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경고
붉은 청력 부스의 철문이 열리고 대기실로 돌아오는 길, 은수현의 시야는 온통 뿌연 잿빛으로 흐려져 있었다. 귀를 짓누르던 고무 패드의 압박감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두개골을 송곳으로 쑤시는 듯한 극심한 편두통이었다.
부스 안에서 남궁혁의 무작위 난수 송출에 맞서기 위해 안구 초점 분할 추적법을 한계까지 가동했던 대가였다. 0.01초 단위로 명멸하는 기계 판넬의 미세한 반사광을 읽어내느라 시각 신경이 완전히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지휘자님, 괜찮으십니까?”
옆에서 다급하게 움직이는 윤 실장의 입술이 보였지만, 수현은 대답할 힘조차 없었다. 코끝에서 찡한 비린내가 풍기더니 이내 붉은 선혈 한 방울이 대기실 카펫 위로 툭 떨어졌다. 수현은 떨리는 손으로 코피를 훔쳐내며 고개를 저었다.
도현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감싸려 했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병원으로 가야 해. 수현아, 당장 치료를—”
수현은 도현의 단단한 손길을 차갑게 밀쳐냈다. 지금 그의 비호 아래 몸을 눕히는 순간, 자신은 영원히 그의 금빛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형이 될 터였다. 기적적으로 청력 검사를 위장 통과하며 상임지휘자 임명의 법적 명분은 지켜냈지만, 그녀의 내면은 여전히 불신과 오기로 들끓고 있었다.
“아니요. 혼자 있겠어요. 도현 씨는 의료원 서버 로그 기록이나 완벽히 지워요. 남궁혁이 역추적하기 전에.”
수현은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인 뒤, 대기실 구석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챙겨 콘서트홀 뒷문을 빠져나갔다. 도현의 사설 경호팀이 뒤를 따르려 했으나, 그녀의 매서운 눈빛에 제지당해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가 향한 곳은 서울 북편, 가파른 석축과 오래된 소나무들이 늘어선 평창동의 한적한 주택가였다. 은퇴한 원로 교수이자 그녀에게 소리 없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 준 정신적 지주, 오성환 교수의 자택 지하 아틀리에였다.
그곳은 수현이 청력을 잃고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버림받았을 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메트로놈의 진동을 느끼게 해주었던 성소(聖所)와 같은 공간이었다. 오직 그곳에서만은 보청기를 빼고 완전한 침묵 속에서 영혼을 정화할 수 있었다.
터덜터덜 고개를 숙인 채 평창동 자택의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선 수현은, 순간 발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기묘한 불협화음의 떨림에 걸음을 멈췄다.
귀가 들리지 않는 그녀에게 발바닥은 또 다른 눈이었다. 평소라면 고요해야 할 오성환 교수의 정원 바닥에서 거칠고 불규칙한 마찰의 진동이 전해지고 있었다. 무언가 깨지고, 짓밟히는 진동.
수현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고개를 들자, 단단히 닫혀 있어야 할 아틀리에의 철제 대문이 찌그러진 채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정원 디딤돌 위에는 예리하게 깨진 유리가 햇빛을 받아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침입의 흔적이었다.
심장이 가슴뼈를 부술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편두통으로 욱신거리던 관자놀이에 다시 한번 강한 통증이 몰려왔지만, 수현은 주머니 속 카본 지휘봉을 꽉 쥔 채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지하 아틀리에로 내려가는 길은 어두웠다. 공기 중에 자욱한 먼지와 쾌쾌한 냄새가 맴돌았다. 평소 스승이 가꾸던 은은한 향나무 냄새 대신, 낯선 사내들의 거친 땀 냄새와 무자비한 파괴의 흔적이 가득했다.
지하 음악실의 방음문을 밀고 들어선 순간, 수현은 가방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와장창.
바닥에 흩어진 액자 유리들이 구두 굽 아래에서 비명을 질렀다. 아틀리에는 처참하게 짓밟혀 있었다. 오성환 교수가 평생 모아 온 고전 악보집들은 갈갈이 찢겨 오선지의 파편들이 나비의 날개처럼 사방에 흩날려 있었고, 수현의 음정 기준이 되어주던 귀한 메트로놈들은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 태엽이 삐져나온 채 나뒹굴고 있었다. 벽면에 걸려 있던 대형 거울은 산산조작 나 있어, 깨진 파편 속에서 수현의 창백하고 질린 얼굴이 수십 개로 분열되어 비쳤다.
그리고 그 파괴의 중심, 쓰러진 그랜드 피아노 다리 옆에 한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선생님...!”
수현의 목구멍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목소리가 소리가 되어 나오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할 만큼 극단적인 공포였다. 그녀는 깨진 유리 파편 위로 무릎을 꿇는 것도 잊은 채 쓰러진 오성환에게로 달려갔다.
오성환 교수의 백발은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낡은 모직 코트는 사내들의 구두 굽 자국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그의 머리맡에는 둔기로 타격당한 듯한 깊은 상처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선생님, 정신 차리세요! 제발... 제발 눈을 떠보세요!”
