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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는 호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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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대저택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떠나 태안교향악단 제1리허설룸의 퀴퀴한 나무 먼지 냄새를 들이마셨을 때, 은수현은 자신이 마침내 사지의 한복판에 섰음을 직감했다. 귀를 짓누르는 완벽한 진공 상태. 소리가 소거된 세계에서 침묵은 단순한 고요가 아니었다. 그것은 피부의 솜털을 하나하나 곤두세우는 끈적한 압박이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의 초침 소리 없는 불꽃이었다.


수현은 단상 아래로 내려와 수석 플루티스트 서채원의 코앞에 섰다. 순금으로 도금된 플루트가 리허설룸의 조명 아래서 누런 빛을 발하며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서채원의 입술은 비틀린 호선을 그리며 멈춰 있었다. 수현은 극도로 집중하며 그녀의 입술 모양을 뇌리 속에서 실시간으로 해독했다.


‘낙하산 주제에 뻔뻔하게 어딜 봐? 귀머거리라는 소문이 진짜인지 아닌지 오늘 여기서 끝장내 줄 테니까.’


조롱과 멸시가 담긴 비언어적 파동이 사방에서 들이쳤다. 저 멀리 더블베이스 파트의 수장인 노조 지부장 박태수의 입술 역시 옹졸하게 씰룩이며 단원들에게 무언의 눈빛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보이콧의 침묵은 철저히 기획된 덫이었다. 수현이 여기서 단 한 걸음이라도 물러서거나 당황한 기색을 보인다면, 대기실 밖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이사회 감사팀과 전임 지휘자 강민우의 세력에게 완벽한 사퇴 명분을 쥐여주게 될 터였다.


수현은 심폐 자율 제어 호흡법을 가동했다. 가슴속에서 날뛰려는 심장 박동을 분당 60회 이하로 강제 억누르며, 오직 이성만을 남겨두었다. 그녀는 천천히 오른손을 뻗어 지휘봉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시각적 호흡 동조(Visual Sync)”를 시작했다.


수현의 시야가 기묘하게 넓어졌다. 서채원의 가냘픈 목덜미를 따라 흐르는 흉쇄유돌근의 미세한 수축, 쇄골 밑 횡격막이 숨을 들이쉬며 가파르게 팽창하는 속도, 그리고 플루트의 톤 홀 위에 얹어진 손가락 끝 근육의 미세한 긴장 상태가 초 단위로 분할되어 수현의 뇌리에 시각화되었다.


이미 머릿속에 수백 번도 넘게 입체적으로 그려둔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의 총보가 렌즈 위에 투사되듯 겹쳐 보였다. 서채원이 언제 첫 음을 내야 하는지, 그리고 지휘자를 무력화하기 위해 일부러 몇 박자를 밀어 연주하려는지(태업) 그 비열한 타이밍이 수현의 눈에는 훤히 읽혔다.


‘의도적 템포 밀림 분쇄 기술.’


서채원이 플루트 리드를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어깨가 솟구치며 깊은 들숨을 들이쉬었다가, 엇박을 타기 위해 0.5초간 호흡을 참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 찰나, 수현의 지휘봉이 허공을 날카롭게 가르며 내리꽂혔다. 그것은 부드러운 음악적 수신호가 아니었다. 서채원의 플루트 끝자락을 향해 칼날처럼 정확하고 빠르게 떨어지는 위협적인 다운비트였다.


쉭-!


공기를 찢는 지휘봉의 날카로운 압력이 서채원의 뺨을 스치듯 지나갔다. 지휘봉 끝은 플루트 마우스피스 바로 앞 1센티미터 지점에서 거짓말처럼 딱 멈춰 섰다.


“...!”


서채원은 반사적으로 동공을 확장하며 몸을 크게 떨었다. 눈앞을 스친 지휘봉의 가공할 속도와, 자신을 집어삼킬 듯 꿰뚫어 보는 수현의 서늘한 안광에 극도의 심리적 공포를 느낀 탓이었다. 질려버린 그녀의 손가락이 자신도 모르게 플루트 건반을 강하게 눌렀고, 억눌려 있던 폐부의 호흡이 리드를 때렸다.


