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감옥의 문
비가 그친 서대문구 산복도로의 아침은 지독하리만치 조용했다. 늘 옥탑방 양철 지붕을 사정없이 때려대던 빗소리가 사라지자, 은수현의 세계는 다시 완전한 무음의 진공 상태로 돌아갔다.
수현은 침대 머리맡에 놓인 낡은 가죽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가방 안에는 옷가지 몇 벌과 아버지가 남긴 유품인 낡은 소리굽쇠, 그리고 어젯밤 자신의 영혼을 팔아넘기고 받아낸 ‘침묵의 쇼윈도 계약서’ 사본이 들어 있었다. 3억 원의 수표와 수호의 심장 이식 우선순위 보증서는 이미 병원 행정처로 넘어가 수호의 퇴원 명령을 철회시켰다. 동생의 생명을 구한 대가는 참혹했다. 수현은 이제 이 초라하지만 유일한 피난처였던 옥탑방을 떠나,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간 가문의 후계자이자 냉혹한 후원자인 차도현의 저택으로 이주해야 했다.
“준비는 끝나셨습니까, 은 지휘자님.”
문가에 서서 입술을 움직이는 사내는 도현의 비서실장 윤성재였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과 정중한 태도는 어젯밤의 폭력적인 대치를 완벽히 지워버린 듯했다. 수현은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귀가 들리지 않는 이후로 자신의 목소리 톤을 조율하기 어려웠기에, 불필요한 대화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수현은 가죽 가방을 어깨에 메고 문을 나섰다. 가파른 옥탑방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무릎의 타박상에서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수현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꼿꼿이 걸었다.
계단 아래에는 어둠을 머금은 듯 매끄러운 광택을 뿜어내는 검은색 세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윤 실장이 뒷좌석 문을 열자, 수현은 망설임 없이 안으로 몸을 던졌다. 차문이 닫히는 순간, 미세한 공기의 압력 변화가 고막을 가볍게 눌렀다. 엔진의 소음도, 바퀴가 젖은 아스팔트를 긁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기묘한 침묵 속에서 차는 서울의 가장 높은 곳, 성북동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차가 당도한 곳은 높은 석축과 웅장한 철문으로 둘러싸인 성북동 대저택이었다. 차에서 내린 수현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을 죽였다. 현대적인 건축 양식과 고전적인 석조가 기묘하게 어우러진 저택은 아름답기보다 위압적이었다.
윤 실장의 안내를 받아 대저택의 거대한 현관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수현은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차가운 대리석의 진동을 느꼈다. 저택 내부는 지독하리만치 고요했다. 하지만 산복도로 옥탑방의 소음 가득한 침묵과는 결이 달랐다. 이곳의 침묵은 두꺼운 벽과 최고급 방음 장치에 의해 인위적으로 박제된, 숨 막히는 침묵이었다. 사방이 대리석과 유리로 둘러싸인 공간은 미세한 공기의 흐름조차 시각적으로 감지될 만큼 정적에 잠겨 있었다.
“2층 전체가 은 지휘자님의 공간입니다. 이사장님의 특별 지시로 지휘자님이 머무시는 동안 그 누구도 허락 없이 올라가지 않을 것입니다.”
윤 실장이 입술을 천천히 움직이며 설명했다. 수현은 그의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갔다. 넓은 침실과 아늑한 거실, 그리고 그 뒤편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서재가 눈에 들어왔. 서재의 서랍과 책상들은 짙은 마호가니 원목으로 짜여 있었고, 벽면은 고전 음악 총보와 희귀 서적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서재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수현은 발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가볍고 단단한 발걸음의 떨림을 감지하고 고개를 돌렸다.
책상 뒤편의 그늘 속에서 차도현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홈웨어를 걸쳤음에도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실루엣, 포마드로 넘기지 않아 이마 위로 가볍게 흘러내린 흑발이 그의 냉혹한 얼굴에 기묘한 입체감을 더하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 손가락 사이에서 무언가 금빛으로 번쩍였다.
