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거래하다
철문 너머 빗속에서 걸어 들어온 남자의 차가운 구두 굽 소리가 소리 없는 지옥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은수현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들이치는 빗물 사이로 걸어 들어오는 거대한 실루엣을 응시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장판을 타고 올라오는 묵직하고 규칙적인 진동이 그의 걸음걸이를 수현의 전신에 시각적 파동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남자의 어깨 너머로 쏟아지는 장대비가 옥탑방의 가파른 문턱을 적셨다. 완벽하게 재단된 다크 네이비 슈트, 빗물에 젖어 이마 위로 서늘하게 흘러내린 흑발, 그리고 그 사이로 번뜩이는 얼음 같은 안광.
태안문화재단 이사장, 차도현이었다.
수현의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무대 뒤편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냉혹한 예술 후원자. 그가 왜 이 초라한 산복도로의 옥탑방에 나타난 것인지 수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장도식은 도현을 알아보자마자 치켜들었던 손을 멈추고 굳어버렸다. 그의 비열하게 일그러진 입술이 빠르게 움직였다. 수현은 필사적으로 그의 입모양을 읽어내렸다.
‘차, 차 이사장님? 여기는 어쩐 일로…….’
도현은 장도식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바닥에 쓰러져 찢어진 악보 더미 속에 파묻힌 수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도현의 눈동자 속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하고 어두운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도현이 가볍게 손가락을 까닥이자, 그의 등 뒤 어둠 속에서 무표정한 얼굴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도현의 오른팔이자 비서실장인 윤성재였다. 윤성재는 품 안에서 가죽 지갑을 꺼내더니 장도식의 눈앞에 수표 한 장을 내밀었다.
장도식의 눈이 탐욕스럽게 커졌다. 윤성재의 입술이 차갑고 단호하게 움직였다.
‘은태우 씨의 채무 원금과 이자 전액입니다. 영수증과 보증서 원본을 넘기십시오. 그리고 3초 안에 이 방에서 사라지지 않으면, 내일부터 영등포에서 당신들의 자리는 없을 겁니다.’
그것은 제안이 아니라 선고였다. 거대 기업 태안그룹의 자본과 무력 앞에 영등포의 삼류 사채업자 따위는 한 줌의 먼지에 불과했다. 장도식은 식은땀을 흘리며 수현의 전세 보증금 영수증과 위조된 채무 서류를 허겁지겁 윤성재에게 넘겼다. 그리고는 부하들을 이끌고 옥탑방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쾅, 하고 철문이 닫히는 진동이 바닥을 울렸다.
좁고 허름한 옥탑방 안에는 이제 오직 두 사람, 수현과 도현만이 남았다.
수현은 젖은 장판 위에 주저앉은 채, 아버지가 남긴 낡은 소리굽쇠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무릎의 타박상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올라왔지만, 눈앞의 남자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아우라 때문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도현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고가 맞춤 구두가 빗물과 먼지로 더러워진 옥탑방 바닥을 밟았다. 그는 수현의 낡은 책상 앞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아무렇지도 않게 걸터앉았다. 그의 길고 우아한 다리가 꼬아지는 모습이 정적으로 흘러갔다.
도현이 수현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수현의 귀밑, 기능하지 않는 보청기가 끼워져 있던 자리에 잠시 머물렀다 가라앉았다. 수현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여 귀를 감추려 했다. 자신의 치명적인 장애를 이 오만한 지배자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때, 도현이 품 안에서 두 가지 물건을 꺼내 낡은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첫 번째는 붉은색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황금빛 문양의 서류였다. 수호가 입원해 있는 태안의료원의 ‘VIP 심장 이식 최우선 순위 보증서’였다.
두 번째는 백지 수표였다. 그 위에는 이미 정갈한 글씨로 ‘300,000,000원’이라는 거액의 액수가 적혀 있었다.
수현의 호흡이 일순간 멎었다. 소리가 소거된 세계 속에서, 책상 위의 두 물건만이 잔혹하리만치 선명한 빛을 발하며 그녀의 영혼을 흔들었다. 저것만 있다면 수호를 살릴 수 있다. 병원에서 쫓겨나지 않고, 당장 다음 주에라도 적합한 기증자가 나타나면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최우선의 권리.
수현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이후로 제 목소리의 크기를 조율할 수 없어 비정상적으로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도현은 수현의 부자연스러운 목소리 톤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수현이 자신의 입술을 똑바로 읽을 수 있도록, 상체를 아주 미세하게 숙이며 천천히, 그리고 정확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의 입모양이 수현의 시야에 가득 찼다.
‘은수현. 3년 전 사고로 클래식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비운의 천재 지휘자.’
도현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나는 네 음악이 필요해. 그리고 네 몸도.’
수현은 도현의 노골적인 소유욕에 온몸의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내 음악은 거래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내 몸 역시 당신 같은 자의 노리개로 팔 생각은 없습니다."
