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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온 조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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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묻은 소리굽쇠를 움켜쥔 수현의 눈빛이, 자신을 무대에 세워 준 구원자 도현을 향해 차가운 칼날이 되어 겨눠지기 시작했다.


평창동 오성환 교수의 아틀리에에서 빠져나온 수현은 성북동 대저택의 침실로 돌아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스승이 남긴 마지막 경고가 귓가에서—아니, 그녀의 소리 없는 뇌리 속에서 끊임없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도현이를 믿지 마라. 네 아버지가 떨어지던 그 지하 기계실 입구에 도현이의 차가 서 있었다.’


수현은 침대에 주저앉아 손바닥에 붉은 자국이 남을 정도로 소리굽쇠를 꽉 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손바닥을 파고들 때마다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증오와 의심의 불꽃이 뼈를 태우는 듯했다. 자신을 지옥에서 건져 올려 무대 위에 세워 준 구원자, 동생 수호의 목숨을 쥐고 있는 은인. 그 차도현이 사실은 아버지를 죽음으로 몬 장본인이거나, 최소한 비극을 방조한 공범이었단 말인가.


당장 도현의 가슴팍에 소리굽쇠를 들이밀고 진실을 요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수현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스스로를 억눌렀다. 지금 감정을 폭발시키는 순간, 수호의 VIP 병실 산소호흡기는 꺼질 것이고, 그녀가 피땀으로 되찾은 태안교향악단 지휘봉은 영원히 빼앗길 터였다.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가면을 써야 했다. 그가 설계한 화려한 금빛 감옥 속에서, 그의 자본과 권력을 빨아먹으며 심장에 칼을 꽂을 기회를 노려야 했다.


“지휘자님, 최동훈 소장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대기실 문틈으로 윤 실장의 천천히 움직이는 입술이 보였다. 수현은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고 차가운 포커페이스를 장착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태안 콘서트홀의 깊숙한 대기실 안, 어둠침침한 조명 아래 두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현의 유일한 현실적 조력자인 무대 감독 김진우, 그리고 그의 대학 선배이자 국내 최고의 음향 엔지니어인 최동훈이었다. 최동훈은 덥수룩한 수염에 피곤에 지친 다크서클을 늘어뜨린 채, 테이블 위에 검은색 카본 케이스를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진우 녀석에게 사정은 들었습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지휘자라니, 처음엔 미친 소리라고 생각했죠.”


최동훈의 입술이 무뚝뚝하게 움직였다. 그는 케이스를 열어 안쪽에 누워 있는 세련된 무광 블랙 프레임의 안경을 꺼냈다. 외관은 평범한 뿔테 안경처럼 보였지만, 안경다리와 렌즈 안쪽에 미세한 회로와 특수 칩이 정교하게 박혀 있었다.


“스마트 음향 진동 변환 안경 프로토타입입니다. 안경다리에 내장된 초소형 마이크가 오케스트라의 음향 주파수를 수집하면, 중앙 연산 칩이 이를 실시간 주파수 파형으로 변환합니다. 그리고 렌즈 안쪽의 증강현실(AR) 스크린을 통해 지휘자의 눈앞에 실시간 그래프로 투사해 주죠.”


최동훈은 안경을 수현에게 건넸다. 수현은 조심스럽게 안경을 받아 귀에 걸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순간 그녀의 시야가 기묘하게 변화했다.


소리 없는 세계 위에, 네온 블루 빛의 미세한 파동 선들이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진우가 시험 삼아 손뼉을 치자, 안경 렌즈 우측 하단에 솟구치는 날카로운 청색 주파수 그래프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이어 동훈이 피아노 건반 하나를 누르자, 렌즈 중앙에 완벽한 사인파(Sine Wave)가 물결치며 현재 음정이 정확히 'A(440Hz)'임을 시각적으로 증명해 보였다.


귀가 아닌 눈으로 소리를 읽는 하이테크 귀가 탄생한 것이다. 수현은 안경 너머로 춤추는 빛의 궤적을 보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비록 완전한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이 안경만 있다면 단원들이 반음만 틀리게 연주해도 눈으로 즉각 잡아낼 수 있었다.


“고마워요, 최 소장님. 내게 새로운 눈을 주셨네요.”


수현은 입술을 움직여 감사를 표했다. 옆에 서 있던 진우가 안도하며 미소를 지었지만, 수현의 가슴속 깊은 곳에 도사린 차가운 의심은 꺼지지 않았다. 이 장치는 완벽한 아군이지만, 무대 위에서 벌어질 적들의 음모까지 막아줄 수는 없었다.


* *


같은 시각, 강남의 어느 어두운 밀실.


가죽 소파 깊숙이 몸을 묻은 라이벌 지휘자 강민우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잔을 흔들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태안교향악단의 전담 마스터 조율사, 송유식이 땀을 흘리며 앉아 있었다. 송유식은 평생 소리를 만져온 장인이었지만, 최근 도박 빚으로 인해 사채업자들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처지였다.


강민우는 테이블 위에 묵직한 서류 가방 하나를 올려놓았다. 가방이 열리자, 그 안 가득 담긴 오만 원 권 현금 뭉치들이 송유식의 눈을 멀게 할 듯 빛났다. 강민우의 언론 매수 펀드에서 은밀히 인출된 검은 돈이었다.


