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청력 부스
남궁혁이 차가운 철테 안경을 치켜올리며 수현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의 입술이 승리를 확신하는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움직였다.
“이사장님께서도 규정을 예외로 하실 순 없겠죠. 은수현 지휘자님, 들어가시죠.”
리허설룸의 공기는 순식간에 영하로 빙결된 듯 차갑게 얼어붙었다. 수십 명의 단원들이 숨을 죽인 채 단상 아래를 주시하고 있었고, 무대 중앙에 덩그러니 놓인 이동식 청력 검사 부스는 마치 붉은 눈을 부릅뜬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처럼 기괴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완전한 방음 설비를 갖춘 저 붉은 유리 상자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 소리 없는 세계의 진실이 발가벗겨지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수현은 등 뒤로 서늘하게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단 한 줌의 동요도 스치지 않았다. 극도로 단련된 포커페이스 완벽 제어 경지가 그녀의 미세한 동공 흔들림조차 억누르고 있었다. 수현은 구화술을 통해 남궁혁의 비열한 입술 모양을 똑똑히 읽어내며, 가볍게 턱을 치켜올렸다.
도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핏기 없는 입술이 서늘한 분노를 머금은 채 느리게 움직였다.
“남궁혁 팀장. 네가 지금 누구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는지 잊은 모양이군. 내 허락 없이 내 지휘자를 저 더러운 부스 안으로 밀어 넣을 수 있을 것 같나?”
도현의 목소리에는 단원 전체를 얼어붙게 만드는 압도적인 살기가 실려 있었다. 그의 곁에 선 최동길 변호사 역시 즉각 서류철을 제시하며 남궁혁을 압박했다. 그러나 남궁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문체부의 공식 공문을 흔들어 보였다.
“이사장님, 저 역시 재단의 보조금 30억 원이 동결되는 파국을 원치 않습니다. 은 지휘자님의 청력이 정상이라면, 이 간단한 검사를 기피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검사를 거부하는 행위 자체가 청각 장애 의혹을 공식 인정하는 꼴이 될 겁니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한정혜가 설계한 법적, 제도적 올가미는 도현의 막강한 자본과 무력으로도 쉽게 찢어발길 수 없을 만큼 정교했다. 단원들 사이에서 의심의 수군거림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수현은 시야각을 넓혀 그들의 일그러진 입술들을 읽었다.
‘정말 귀가 안 들리는 건가?’, ‘아까 리허설은 어떻게 한 거지?’, ‘가짜 마에스트라였어?’
그때, 리허설룸 구석에 앉아 땀을 닦던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피아노 건반을 난폭하게 쾅 내리쳤다. 불협화음의 둔탁한 진동이 바닥을 타고 수현의 맨발을 때렸다. 백건우는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 남궁혁을 향해 냉소적인 일침을 날렸다.
“감사팀장이라는 자가 신성한 연습실에 와서 삼류 정치질이나 하고 있군. 이 지휘자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가짜라면, 방금 전 내 변칙적인 루바토 연주를 0.01초의 오차도 없이 받아쳐 낸 그 기적은 어떻게 설명할 거지? 내 예술적 파트너를 모욕하는 짓은 참을 수 없군. 썩 꺼져라.”
백건우의 오만한 옹호는 이사회 위원들과 단원들에게 거대한 심리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세계적인 거장이 수현의 실력을 대외적으로 보증한 셈이었으니까. 덕분에 수현은 마지막 패를 던질 찰나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수현은 도현의 초조하게 흔들리는 눈빛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입술 모양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걱정 마요. 내가 증명할 테니까.’
수현은 단상 아래로 한 걸음씩 걸어 내려갔다. 그녀의 맨발이 차가운 리허설룸 대리석 바닥을 디딜 때마다, 뼈를 타고 올라오는 한기가 전신을 감싸 안았다. 그녀는 남궁혁을 지나쳐 붉은 조명이 일렁이는 청력 검사 부스의 두꺼운 철문 앞에 섰다.
철컥.
육중한 방음문이 열리고 수현이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는 순간, 세상의 모든 물리적 진동과 공기의 흐름이 일시에 소거되었다. 완전한 무음(無音)의 세계. 그곳은 옥탑방의 쓸쓸한 침묵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밀폐된 황량한 심연이었다. 사방의 붉은 유리창 너머로 남궁혁과 도현, 단원들의 모습이 마치 소리 없는 무성영화 속 유령들처럼 일그러져 보였다.
수현은 부스 중앙의 가죽 의자에 앉아 검사관이 건네는 무거운 헤드폰을 착용했다. 귀를 짓누르는 고무 패드의 압박감이 그녀의 실청 상태를 더욱 극명하게 상기시켰다. 수현의 손끝에 붉은색 반응 버튼이 쥐어졌다. 소리가 나면 버튼을 누르라는 검사관의 수신호가 유리창 너머로 전해졌다.