수현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실크 스카프를 풀어 오성환의 이마를 강하게 압박했다. 붉은 피가 순식간에 하얀 실크를 검붉게 적셔갔다. 수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려 스승의 뺨 위로 떨어졌다. 소리 없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따뜻하게 품어주던 우주가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 참혹한 짓을 저지른 자가 누구인지 수현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한정혜. 우아한 가면 뒤에 잔혹한 소유욕을 숨긴 태안그룹의 실권자이자, 과거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거대 악의 축. 그녀의 심복인 한성우와 사설 정보팀이 수현의 배후를 캐기 위해 스승의 아틀리에를 습격한 것이 분명했다.
그때, 오성환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며 천천히 열렸다. 그의 깊고 인자했던 눈빛은 희미하게 흐려져 있었지만, 제자를 바라보는 순간 마지막 남은 예술가로서의 날카로운 투지가 번뜩였다.
그의 입술이 거칠고 가쁘게 들썩였다. 수현은 눈물을 닦아내며 오성환의 입술 모양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수현아... 오지 말았어야 했다...’
“선생님, 말씀하지 마세요. 지금 당장 구급차를 부를게요. 제발 버텨주세요.”
수현이 스마트폰을 꺼내려 하자, 오성환은 피 묻은 거친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쥐었다. 노인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이 수현의 뼈를 타고 전해졌다. 그것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마지막 진실을 전하려는 거장의 절박한 주파수였다.
‘...시간이 없다... 잘 들어라. 한정혜의 개들이... 내 비밀 연구 노트와... 네 아버지가 남긴 유작 악보를 찾으려 이곳을 짓밟았다...’
수현의 호흡이 멎었다. 유작 악보 ‘침묵(Silence)’. 아버지가 추락사하기 직전까지 피를 묻혀가며 그려나갔던 미완성 친필 총보였다.
‘...그 악보 속에는... 단순히 음악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은민우가 죽기 전 내게 전했던 비밀... 그 미완성 3악장의 불협화음 마디들은... 한정혜가 평생을 세탁해 온... 태안 가문의 거대한 비자금 계좌 비밀번호 암호다...’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아버지가 살해당한 진짜 이유가 바로 그 악보 속에 숨겨진 추악한 자본의 비밀 때문이었던 것이다. 수현의 가슴속에서 한정혜를 향한 핏빛 증오가 들불처럼 타올랐다.
“제가 그 악보를 지킬게요. 선생님, 그러니까 제발...”
오성환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가슴이 불규칙하게 들썩였다. 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품 안에서 차갑고 단단한 무언가를 꺼내 수현의 손바닥 위에 얹어주었다.
그것은 은민우의 유품이자, 수현의 유일한 정신적 지주였던 낡은 440Hz 표준 소리굽쇠(Tuning Fork)였다. 피습당하는 와중에도 오성환이 온몸으로 감싸 지켜낸 성물이자, 수현의 귀를 대신할 마지막 무기였다.
수현은 차가운 강철 소리굽쇠를 손바닥에 꼭 쥐었다. 쇠떨림의 미세한 온도가 그녀의 신경을 깨웠다.
그러나 오성환의 경고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의 입술이 마지막 피를 토해내듯 격렬하게 움직였다. 수현은 스승의 입모양을 프레임 단위로 읽어내려 가다, 이내 머릿속이 하얗게 빙결되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도현이를... 차도현을 믿지 마라...’
수현의 눈동자가 극도로 확장되었다.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도현 씨가 왜요?”
오성환의 눈가에서 슬픈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의 입술이 잔인한 진실의 메아리를 소리 없이 뿜어냈다.
‘...3년 전... 네 아버지가 콘서트홀 지하 무대 기계실에서... 실족사로 위장되어 떨어지던 그 비 내리는 밤... 내가 현장 대피소 뒤편에서 똑똑히 보았다... 기계실 입구 어둠 속에... 차도현의 검은색 마이바흐 차량이 서 있는 것을...’
쾅—!
수현의 뇌 속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 듯 시야가 암전되었다. 귀가 들리지 않는 그녀의 세계에, 3년 전 비 내리는 밤의 끔찍한 충돌음과 아버지의 비명 소리가 환청처럼 고막을 찢고 들어왔다.
자신을 무대로 복귀시켜 준 유일한 구원자이자, 뒤틀린 집착 속에서도 자신을 지켜주던 남자 차도현. 그가 사실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그 비극의 현장에 있었던 공범이자 방조자였단 말인가.
오성환은 수현의 손을 쥔 채 서서히 의식을 잃어갔다. 그의 손가락에서 힘이 완전히 빠져나갔다.
“선생님! 안 돼요! 눈을 떠보세요! 선생님!”
수현은 피 묻은 소리굽쇠를 손에 꽉 쥔 채, 어두운 아틀리에 바닥에서 소리 없는 절규를 내질렀다. 거울 조각 속에 비친 그녀의 눈동자는 더 이상 절망에 빠진 피해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을 파멸로 이끈 구원자를 향한, 잔혹한 복수를 맹세하는 괴물의 눈빛이었다.
Chưa có bình luận nào. Hãy là người đầu tiê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