도현이 수현의 코앞까지 다가와 손을 뻗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는 정교하게 세공된 골드 소재의 마스터키가 놓여 있었다.
“이 저택 2층 서재와 음악실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다.”
도현의 입술이 정교하게 호선을 그리며 천천히 움직였다. 수현은 그의 입술 모양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의 깊고 차가운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네게 자유를 주는 척하는 열쇠지. 이 저택 안에서 2층은 온전히 네 구역이다. 공부를 하든, 밤새 지휘봉을 흔들든 상관하지 않아. 단, 지하 수장고에는 발을 들여놓지 마라. 그곳은 내 허락 없이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금기니까.”
수현은 차가운 골드 마스터키를 받아 쥐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금속의 차가움이 마치 낙인처럼 느껴졌다. 자유를 주는 척하는 열쇠라니, 그의 말대로 이 저택은 우아하게 포장된 금빛 감옥에 불과했다. 수현은 마스터키를 꽉 쥐며 그의 입술을 읽었다.
“감시 카메라가 도처에 깔려 있더군요. 이것이 당신이 말한 신변 보장입니까?”
수현의 도발적인 대답에 도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
“내 소유물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성의다. 한정혜의 사냥개들이 언제 이 저택의 담을 넘을지 모르니까. 불만스럽다면 그 카메라들을 피해 저택 밖으로 산책이라도 나가보든가.”
도현은 비웃음 섞인 경고를 남기고 서재를 빠져나갔다. 그의 걸음걸이가 멀어질 때마다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진동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홀로 남겨진 수현은 서재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택의 정원은 완벽하게 다듬어진 나무들과 높은 석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현은 도현의 경고가 진짜인지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녀는 마스터키를 주머니에 넣고 계단을 내려가 정원으로 향하는 유리문으로 다가갔.
그러나 유리문에 손을 대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윤 실장이 나타나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윤 실장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입술을 움직였다.
“은 지휘자님, 이사장님의 특별 지시가 있었습니다. 내일 첫 부임을 앞두고 계시니, 오늘은 저택 안에서 안정을 취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정원 외곽의 감시 센서가 예민하여 무단 외출 시 경보가 울릴 수 있습니다.”
윤 실장의 미소는 차가운 기계와 같았다. 수현은 그의 어깨 너머로 정원 곳곳을 비추고 있는 감시 카메라의 붉은 렌즈들을 포착했다.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포위망. 수현은 자신이 도현이 설계한 거대한 새장에 갇혔음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녀는 말없이 돌아서서 다시 2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밤이 깊어지자 성북동 저택은 한층 더 깊은 어둠과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수현은 침대에 걸터앉아 내일 있을 태안교향악단에서의 첫 리허설 총보를 분석하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의 악보를 시각적으로 그려내려 애썼지만, 들리지 않는 세계에서의 첫 지휘라는 압박감(`실전 압박`)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단원들의 반발, 언제 탄로 날지 모르는 청각 장애의 공포가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피어올랐다.
스스슥.
방 안의 두꺼운 카펫을 타고 미세한 마찰 진동이 전해졌다.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수현이 고개를 들자, 문가에 서 있는 도현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는 낮의 완벽한 슈트 차림 대신, 단추가 몇 개 풀어진 검은색 실크 셔츠를 느슨하게 걸치고 있었다. 그의 흐트러진 모습은 오히려 그가 지닌 원초적인 위협감을 극대화하고 있었다. 도현은 천천히 수현의 침대 앞으로 걸어와 멈춰 섰다. 그의 눈빛은 밤의 어둠보다 깊고 서늘했다.
도현이 수현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그의 입모양은 정교하고 우아했다.
“은수현. 내일부터 넌 공식적으로 태안교향악단의 임시 지휘자이자, 나의 연인이다. 언론과 이사회의 눈이 우리를 주시하겠지. 그래서 계약서 제5조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러 왔다.”
