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위의 침묵
성북동 대저택의 육중한 철문이 닫히던 어젯밤의 기억은 차가운 서리처럼 은수현의 뇌리에 들러붙어 있었다. 차도현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을 때 느껴졌던 그 기묘하고 불규칙한 심장의 박동. 언제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위태롭게 날뛰던 부정맥의 진동은, 그 오만한 남자가 품은 치명적인 약점을 수현의 손끝에 고스란히 고발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 수현에게는 남의 약점을 곱씹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오늘 아침, 그녀는 도현이 제공한 최고급 세단을 타고 태안교향악단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서울의 풍경은 눈부시게 화려했으나, 소리가 소거된 수현의 세계에서는 그저 정지된 슬라이드 필름처럼 무미건조하게 흘러갈 뿐이었다. 고막을 짓누르는 완벽한 진공 상태. 수현은 주머니 속의 골드 마스터키를 손끝으로 만지며 입술을 짓씹었다. 이제 진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갈 시간이었다.
태안 콘서트홀 뒤편에 위치한 제1리허설룸의 두꺼운 방음문 앞에 섰을 때, 수현은 심호흡을 하며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문손잡이를 잡은 손끝으로 미세한 공기의 떨림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완전한 무음의 세계. 그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넓고 높은 리허설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
사방이 방음벽과 거대한 거울로 둘러싸인 공간.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이미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기류는 환영이 아닌, 얼음장 같은 적의였다.
보통의 리허설 직전이라면 악기를 조율하는 소리와 단원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 차 있어야 했다. 하지만 수현의 눈에 비친 리허설룸은 기괴할 정도로 정적에 잠겨 있었다. 바이올린 활은 현 위에 얹어지지 않은 채 멈춰 있었고, 플루트와 트럼펫은 단원들의 무릎 위에 차갑게 식어 있었다. 단원들은 악기를 조율하는 대신,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리허설룸 입구에 선 수현을 일제히 쏘아보고 있었다. 수십 쌍의 눈동자가 오직 그녀 한 사람만을 향해 칼날처럼 쏟아졌다.
수현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단상으로 향하는 통로는 좁고 길었다.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나무 바닥의 미세한 진동조차 극도로 억제되어 있었다. 단원들 사이를 지나갈 때, 수현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그들의 입술 움직임을 포착했다.
단상 왼편, 더블베이스 파트의 수장인 노조 지부장 박태수가 옆자리 단원에게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 속삭이고 있었다. 수현의 눈이 그의 거친 입술 모양을 날카롭게 읽어내렸다.
‘...낙하산... 이사장 노리개 주제에...’
그 옆, 목관 파트의 여왕이자 전임 지휘자 강민우의 애제자인 수석 플루티스트 서채원의 입술 역시 비틀린 호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귀머거리라는 소문이 진짜인지 아닌지... 오늘 보면 알겠지. 그냥 서 있는 인형일 뿐이야.’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한 충격이 일었으나, 수현은 동공 하나 흔들리지 않고 단상 위로 올라섰다. 비웃음과 경멸로 가득 찬 입술들의 움직임이 소리 없는 비수처럼 사방에서 날아와 박혔다. 전임 지휘자 강민우가 배후에서 단원들을 조종해 자신을 무너뜨리려 덫을 놓았음이 분명했다. 여기서 한 걸음이라도 물러선다면, 수현은 지휘자로서의 존엄을 잃고 도현의 금빛 감옥 속에서 영원히 박제된 인형으로 살아가야 할 터였다.
수현은 단상 중앙에 꼿꼿이 서서 단원 전체를 내려다보았다. 시야각을 180도로 넓히는 시각적 호흡 동조법을 가동하자, 단원들의 어깨 높낮이와 호흡의 주기가 반투명한 파동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그녀는 보면대 위에 놓인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의 총보를 펼쳤다. 이미 머릿속에 수백 번도 넘게 시각화해 둔 악보였다. 수현은 지휘봉을 쥐었다. 손가락 끝의 미세한 근육을 긴장시키며 지휘봉을 가슴 높이로 들어 올렸다.
순간, 리허설룸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얼어붙었다. 수현은 단상 아래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신임 콘서트마스터 한지원의 눈과 마주쳤다. 지원의 눈동자는 불안감으로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수현은 지원에게 시작하라는 무언의 눈빛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지원은 선배 단원들의 눈치를 보며 바이올린 활을 쥔 손을 바르르 떨 뿐, 선제적으로 활을 켜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오케스트라 내부의 거대한 압박이 어린 지원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수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수현이 지휘봉을 높이 치켜들었다가, 베토벤 ‘운명’의 그 유명한 첫 도입부, ‘따따따따-’의 웅장한 포문을 열기 위해 허공을 향해 날카롭게 내리꽂았다. 온 힘을 실은 첫 다운비트 신호였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 한 명의 단원도 악기를 켜지 않았다. 바이올린 활은 여전히 공중에 멈춰 있었고, 관악기 단원들은 볼을 부풀리지조차 않았다. 수현의 지휘봉 끝에서 시작된 궤적은 허공에서 쓸쓸하게 부서져 내렸다. 소리 없는 세계의 정적 속에서, 단원들은 악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차가운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조직적이고 기괴한 ‘집단 보이콧’이었다.
단상 위에서 철저히 고립된 수현의 전신이 차갑게 식어갔다. 들리지 않는 침묵의 공간이 거대한 올가미가 되어 그녀의 목을 죄어오는 듯했다.
그때, 더블베이스를 쥔 노조 지부장 박태수가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거친 입술이 수현을 향해 오만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현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그의 입술 모양을 한 글자씩 뇌리에 새겼.
“지휘자님. 우리 노조는 이사회의 정당한 검증 절차와 단원들의 동의 없이, 이사장님의 사적인 연줄로 낙하산 부임한 임시 지휘자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오케스트라는 장난감이 아닙니다.”
박태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채원이 플루트를 가볍게 돌리며 차가운 미소와 함께 입술을 움직였다.
“실력도 검증되지 않은 분이 단상에 서 계시니 연주할 맛이 안 나네요. 게다가... 귀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소문까지 도는데, 소리도 못 듣는 지휘자 아래서 우리가 어떻게 연주를 합니까? 오케스트라의 격을 위해서라도 당장 내려가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서채원의 도발적인 입술 모양이 완전히 멈추는 순간, 리허설룸의 단원들은 대놓고 어깨를 들썩이며 비웃음을 터뜨렸다. 수현은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과 조롱 섞인 눈빛만으로도 그 공간을 가득 채운 야유의 소음을 뼈저리게 감각할 수 있었다. 치욕과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눈앞이 일시적으로 흐려졌다.
하지만 수현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심폐 자율 제어 호흡법을 가동해 심장 박동을 강제로 가라앉혔다. 차도현의 금빛 감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아버지를 죽음으로 몬 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지켜내야 할 지휘대였다. 여기서 무너지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수현은 천천히 지휘봉을 내렸다. 그리고 단상 아래로 한 걸음 내려왔다.
그녀의 맨발(혹은 구두 끝)이 대리석 바닥을 딛는 진동이 리허설룸의 정적을 깨뜨렸다. 수현은 단원들의 비웃음 어린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보이콧을 주도한 수석 플루티스트 서채원의 악기 앞으로 천천히, 그러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걸어 나갔다.
수현의 서늘한 안광이 서채원의 오만한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리허설룸의 공기가 다시 한번 부러질 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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