 공포와 통증의 소용돌이를 가라앉히기 위해, 옥탑방에서 밤마다 행했던 ‘메트로놈 진동 동조 명상법’을 발동했다.


들이쉬고, 내쉬고.


심장 박동을 의도적으로 느리게 통제하며, 관자놀이 뼈를 타고 들어오는 440Hz의 날카로운 파동을 뇌 속의 고요한 수면 위에 떨어뜨렸다. 지독한 통증의 파도가 서서히 규칙적인 푸른색 주파수 파형으로 변환되어 뇌리 속에 시각화되기 시작했다. 척추를 타고 내려가는 미세한 전류 같은 떨림이 온몸의 근육 기억으로 새겨지는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이제 쇄골뼈로 옮겨라. 저음부의 공명을 뼈 전체로 확장해야 한다.”


오성환의 지시에 수현은 소리굽쇠를 다시 한번 타격한 뒤, 가슴 앞쪽의 차가운 쇄골뼈 중앙에 갖다 대었다.


이번에는 측두골과는 다른 묵직하고 깊은 진동이 흉골 전체를 흔들었다. 가슴뼈가 징처럼 울리며 뇌 속에 잠들어 있던 절대음감의 기준 주파수(A음)가 찬란한 황금빛 파동으로 부활했다. 소리가 사라진 세계에서, 뼈의 떨림을 통해 완벽한 우주의 기준 음정을 해독해 내는 ‘잔향의 골전도 인지’ 경지가 수현의 온몸에 깃드는 듯했다.


수현은 자신감을 얻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소리굽쇠를 강하게 두드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오성환이 가르쳐 준 최종적인 각성의 지점, 이마뼈 한가운데에 소리굽쇠를 강력하게 밀착시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두개골의 가장 단단한 전두골을 타고 들어간 극단적인 440Hz의 진동 주파수가 수현의 뇌 신경망을 관통하는 찰나, 그녀의 뇌리 속에서 굳게 잠겨 있던 트라우마의 빗장이 파괴적인 힘으로 부서져 내렸다.


콰아아아-


완전한 침묵의 공간이었던 오성환의 지하 아틀리에가 일순간 찢어지는 듯한 환청의 폭풍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빗소리였다. 창문을 사정없이 때리던 차가운 밤비 소리가 뇌 속에서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어서-


빠아아앙-!


3년 전 비 내리는 밤, 지휘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어두운 이면도로에서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던 정체불명의 차량이 내뿜던 날카롭고 잔혹한 경적 소리가 환청이 되어 수현의 머릿속에서 폭발했다.


강렬한 헤드라이트의 백색광이 눈앞을 멀게 만들고, 쇠가 으스러지는 끔찍한 충격음과 함께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던 그 순간의 감각이 전신 신경망을 타고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소리를 잃어버리던 그 마지막 찰나의 공포와 비명이 뇌 속에서 메아리치며 수현의 전신을 마비시켰다.


“아악!”


수현은 비명을 지르며 소리굽쇠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탱그랑-!


소리굽쇠가 대리석 바닥을 뒹구는 미세한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지만, 수현은 이미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전신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이마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눈가를 적셨다. 과거의 유령이,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갔던 그 비극적인 사고의 순간이 주파수의 떨림을 타고 귀가 아닌 영혼의 고막을 사정없이 찢어놓은 것이다.


오성환은 바닥에 주저앉은 수현을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의 따뜻하고 묵직한 손길이 수현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수현은 스승의 품에 기대어 소리 없는 오열을 터뜨렸다. 아버지를 잃고, 소리를 잃고, 무대에서 쫓겨나 차도현의 감옥에 갇히기까지 참아왔던 모든 절망과 분노가 눈물이 되어 쏟아졌다.


“잘 견뎠다, 수현아. 그 공포의 환청은 네 청각 신경이 완전히 죽지 않고 뇌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증거다. 네 아버지가 남긴 이 소리굽쇠가 네 잠든 신경을 깨우고 있는 게야.”


오성환은 바닥에 떨어진 소리굽쇠를 주워 다시 가죽 상자에 담아 수현의 손에 쥐여주었다. 수현은 젖은 눈을 닦으며 스승의 입술을 주시했다.


“그리고... 이것도 네가 가져가야 할 게다.”


오성환은 피아노 위에 놓여 있던 오래되고 누렇게 바랜 악보 뭉치 하나를 수현에게 건넸다. 그것은 은민우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집필했던, 세상에 공표되지 않은 유작 교향곡 ‘침묵’의 미완성 친필 총보 원본이었다.


수현은 떨리는 손으로 악보를 받아 펼쳤다. 아버지의 거칠고 힘 있는 펜선이 오선지 위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악보의 마지막 3악장 피날레 부분으로 넘어가던 순간, 수현의 시선이 멈췄다.


악보의 여백 구석에, 아버지가 흘려 쓴 듯한 기묘한 불협화음 음표들과 함께 날카로운 펜촉으로 짓눌러 적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그것은 음악적 기호가 아니었다. 억눌린 분노와 두려움이 서린, 한정혜와 관련된 비극적인 음모의 단서들이 낙서처럼 적혀 있는 피 묻은 유산이었다.


수현은 악보에 적힌 불협화음 마디를 손가락 끝으로 쓸어내렸다. 아버지가 사망 직전 남긴 이 메아리가, 자신을 침묵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배후들의 심장을 찌를 치명적인 무기가 될 것임을 수현은 직감했다. 그녀는 소리굽쇠와 아버지가 남긴 총보를 가슴에 꼭 안으며 차가운 복수의 투사로 다시 한번 각성했다.


하지만 평화로운 안식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하 아틀리에의 육중한 문이 열리는 미세한 진동이 수현의 발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수현이 고개를 돌리자, 도현이 보낸 전담 보디가드 강성태가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입술이 바쁘게 움직였다.


‘은 지휘자님. 이사장님의 명령입니다. 당장 복귀하셔야 합니다. 강민우와 삼촌 은태우가 리허설룸을 습격하려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수현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가슴속에 아버지가 남긴 소리굽쇠의 진동과 유작 악보의 불협화음 암호를 품은 채, 그녀는 자신을 기다리는 화려하고 잔혹한 전쟁터를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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