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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독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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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 리허설이 남긴 열기는 쉽게 식지 않았다. 클래식 전문지 ‘아르스 노바’의 이서아 기자가 기고한 칼럼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귀가 아닌 영혼으로 소리를 빚어내는 마에스트라’, ‘기득권의 비열한 음해 공작에 실력으로 맞선 천재’라는 프레임은 강민우가 유포했던 더러운 폭행 찌라시를 단숨에 덮어버렸다. 여론은 빠르게 뒤집혔고, 은수현이라는 이름은 비운의 천재 지휘자로서 대중의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지만 성북동 대저택의 침묵 속에서 수현은 안도하지 않았다. 이사회와 한정혜, 그리고 차태진이 이대로 물러설 리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오전 리허설을 준비하던 수현의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 윤성재 비서실장에게서 온 다급한 메시지였다.


[지휘자님, 차태진 부이사장이 임시 이사회를 통해 다음 정기 연주회의 협연자로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전격 영입했습니다. 백건우는 현재 수현 님의 지휘권을 문제 삼으며 협연 보이콧을 선언한 상태입니다. 이사회는 이를 빌미로 지휘자님의 자질 검증을 다시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사장님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대기해 주십시오.]


수현의 입술이 차갑게 굳어졌다. 백건우.


쇼팽 국제 콩쿠르 준우승자이자, 클래식계의 독보적인 슈퍼스타. 그러나 동시에 타협을 모르는 극단적인 완벽주의와 오만함으로 악명 높은 사내였다. 차태진이 그를 끌어들인 의도는 자명했다. 청각 장애 의혹이 도는 임시 지휘자의 단상 아래서 세계적인 거장이 연주를 거부하게 만듦으로써, 수현의 무대를 시작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비열한 수였다.


“이사장님께서 법무팀을 통해 계약서 위반 소송을 준비 중이십니다. 백건우를 강제로 무대에 세우거나 협연자를 교체할 테니, 지휘자님은 저택에서 대기하십시오.”


대기실로 들어온 윤 실장이 도현의 지시를 전했다. 수현을 온실 속 화초처럼 보호하려는 도현의 지배적인 과보호. 하지만 수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서늘한 투지가 타올랐다.


“차도현 이사장의 뒤에 숨는 순간, 난 저들이 말하는 ‘진짜 낙하산’이 되는 겁니다. 내 무대는 내가 지킵니다.”


“지휘자님, 백건우는 보통 까다로운 인물이 아닙니다. 정면으로 부딪쳤다가 정체가 탄로 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내가 직접 가야 합니다.”


수현은 단호하게 정장 재킷을 걸쳤다. 주머니 속에 아버지의 낡은 소리굽쇠와 카본 지휘봉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도현의 비서실이 만류하는 손길을 뿌리치고, 홀로 태안 콘서트홀로 향했다.


* * *


태안 콘서트홀 메인 무대.


수천 개의 객석이 텅 빈 채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오직 무대 중앙만을 비추는 단 하나의 스포트라이트 아래 거대한 블랙 Steinway & Sons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사내의 실루엣이 보였다. 큰 키에 모델처럼 날렵한 체구,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곱슬머리 사이로 반항적인 눈빛이 번뜩였다. 백건우였다.


수현은 소리 없는 세계 속에서 천천히 무대 위로 걸어 올라갔다. 발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무대 나무 바닥의 미세한 떨림만이 그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피아노 건반 위를 폭풍처럼 휘젓던 건우의 길고 pale한 손가락이 일순간 멈췄다. 그는 고개를 들어 지휘자 단상 아래에 멈춰 선 수현을 바라보았다. 건우의 입술에 비틀린 호선이 그려졌다. 그의 입술이 느리고 오만하게 움직였다. 수현은 구화술을 이용해 그의 입 모양을 날카롭게 해독했다.


‘정말 왔네. 차도현 이사장의 금빛 장난감 씨.’


모욕적인 언사였지만 수현의 포커페이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건우를 똑바로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문만 듣고 도망치는 겁쟁이인 줄 알았는데, 연습은 하고 있었군요, 백건우 씨.”


건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팽창했다. 청각 장애가 있다는 소문과 달리, 자신의 혼잣말을 정확하게 받아치는 수현의 태도에 호기심이 일어난 듯했다. 그는 피아노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으며 입술을 놀렸다.


‘귀머거리 지휘자 밑에서 연주하는 건 내 예술에 대한 모욕이야. 당신이 진짜 지휘자라면, 내 템포를 악보 없이 완벽하게 통제해 봐. 만약 단 0.01초라도 어긋난다면, 난 이 자리에서 계약을 파기하고 떠날 테니까.’


비열한 시험이었다. 수현은 침을 삼키며 무대 바닥을 맨발로 디뎠다. 하지만 양평의 비밀 연습실과 달리, 이 메인 무대 아래에는 특수 제작 구리 진동판이 매설되어 있지 않았다. 피아노의 저음부 진동이 발끝으로 전혀 전해지지 않는, 완벽한 무음의 진공 상태였다. 오직 눈에만 의지해야 하는 극한의 한계 상황.


‘못 하겠으면 지금이라도 차도현 품으로 돌아가서 울든지.’


건우가 비웃는 얼굴로 피아노 앞에 똑바로 앉았다. 그의 긴 손가락이 건반 위로 얹어졌다.


수현은 주머니에서 카본 지휘봉을 꺼내 쥐었다. 손가락 끝의 미세한 근육을 이완시키며 공기의 저항을 느낄 준비를 마쳤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절대 템포 유지(Metronome Mind)’ 능력이 활성화되며 황금빛 박자선이 투사되기 시작했다.


건우가 건반을 내리눌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건우의 손가락 끝 근육의 수축과 손목의 회전 각도가 수현의 시야에 슬로우 모션처럼 잡혔다. 건우는 첫 프레이즈부터 템포를 기습적으로 늘이고 당기는 극단적인 루바토(Rubato)를 구사했다. 지휘자를 당황시켜 박자를 놓치게 만들려는 명백한 도발이었다.


수현의 뇌 신경이 터질 듯이 연산하기 시작했다. 눈앞이 건조해지고 관자놀이에 찌릿한 편두통이 올라왔지만, 그녀는 동공 하나 흔들리지 않고 건우의 손가락을 추적했다. 0.01초 타건 시각 포착.


건우의 왼손 새끼손가락이 저음 건반을 때리고 오른손이 화려한 아르페지오를 그리며 올라가는 순간, 수현은 머릿속의 메트로놈 박자를 강제로 건우의 불규칙한 움직임에 동조시켰다. 건우의 어깨 근육이 이완되며 첫 프레이즈의 종지부를 찍으려는 찰나-


수현의 지휘봉이 허공을 날카롭게 가르며 내리꽂혔다.


탁.


건우가 마지막 건반에서 손을 떼는 바로 그 찰나, 수현의 지휘봉 끝이 정확히 정지하며 완벽한 컷 신호를 보냈다. 단 0.01초의 오차도 없는, 소름 끼치도록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건우의 어깨가 일순간 굳어졌다. 그의 눈동자에 거대한 충격이 스쳐 지나갔다. 악보도 없이, 자신의 변칙적인 루바토를 완벽하게 예측하고 잡아낸 지휘자의 카리스마에 기선 제압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이내 건우의 입가에 광기 어린 흥미가 감돌았다. 그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수현을 향해 짐승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입술이 속삭이듯 움직였다.


‘제법이네, 마에스트라. 그럼 이건 어때?’


백건우가 비웃는 얼굴로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에도 없는 초고난도 쇼팽 에튀드를 기습적으로 연주하기 시작한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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