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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의 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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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수면 위로 가라앉았다가 급격히 떠오르는 순간, 은수현이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지독한 침묵이었다.


귀를 찢을 듯한 이명도, 리허설룸을 가득 채웠던 단원들의 숨 막히는 열기도 없었다. 오직 진공상태에 갇힌 듯한 완전한 무음의 세계. 그러나 기묘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전신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규칙적이고 묵직한 진동. 그것은 마치 거대한 야수의 심장박동처럼 그녀가 누워 있는 가죽 시트를 타고 척추를 흔들고 있었다.


수현은 감겼던 눈을 번쩍 떴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가죽과 고급 차량 특유의 은은한 방향제 냄새, 그리고 차가운 금속성의 공기. 수현은 자신이 움직이는 차 안에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리허설의 마지막 피날레를 내리꽂는 순간 가슴을 찌르던 극심한 통증과 함께 눈앞이 암전되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


“정신이 드나, 은수현 지휘자.”


조수석 방향에서 나직하게 움직이는 입술이 보였다. 수현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뇌 신경을 극한으로 소모한 대가로 사지가 납처럼 무거웠다. 입안에서는 혀끝을 깨물었을 때 흘러나온 비릿한 철경의 맛이 여전히 감돌았다.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차도현이었다. 포마드로 깔끔하게 넘겼던 흑발이 빗물에 미세하게 젖어 이마 위로 흩어져 있었고, 단정하게 조여져 있던 넥타이는 조금 풀려 있었다.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은 평소보다 더 창백했고, 속을 알 수 없는 얼음 같은 눈빛은 어둠 속에서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차는 이미 멈춰 서 있었다. 수현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화려한 강남의 콘서트홀이 아니었다. 짙은 밤안개에 휩싸인 교외의 한적한 숲, 그리고 그 한가운데 우뚝 솟은 차가운 노출 콘크리트 건물이 보였다.


도현은 수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의 가냘픈 몸을 안아 들었다. 수현은 반항하려 했으나 손끝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다. 그녀의 몸이 도현의 단단한 가슴에 밀착되는 순간, 그의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고 거칠게 요동치고 있음이 수현의 뺨을 타고 전해졌다. 수현은 예전 저택에서 느꼈던 그의 기묘한 심박을 다시 한번 인지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도현은 수현을 안은 채 건물 지하로 통하는 육중한 철문 앞으로 걸어갔다. 홍채 인식 장치가 붉은빛을 뿜어내며 잠금이 해제되자, 안쪽으로 길게 뻗은 나선형 계단이 드러났다. 계단 끝에 다다랐을 때, 수현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사방이 두꺼운 이중 유리벽으로 설계된 거대하고 밀폐된 지하 공간. 그곳이 바로 ‘양평 교외의 지하 유리 연습실’이었다. 외부의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된 그곳은, 오직 빛과 진동만이 존재하는 기묘한 아쿠아리움 같았다. 푸른색 LED 조명이 유리벽을 타고 흘러내리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도현은 연습실 중앙에 위치한 높다란 목조 지휘단상 위에 수현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수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단상 바닥을 짚었다. 차가운 나무의 질감이 손바닥에 닿았다. 그녀는 자신의 코트가 벗겨져 있고, 구두마저 사라진 채 스타킹만 신은 맨발 상태임을 깨달았다.


수현은 도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그러나 잔인하리만치 명확하게 움직였다.


“여기는 오직 너만을 위해 준비된 감옥이자, 네 진짜 무대다.”


수현은 떨리는 손으로 단상을 짚으며 일어섰다. “당신...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단원들 앞에서 내가 쓰러졌는데, 왜 병원이 아니라 이런 곳으로...”


“병원?” 도현이 차갑게 비웃었다. “네가 병원으로 실려 가는 순간, 강민우와 이사회가 네 난청 진단서를 확보하기 위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겠지. 내가 널 그들의 이빨 앞에 던져두었을 거라고 생각하나?”


수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녀는 뒷걸음질 치려 했으나, 단상 끝에 발이 걸려 휘청거렸다. 도현이 한발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의 손길은 거칠었지만, 동시에 무너지는 그녀를 지탱하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당신... 어떻게...”


“내가 네 난청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은수현.”


도현의 입술이 수현의 귓가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그의 서늘한 숨결이 수현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입술 모양과 그의 가슴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성대의 떨림이 수현의 온 신경을 지배했다.


“네가 3년 전 그 비 내리는 밤, 소리를 잃어버렸던 그 순간부터... 내가 널 다시 이 지휘대 위에 세우기로 결심한 그 찰나까지. 난 네 침묵의 깊이를 전부 알고 있었어.”