‘노리개라니.’
도현이 낮게 웃었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이는 모양을 보며 수현은 그가 비웃고 있음을 직감했다. 도현이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착각하지 마라, 은 지휘자. 나는 너를 내 침대에 눕히기 위해 이 비바람을 뚫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완벽한 쇼윈도다.’
도현이 수표 옆에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계약서 한 장을 추가로 내려놓았다. 서류의 헤드라인에는 ‘태안교향악단 임시 지휘자 위임 및 쇼윈도 계약 연인 서약서’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대외적으로 넌 태안문화재단 이사장인 나의 연인이다. 공식 석상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연인의 모습을 연기해라. 그리고 무대 위에서는 내가 제공하는 지휘대에서 태안교향악단을 이끄는 내 꼭두각시 마에스트라가 되는 거다.’
그의 제안은 잔혹하리만치 완벽한 덫이었다. 수현은 도현의 제안 뒤에 숨겨진 불순한 의도를 간파하려 예리하게 질문했다.
"소리를 잃어버린 지휘자가 어떻게 오케스트라를 이끈단 말입니까? 당신은 내가 귀머거리라는 걸 알면서도 장난을 치는 건가요?"
수현이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입 밖으로 내뱉은 순간, 도현의 눈빛이 기묘하게 번뜩였다. 그는 수현의 장애를 비웃지도, 동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듯 담담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귀가 들리지 않는다면 온몸의 세포로 소리를 읽어내라. 네가 천재라면 그 정도는 해내야지. 무대 위의 네 정체를 숨겨주는 건 내 비서실과 자본이 알아서 할 테니, 넌 그저 지휘봉을 잡고 내 인형이 되면 된다.’
도현의 어투에는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지배력이 깃들어 있었다. 수현은 그의 오만한 태도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겠습니다. 수호의 목숨을 빌미로 나를 당신의 금빛 감옥에 가두려는 계약에는 서명하지 않겠어요."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도현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그의 오만한 지배욕이 이빨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도현은 말없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 그는 수현이 자신의 입술을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화면을 비스듬히 눕힌 채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 도현의 입술이 가차 없이 움직였다.
‘태안의료원 원장실인가. 지금 즉시 VIP 병동 1201호의 은수호 환자를 퇴원 조치해라. 병원비 연체 규정대로 즉각 길바닥으로 내치고, 장기기증 대기 명단에서도 영구 제외시켜.’
"안 돼!"
수현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도현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세계 속에서 그녀의 비명은 허공으로 흩어졌지만, 도현의 가죽 장갑 낀 손목을 잡은 수현의 손끝은 사시나무 떨듯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수현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동생 수호의 생명줄이 이 남자의 가벼운 입술 놀림 하나에 끊어지려 하고 있었다. 자존심? 지휘자로서의 명예? 수호의 차가운 시신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수현은 꿇어앉은 무릎의 통증조차 잊은 채, 도현의 다리 밑으로 기어가듯 매달렸다.
"제발…… 제발 멈춰 주세요. 수호는 안 돼요. 수호는 살려야 합니다……."
도현은 자신에게 매달려 우는 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승자의 잔혹함과, 마침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는 뒤틀린 만족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도현이 전화를 끊고 수현의 앞에 펜을 내려놓았다.
‘서명해라, 은수현. 네 동생의 심장과 네 지휘봉의 운명이 이 종이 한 장에 달려 있다.’
수현은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낡은 볼펜을 쥐었다. 손가락 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눈물이 계약서의 흰 종이 위로 툭, 툭 떨어지며 잉크를 흐려놓았다.
자신의 음악적 존엄성과 영혼을 이 냉혹한 후원자에게 통째로 저당 잡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수현은 이를 악물고 계약서 하단에 자신의 이름을 정갈하게 적어 내려갔.
[은 수 현]
서명이 끝나자마자 도현이 계약서를 낚아채듯 거두어들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현의 앞으로 다가왔다. 좁은 옥탑방의 벽으로 수현을 몰아붙인 도현은, 가죽 장갑을 벗어던지고 차가운 맨손으로 수현의 젖은 턱을 들어 올렸다.
도현의 얼굴이 수현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맞닿은 피부를 통해 도현의 손끝이 지닌 서늘한 온도가 전해졌다. 도현의 입술이 수현의 귓가에 닿을 듯 다가와 천천히 움직였다. 수현은 그의 뜨거운 숨결의 미세한 진동을 피부로 느끼며 그의 입술을 읽었다.
‘이제 네 몸과 음악은 전부 내 것이다. 내 허락 없이 무너지지도, 죽지도 마라.’
수현은 도현의 뒤틀린 소유욕 가득한 눈빛을 마주하며, 자신이 스스로 화려한 금빛 지옥의 문을 열고 걸어 들어왔음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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