‘위장 청력 검사 프로토콜(Fake Hearing Test Protocol).’
수현은 뇌 신경의 모든 에너지를 시각 피질로 집중시켰. 소리가 들리지 않는 한계를 시각적 단서로 치환하여, 소리의 파동을 시각적 타이머로 해독해 내야만 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유리창 너머 제어 판넬 앞에 앉은 검사관의 손가락을 매섭게 추적했다.
검사관의 검지 손가락이 첫 번째 저음역대 주파수 버튼 위로 떠올랐다. 그의 손목 힘줄이 미세하게 수축하는 찰나— *클릭*.
수현은 뇌 속으로 정확히 0.5초의 박자를 세고는 오른손의 반응 버튼을 부드럽게 눌렀다. 외부 제어 모니터에 정상 반응을 알리는 초록색 불빛이 들어왔다. 유리창 너머 남궁혁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두 번째, 세 번째 신호 역시 검사관의 손가락 끝 근육 떨림과 어깨의 들썩임을 시각적으로 포착해 완벽한 타이밍에 버튼을 눌렀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수현은 심폐 자율 제어 호흡법을 가동해 심박수를 60bpm 이하로 유지하며 정상적인 뇌파 상태를 연출했다.
하지만 남궁혁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수현의 완벽한 반응에 의심을 품은 남궁혁이 검사관의 어깨를 밀치고 제어 판넬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검사관에게 무언가 거칠게 지시하더니, 기습적으로 고음역대 변칙 주파수 신호를 무작위로 송출하도록 기계를 조작했다.
게다가 남궁혁은 수현의 시야를 차단하기 위해 검사관과 수현 사이에 불투명 가림막을 치려 했다. 수현의 시각적 단서가 완전히 차단당할 절대적인 위기였다.
그 순간, 유리창 너머로 도현이 남궁혁의 손목을 강하게 낚아채 제압하는 모습이 보였다. 도현은 최동길 변호사를 통해 ‘피검사자의 정서적 안정을 해치는 강압적 환경 조성 금지’ 및 ‘검사 과정의 투명성 훼손’을 근거로 가림막 설치를 법적으로 저지했다. 남궁혁은 분노했지만 도현의 기세에 눌려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궁혁은 포기하지 않고 검사 기계의 난수 송출 버튼을 무작위로 연타하기 시작했다. 검사관의 손가락 움직임이 너무 빨라져 더 이상 손목 근육의 수축만으로는 타이밍을 계산할 수 없었다. 수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단 한 번의 타이밍 어긋남만으로도 그녀의 인생은 파멸이었다.
그때, 수현의 눈에 제어 판넬의 유리에 반사되는 미세한 전류 신호의 깜빡임이 포착되었다. 주파수 신호가 헤드폰으로 송출될 때마다, 검사 기계 내부의 메인보드 램프가 미세하게 과부하를 일으키며 조작 판넬 유리에 붉은 반사광을 희미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일반인의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을, 0.01초 단위의 미세한 빛의 떨림이었다.
수현은 안구 초점 분할 추적법을 극대화하여 그 붉은 반사광의 깜빡임을 시각적 타이머로 해독했다.
번쩍— *클릭*.
번쩍— *클릭*.
그녀의 손가락이 빛의 박자에 맞춰 정교한 춤을 추듯 반응 버튼을 눌렀다.
이와 동시에, 도현은 수현이 시간을 버는 동안 비밀 작전을 실행했다. 그는 비서 윤 실장에게 은밀한 수신호를 보냈고, 윤 실장은 즉각 해커 유재현에게 태안의료원 지하 2층 의무기록 보존실의 메인 서버 우회 접속을 지시했다. 유재현의 천재적인 해킹 공작으로 인해, 수현의 검사 장비가 실시간으로 전송하는 데이터 패킷이 강제로 변조되어 ‘정상 청력 주파수’ 데이터로 덮어씌워졌다.
마침내 기계의 작동이 멈췄다. 부스 내부의 붉은 조명이 꺼지고 차가운 백색광이 들어왔다.
수현은 헤드폰을 벗고 천천히 부스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극도의 시각 연산과 긴장감으로 인해 머리가 깨질 듯한 편두통이 밀려왔고, 코끝에서 찡한 비린내가 풍겼지만 그녀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우아하게 걸어 나와 도현의 곁에 섰.
징—
제어 판넬 옆의 프린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최종 검사 결과 보고서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남궁혁은 승리를 확신하는 미소를 지으며 종이를 낚아채듯 뽑아 들었다. 그러나 보고서에 인쇄된 내용을 확인한 남궁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해갔다. 종이 위에는 수현의 청력이 모든 음역대에서 완벽하게 정상임을 나타내는 굵고 선명한 파란색 그래프 선이 그려져 있었다.
남궁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수현과 검사 기계를 번갈아 쏘아보며 부르르 떨었다. 수현은 그의 경악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차갑고 우아한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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