쇼윈도 계약 연인 행동 수칙 제5조.
[공식 석상에서는 도현의 손을 먼저 잡거나 그의 어깨에 기대어 다정한 연인의 모습을 연출해야 하며, 언론 노출 시 상호 합의된 멘트만 사용해야 한다.]
수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허설은 무대 위에서만 하는 줄 알았습니다. 이 야만적인 저택 안에서까지 당신의 인형극 연습을 해야 합니까?”
“야만적이라니.”
도현이 나지막이 읊조리며 수현의 앞으로 한 걸음 더 밀착했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침향과 서늘한 체온이 수현의 감각을 자극했다. 도현이 상체를 숙여 수현의 시선 높이를 맞추었다. 그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수현은 숨을 멈추었다.
“한정혜와 차태진은 뱀 같은 자들이다. 작은 틈새 하나만 보여도 내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들지. 네가 내 연인으로서 완벽하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네 동생의 심장 수술 보증서 역시 한순간에 휴지조각이 될 거다.”
그의 협박은 잔인하리만치 차분했다. 수현은 경계하며 도현의 단단한 가슴을 밀어내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도현은 그녀의 손목을 부드러우면서도 억센 힘으로 낚아채 제지했다. 도현은 수현의 양 손목을 한 손으로 결박한 채, 그녀를 침대 헤드 쪽으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두 사람의 신체가 빈틈없이 밀착되었다. 얇은 실크 셔츠 너머로 도현의 뜨거운 체온이 수현의 살갗으로 스며들었다. 수현은 호흡을 고르며 도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 눈동자에 힘을 주었지만, 밀폐된 공간이 주는 관능적인 텐션이 방 안의 공기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도현의 시선이 수현의 붉은 입술에 머물렀다가, 천천히 그녀의 귀밑 흉터 자국으로 내려갔다. 그의 눈빛에 기묘한 갈증과 집착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도현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차가운 입술이 수현의 귀밑을 지나 가녀린 목덜미에 닿았다. 다정한 연인의 포옹을 흉내 내는 듯한, 그러나 상대를 완벽히 소유하겠다는 뒤틀린 집착이 담긴 몸짓이었다.
수현은 그의 입술이 목덜미의 맥박을 짓누르는 순간,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세계 속에서, 그녀의 피부 신경은 극도로 날카롭게 깨어나 있었다.
수현의 한쪽 손바닥이 도현의 왼쪽 가슴 팍에 짓눌려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수현의 손바닥을 타고 기묘하고 이질적인 진동이 전해졌다.
도현의 가슴속에서 울리는 심장 소리였다.
그것은 평범한 남자의 건강한 박동이 아니었다. 도현의 심장은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요동치고 있었다. 불규칙하고 얕게 떨리는, 마치 언제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시한폭탄처럼 위태로운 날개짓 같은 부정맥의 진동.
수현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크게 흔들렸다. 이 냉혹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남자의 가슴 깊은 곳에, 이토록 나약하고 병든 심장이 숨겨져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것은 도현이 감추고 있는 치명적인 신체적 결함이자 약점의 징후였다.
도현은 수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감지했는지, 즉각 입술을 떼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차갑고 완벽한 포커페이스 마스크로 덮여 있었다.
도현은 수현의 손목을 놓아주며, 그녀의 귀밑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리고는 수현이 똑똑히 읽을 수 있도록 입술을 천천히 움직여 차가운 경고를 남겼다.
“내일부터 시작이다. 내 허락 없이는 그 어떤 소리도 내지 마라, 마에스트라.”
도현은 뒤돌아서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는 진동이 바닥을 울렸고, 방 안에는 다시 지독한 정적만이 남았다.
수현은 침대에 주저앉아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에는 여전히 도현의 가슴에서 전해졌던 그 기묘하고 위태로운 심장의 떨림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금빛 감옥의 문이 닫힌 첫날 밤, 수현은 자신을 가둔 간수 역시 깊은 심연의 비극을 품고 있음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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