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초의 전율
어젯밤, 텅 빈 콘서트홀에서 펼쳐졌던 그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즉흥 연주는 백건우의 오만한 콧대를 꺾어놓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천재란 본디 쉽게 굴복하지 않는 법. 수현의 완벽한 컷오프에 기선 제압을 당했던 백건우는, 날이 밝자마자 약속대로 태안교향악단 제1리허설룸에서 열린 공식 리허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맹수 같은 적대감과 기묘한 예술적 집착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정말 끝까지 가보겠다는 거군, 마에스트라.”
리허설룸의 공기는 지독하리만치 차가웠다. 단원들은 악기를 쥔 채 숨을 죽이고 있었고, 후방의 VIP 관람석에는 차태진 부이사장을 비롯한 재단 이사회 위원들이 하이에나처럼 눈을 번뜩이며 앉아 있었다. 수현이 조금이라도 실수를 저지르는 순간, 낙하산 지휘자를 끌어내리기 위한 탄핵안이 즉각 실행될 터였다.
수현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무음의 단상 위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보청기를 빼버린 그녀의 세계는 완벽한 정적의 심연이었다. 오직 발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리허설룸 나무 바닥의 미세한 냉기와, 오른손에 쥔 카본 하이테크 지휘봉의 가벼운 무게감만이 그녀가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수현은 피아노 앞에 앉은 백건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백건우의 길고 창백한 손가락이 검은 Steinway 그랜드 피아노 건반 위에 얹어졌다. 오늘 연주할 곡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다단조, 작품번호 18.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 지독하리만치 정교한 대작이었다.
백건우의 입술이 비틀린 호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수현은 구화술을 이용해 그의 입 모양을 날카롭게 해독했다.
‘당신의 그 잘난 눈이 내 템포를 얼마나 버텨낼지 지켜보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건우의 어깨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의 손목이 건반 깊숙이 가라앉는 순간, 수현의 눈앞에서 ‘0.01초 타건 시각 포착’ 능력이 활성화되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건반을 누르는 그의 손가락 끝 근육의 미세한 수축과 페달을 밟는 구두 끝의 각도가 3차원 입체 홀로그램처럼 수현의 뇌리에 시각적으로 투사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무겁고 웅장한 종소리 같은 도입부 화음이 백건우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백건우는 평범하게 연주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첫 마디를 끝내자마자 고의적으로 템포를 극단적으로 밀고 당기기 시작했다. 클래식의 규격을 완전히 파괴하는 몬스터 같은 루바토(Rubato) 폭주였다. 협연자가 박자를 이토록 변칙적으로 흔들면 오케스트라는 순식간에 파행으로 치닫고 지휘자는 통제력을 잃고 만다. 차태진 부이사장과 반대파 단원들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흔들릴 줄 알았어?’
수현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안구 초점 분할 추적법을 가동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시야각을 180도로 넓혔다. 좌측의 제1바이올린 파트부터 우측의 타악기 파트, 그리고 중앙의 백건우의 손가락 움직임까지 동시에 시각적으로 추적하기 시작했다. 파트별 호흡 추적의 경지가 뇌 신경을 극도로 자극했다.
동시에 수현은 오른손의 힘을 빼고 지휘봉을 가볍게 쥐었다. 지휘봉 손끝 미세 진동 전도법을 통해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음압과 공기의 저항 파동이 손가락 끝의 감각 세포로 흘러들었다. 현악기 활 속도 기준 데시벨 계산 기술이 작동하며, 수현의 시야 속 단원들의 활 주변에 실시간 음량 그래프가 반투명하게 투사되었다.
하지만 위기는 순식간에 찾아왔다. 백건우가 2악장의 격정적인 아르페지오로 진입하며 템포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끌어올린 것이다. 폭주하는 피아노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수현의 뇌가 시각 정보를 과도하게 연산하자, 관자놀이에 찌릿한 편두통이 치솟았다. 안구 모양근에 극심한 통증이 찾아오며 일시적으로 백건우의 손가락이 두세 개로 겹쳐 보이는 시각 장애가 발생했다.
‘안 돼. 여기서 흐려지면 끝장이다.’
수현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심폐 자율 제어 호흡법을 발동했다. 폐 속의 공기를 완전히 비워내고 심장 박동을 강제로 60bpm 이하로 가라앉혔다. 뇌로 가는 산소를 제어하자 시야의 흔들림이 멈추고 초점이 다시 칼날처럼 맞춰졌다.
수현은 단상 위에서 악장 한지원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왼쪽 눈썹을 미세하게 내리누르는 비밀 수동 신호를 보냈다. 지원은 즉각 수현의 눈빛을 포착했다. 지원의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가 뿜어내는 날카롭고 웅장한 선율을 필두로, 제1바이올린 파트가 활을 강하고 빠르게 그어 올리며 피아노의 폭주를 감싸 안았다. 수현이 계산한 데시벨 밸런스에 맞춰 현악 파트가 피아노와 완벽한 균형을 이뤄낸 순간이었다.
이제 마지막 피날레였다. 백건우의 상체가 건반 위로 깊숙이 숙여졌고, 그의 오른발 끝이 댐퍼 페달을 미세하게 떼어내는 찰나의 마찰이 수현의 눈에 포착되었다. 소리가 나기 정확히 0.01초 전.
수현의 카본 지휘봉이 허공을 찢으며 거대하게 내리꽂혔다.
번쩍—!
수현의 완벽한 다운비트 신호에 맞춰, 웅장한 금관 파트가 단 1밀리초의 오차도 없이 일제히 연주를 시작했다. 피아노의 화려한 타건과 오케스트라의 거대한 튜티(Tutti)가 완벽한 일체감을 이루며 리허설룸의 벽면을 뒤흔들었다. 소리가 소거된 세계 속에서, 기적 같은 완벽한 하모니가 대리석 바닥의 진동을 타고 수현의 맨발을 적셨다.
마지막 음의 잔향이 사라지고, 리허설룸에는 무겁고 엄숙한 정적이 찾아왔다.
백건우는 온몸이 땀에 젖은 채 피아노 건반 위에서 서서히 손을 떼었다. 그의 동공이 거대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멍하니 단상 위의 수현을 바라보았다. 악보도 없이, 오직 자신의 변칙적인 루바토와 페달링을 완벽하게 예측하고 통제해 낸 지휘자의 카리스마 앞에, 그의 오만했던 예술적 자존심은 완전히 조각나 있었다. 백건우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수현의 지휘봉 아래 굴복했음을 인정했다.
후방의 이사회 위원들은 충격으로 넋이 나가 있었고, 차태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단원들의 눈빛에는 대상을 알 수 없는 거대한 경외심이 서려 있었다.
수현은 지휘봉을 내리며 완벽한 포커페이스로 단상에서 내려왔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걸음으로 지휘자 개인 대기실로 걸어 들어갔다.
철컥, 문이 잠기는 순간.
수현의 무릎이 꺾였다. 시각 피질의 과부하로 인한 극심한 안구 통증과 어지럼증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수현은 대기실 바닥에 쓰러져 차가운 카펫을 움켜쥐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눈앞이 암전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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