“송 조율사. 평생 피아노 건반이나 두드리며 벌 수 없는 돈이지. 어떤가? 사채 빚을 전부 탕감하고도 강남에 아파트 한 채는 살 수 있는 액수인데.”


강민우의 뱀 같은 입술이 교묘하게 움직였다. 송유식은 마른침을 삼키며 현금 뭉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지휘자님.”


“어려운 일이 아니야. 내일모레 있을 데뷔 콘서트에서 은수현이 연주할 Steinway 그랜드 피아노 알지? 그 피아노의 특정 건반 장력을 미세하게 틀어놓아라. 아주 미세하게, 연주자가 치는 순간 불협화음이 나도록. 그리고 더 중요한 일이 있어.”


강민우의 눈빛이 살기등등하게 번뜩였다.


“은수현 그년이 귀가 먹었다는 소문이 파다해. 지휘대 바닥에 매설된 특수 구리 진동판에 맨발을 대고 템포를 읽는다는 제보가 있더군. 내일 밤, 텅 빈 콘서트홀 무대에 올라 지휘대 바닥을 뜯어내라. 그리고 구리판 밑에 내가 준 특수 고무 패드를 매설해. 진동을 100% 흡수해 버리는 패드지. 발바닥으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버려.”


송유식은 전신을 미세하게 떨었다. 악기를 훼손하고 무대를 사보타주하는 것은 조율사로서의 영혼을 파는 짓이었다. 하지만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채업자들의 험악한 얼굴이 떠오르자, 그는 결국 탐욕과 공포에 무릎을 꿇었다. 송유식은 떨리는 손으로 현금 가방을 끌어당겼다.


“...알겠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 *


깊은 밤, 태안 콘서트홀.


세상의 모든 불이 꺼진 거대한 극장 내부는 지독하리만치 고요했다. 무대 위에는 오직 백색의 비상등만이 쓸쓸하게 켜져 있어, 거대한 콘서트홀의 객석들을 유령의 그림자처럼 비추고 있었다.


송유식은 검은색 작업 가방을 멘 채,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무대 위로 기어 올랐다. 그의 심장은 터질 듯 요동쳤지만, 이미 돌아갈 길은 없었다.


그는 먼저 무대 중앙에 놓인 Steinway 그랜드 피아노 앞으로 다가갔다. 조율 가방에서 정밀 조율 해머를 꺼낸 그는, 피아노 뚜껑을 열고 내부의 팽팽한 현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끝이 떨렸다. 평생 소리를 아름답게 조율해 온 그의 손이, 이제는 소리를 파괴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송유식은 특정 건반의 튜닝 핀에 해머를 걸고, 미세하게 반 시계 방향으로 돌려 장력을 늦췄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티가 나지 않지만, 연주자가 건반을 세게 타건하는 순간 미세한 불협 주파수의 노이즈가 발생해 연주 전체를 망가뜨릴 터였다.


“미안하네, 베토벤...”


송유식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피아노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무대 앞쪽, 은수현이 서게 될 지휘단상으로 향했다. 송유식은 품 안에서 검은색의 두꺼운 특수 고무 패드 네 장을 꺼내 들었다. 진동을 완벽히 상쇄시키는 군사용 특수 방진 소재였다.


송유식은 지휘대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드라이버를 꺼내 지휘대 하단의 나무 판넬 고정 나사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나사가 풀릴 때마다 삐걱거리는 나무 마찰의 떨림이 무대 바닥을 타고 미세하게 번져 나갔다.


나무 판넬을 들어 올리자, 안쪽에 김진우가 극비리에 매설해 둔 0.5mm 두께의 특수 제작 구리 진동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빛을 띠는 구리판은 오케스트라의 저음부 떨림을 수현의 발바닥으로 온전히 전달해 줄 그녀의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송유식은 침을 꿀꺽 삼키며, 구리 진동판 하단의 지지대 사이에 두꺼운 고무 패드를 정교하게 끼워 넣기 시작했다. 이 패드가 매설되는 순간, 구리판이 받아들이는 무대 바닥의 모든 음향 파동은 고무의 점성에 막혀 사멸할 것이었다. 수현은 맨발로 서 있어도 완전한 무진동의 정적 속에 갇히게 될 터였다.


한편, 콘서트홀 지하 1층 조종실.


무대 감독 김진우는 야간 순찰 일지를 작성하던 중, 무대 제어 판넬의 미세한 센서 등이 깜빡이는 것을 목격했다. 무대 위 피아노 조율실과 지휘대 부근의 미세한 무게 변화 센서가 작동한 것이다.


‘이 시간에 조율실이 작동할 리가 없는데...’


진우는 의아해하며 무선 인이어를 귀에 꽂고 손전등을 쥔 채 계단을 뛰어 올랐다. 피아노 조율실의 잠금장치가 열려 있는 미세한 흠집과 텅 빈 무대 위에서 흘러나오는 옅은 그림자의 움직임이 진우의 날카로운 눈에 포착되었다. 진우는 숨을 죽인 채 무대 뒤편 어둠 속으로 은밀히 발걸음을 옮겼다.


무대 위, 어둠 속에서 송유식의 드라이버가 구리판을 짓누르는 고무 패드의 나사를 조여 가고 있었다. 쇠와 고무가 맞물리는 서늘한 마찰음이 텅 빈 콘서트홀의 침묵 속으로 기괴하게 울려 퍼졌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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