수현은 거대한 해일에 휩쓸린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도현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들리지 않는 귀를 숨기기 위해 단원들의 입술을 읽고, 혀끝을 깨물며 처절한 포커페이스를 연기하는 모습을... 그는 저 높은 곳에서 관조하며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극도의 굴욕감과 배신감이 수현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날 조롱한 거였어?” 수현은 분노로 부르르 떨며 도현의 가슴을 밀쳐냈다. “내 비참한 연극을 보면서 뒤에서 웃고 있었던 거냐고! 차도현 이사장!”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 도현의 오만한 뺨을 향해 휘둘렀다.


탁!


공기를 가르던 수현의 손목이 허공에서 낚아채였다. 도현의 가죽 장갑을 낀 손이 그녀의 손목을 으스러질 듯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의 눈빛에 억눌려 있던 광기 어린 소유욕과 집착의 불꽃이 번뜩였다.


“조롱?” 도현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입술이 수현의 시선 중앙에서 잔인하게 움직였다. “내가 널 조롱하기 위해 이 지하 공간을 설계하고, 재단 감사팀 몰래 내 개인 신탁 자금을 쏟아부어 독일에 특수 구리판을 주문했다고 생각하나? 넌 내 생각보다 훨씬 어리석군, 은수현.”


도현은 수현의 손목을 잡은 채 그녀를 단상 바닥으로 거칠게 끌어내렸다.


“이게 네 새로운 귀가 될 장치다.”


단상 하단의 나무 판이 뜯겨 나간 자리에는, 푸른 조명을 반사하며 차갑게 빛나는 거대한 구리판이 매설되어 있었다. 그것은 오케스트라의 저음부 주파수를 물리적 떨림으로 변환해 주는 ‘특수 제작 구리 진동판’이었다.


도현은 수현의 저항을 무시한 채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대한민국 클래식계를 쥐고 흔드는 오만한 지배자가, 차가운 지하 바닥에서 그녀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도현의 손가락이 수현의 발목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더니, 그녀가 신고 있던 얇은 스타킹을 거칠게 찢어발겼다.


“아...! 놔, 이거 놓으라고!”


수현이 발버둥 쳤지만, 도현의 손길은 단호했다. 스타킹이 찢겨 나가고, 수현의 하얗고 가냘픈 맨발이 차가운 공기 중에 완전히 노출되었다. 도현은 그녀의 발바닥을 거대한 구리 진동판 위에 강제로 밀착시켰다.


“맨발로 서라. 그게 이 방의 규칙이다.”


차가운 구리판의 금속성 냉기가 수현의 발바닥 피부 신경을 사정없이 찔러왔다. 한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와 전신이 가늘게 떨렸다. 수현은 도현의 비정상적인 지배적 행태에 극도의 수치심을 느꼈지만, 동시에 묘한 긴장감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도현이 조절 패널의 레버를 올렸다.


우우웅-


순간, 소리 없는 공간에 거대한 파동이 일었다. 구리 진동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소리가 아니었다. 발바닥 뼈를 타고 올라와 전신을 관통하는 묵직하고 입체적인 물리적 떨림이었다.


더블베이스의 깊은 저음, 팀파니의 웅장한 타격 주파수가 60헤르츠의 미세한 공명 신호가 되어 수현의 발가락 끝에서부터 무릎, 골반, 그리고 척추를 타고 뇌의 청각 피질을 강제 타격했다.


수현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정적의 우주 속에서, 그녀의 뼈가 소리를 기억해 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현이 설계한 ‘잔향의 골전도 인지(Bone Resonance)’의 경지였다.


“느껴지나?”


도현이 어느새 수현의 등 뒤로 다가왔다. 그의 넓은 가슴이 수현의 가냘픈 등덜미에 밀착되었다. 그의 뜨거운 체온과 차가운 구리판의 한기가 수현의 신체를 양극단으로 찢어놓는 듯했다. 도현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카본 하이테크 지휘봉’을 주워 수현의 오른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큰 손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감싸 안았다.


수현은 도현의 품에 갇힌 채,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강렬한 진동에 몸을 떨었다. 굴욕스러웠지만, 동시에 3년 만에 음악의 실체를 온몸으로 느끼는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그녀의 굳어 있던 감각 세포들이 도현의 손길과 구리판의 떨림 속에서 관능적으로 깨어나고 있었다.


도현이 수현의 손을 잡고 지휘봉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귀밑 흉터 자리를 가볍게 스쳤다.


“내 앞에서 소리를 숨기려 하지 마. 난 네 침묵까지 가질 테니까.”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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