피이이-!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서채원이 기획했던 고의적인 박자 밀림 사보타주는 수현의 기습적인 지휘봉 제압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서채원의 입술에서 터져 나온 첫 플루트 음은, 베토벤이 악보에 새겨놓은 가장 완벽한 정박의 타이밍에 리허설룸의 정적을 찢어발겼다.


서채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해갔다. 자신이 ‘소리도 듣지 못하는 낙하산’의 손끝에 완벽하게 조종당해 첫 음을 불어버렸다는 굴욕감이 그녀의 전신을 지배했다.


그 옆에서 더블베이스를 쥔 채 음흉하게 미소 짓던 박태수가 급히 입술을 움직여 서채원을 윽박지르려 했다.


‘이봐, 서채원! 연주를 왜 시작해...!’


수현은 고개를 돌려 박태수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녀의 차가운 안광이 박태수의 입술을 단숨에 옭아맸다. 수현은 말없이 지휘봉 끝을 박태수의 더블베이스를 향해 가볍게 치켜들었다. 단지 그 사소한 손짓 하나만으로도, 리허설룸 전체에 “내가 이곳의 절대적인 지배자다”라는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선포되었다. 박태수는 수현의 기세에 짓눌려 턱을 벌린 채 굳어버렸다.


그 기괴한 정적을 뚫고, 단상 아래 제1바이올린 수석 자리에 앉아 있던 신임 콘서트마스터 한지원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원의 흔들리던 동공은 어느새 경외감과 뜨거운 전율로 가득 차 있었다. 수현이 오직 시각적 호흡 동조와 압도적인 카리스마만으로 목관 파트의 여왕인 서채원을 완벽히 굴복시키는 과정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덕분이었다. 수현이 지원을 향해 미세하게 왼쪽 눈썹을 찌푸렸다. 오직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비밀 소통 신호였다.


‘지원아, 활을 켜라. 네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이 침묵을 깨뜨려.’


지원은 침을 꿀꺽 삼키며,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를 턱밑에 단단히 밀착시켰다. 그녀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길고 우아한 바이올린 활이 스트라디바리우스의 현 위에 얹어지는 순간, 지원의 야수 같은 천재성이 폭발했다.


지원이 온 힘을 실어 활을 켜 내렸다.


징---!


리허설룸의 나무 바닥을 타고 묵직하고도 풍부한 황금빛 현악의 진동이 수현의 발바닥 피부 신경을 거쳐 척추로 짜릿하게 흘러들어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수현은 그 진동의 진폭만으로도 지원이 완벽한 템포와 음색으로 합류했음을 온몸으로 감각했다. 지원의 바이올린 선율이 리허설룸의 차가운 정적을 산산이 깨부수며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지원의 활 긋기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오직 단상 위의 수현만을 맹렬히 쫓고 있었다.


지원의 과감한 동조 연주는 얼어붙어 있던 리허설룸 내부에 거대한 균열을 일으켰다. 눈치를 보며 악기를 내려놓고 있던 현악기 파트 단원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들의 손가락이 반사적으로 활을 쥐기 시작했다.


수현은 다시 단상 위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 단상 위에 맨발로 구리판을 딛고 서서, 지휘봉을 쥔 오른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녀의 서늘하고 도도한 눈빛이 단원 전체를 휩쓸었다.


‘연주해라. 내 지휘봉 끝에서 너희의 영혼을 쏟아내라.’


지원의 바이올린 선율에 이끌려, 제2바이올린 수석이 활을 올렸다. 이어서 비올라 파트가, 그리고 첼로 파트가 도미노처럼 활을 들어 올렸다. 그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수현의 지휘봉 끝에 고정되었다. 보이콧의 차가운 침묵이 완벽하게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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