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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의 진흙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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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을 텐데. 넌 내 허락 없이 다쳐서도 안 된다고.”


지휘자 개인 대기실의 밀폐된 공기 속에서 차도현의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은수현의 귓가를 스쳤다. 수현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턱을 움켜쥔 도현의 손가락 끝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 그리고 그의 입술 모양이 그리는 잔혹하고도 명확한 궤적이 뇌리에 실시간으로 해독되어 박혔다.


도현의 얼굴은 코앞까지 밀착되어 있었다. 수현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손바닥이 도현의 단단한 가슴팍에 닿아 있었다. 얇은 셔츠 원단 너머로 느껴지는 도현의 심장 고동은 비정상적으로 빠르고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부정맥. 수현은 그의 심장이 지닌 기묘한 결함을 손끝의 촉각으로 다시 한번 인지했다. 이 오만하고 냉혹한 지배자 역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품고 있는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었다.


수현은 도현의 손가락을 천천히 떼어내며 한 걸음 물러섰다. 찢어진 셔츠 깃 사이로 드러난 쇄골뼈가 차가운 대기실 공기에 노출되어 가볍게 떨렸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얼음처럼 투명하고 단단했다.


“계약서 제12조, ‘을의 예술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위협으로부터 갑은 을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조항을 이행하신 것뿐입니다, 이사장님. 감사할 필요는 없겠죠.”


도현은 수현의 차가운 태도에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뒤틀린 소유욕과 집착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피 묻은 가죽 장갑을 굳이 주워 올리지 않은 채, 등을 돌려 대기실을 나갔다. 육중한 방음문이 닫히는 미세한 진동이 수현의 맨발을 타고 올라왔다. 완전한 침묵이 다시 대기실을 지배했다.


* * *


다음 날 아침, 폭풍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수현은 성북동 대저택 2층 서재에서 태블릿 PC의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화면 가득 자극적인 헤드라인들이 붉은 글씨로 도배되어 있었다.


[단독] 태안교향악단 리허설룸 폭행 사태… 낙하산 지휘자 은수현의 배후는 누구?

[충격] ‘회장님의 연인’ 은수현, 사채업자 폭행 방조 의혹… 클래식계의 타락

[여론] “Sponsor-backed Maestra”… 청각 장애 의혹 은수현, 당장 사퇴하라!


화면 속 동영상은 교묘하게 편집되어 있었다. 장도식과 그의 부하들이 난입해 행패를 부린 앞부분은 완전히 잘려 나갔고, 오직 도현의 경호팀이 그들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장면과 은태우가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 애원하는 비참한 모습만이 강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찢어진 셔츠를 입고 도도하게 서 있는 은수현의 모습이 ‘폭력을 사주한 오만한 권력자’의 프레임으로 박제되어 있었다.


라이벌 지휘자 강민우의 짓이 분명했다. 수현의 재능을 질투해 그녀를 파멸시키려 혈안이 되어 있던 그가, 합주실의 혼란을 틈타 영상을 확보하고 황색 언론에 유출한 것이 틀림없었다.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수현은 화면을 켰다. 동생 은수호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였다.


[누나, 인터넷 뉴스 봤어… 괜찮은 거지? 나 때문에 누나가 힘든 일 겪는 거 싫어. 미안해.]


수호의 창백하고 야윈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선천성 심장 질환으로 병실에 누워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고 있는 수호. 도현이 제공한 VIP 병실과 치료비는 수호의 생명줄이었고, 동시에 수현을 옭아매는 가장 무거운 족쇄였다. 여론의 돌팔매질 속에서 자신이 무너진다면 수호의 치료 역시 중단될 터였다. 수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절대로 무너질 수 없었다.


그때 서재 문이 열리며 윤성재 비서실장이 들어섰다. 그의 입술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수현은 집중하여 그의 입 모양을 해독했다.


“은 지휘자님. 이사장님께서 홍보팀과 법무팀을 동원해 관련 보도를 강제로 통제하고 계십니다. 포털 사이트의 영상은 1시간 내로 모두 삭제될 예정입니다. 당분간 저택 밖으로의 외출을 삼가해 주십시오.”


도현의 방식이었다. 돈과 권력으로 언론의 입을 틀어막고, 자신을 저택이라는 우아한 감옥에 가두어 보호하려는 뒤틀린 비호.


수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눈빛에 서늘한 거부감이 서렸다.


“윤 실장님. 이사장님께 전해 주세요. 언론을 강제로 막을수록 의혹은 더 부풀어 오를 뿐이라고. 난 동정받는 꼭두각시 인형이 되어 숨어 지낼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지휘자님, 지금 밖은 언론사 기자들로 난장판입니다. 정식 임명 전에 매장당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정면 돌파해야 합니다.”


수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낙하산 논란의 천재성 승화 전략’이 정교하게 톱니바퀴를 맞물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대중이 자신을 ‘권력의 힘으로 올라선 가짜 아티스트’라 비판한다면, 오직 눈앞에서 펼쳐지는 압도적인 실력과 카리스마로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면 그만이었다.


수현은 즉시 자신의 유일한 정론 언론 인맥인 클래식 전문지 ‘아르스 노바’의 이서아 기자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서아는 강민우의 찌라시 공작에 맞서 수현의 진정성을 믿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정직한 언론인이었다.


* * *


오후 2시, 태안교향악단 제1리허설룸.


평소라면 악기 조율 소리로 가득해야 할 공간이 오늘만큼은 수십 명의 취재진과 평론가들이 뿜어내는 기괴한 열기와 수군거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는 기자들의 눈빛에는 자극적인 특종을 낚아채겠다는 탐욕이 번들거렸다.


수현은 리허설룸 뒤편 대기실에서 거울을 바라보았다. 짙은 차콜 정장 슈트, 단정하게 뒤로 묶어 올린 흑발. 그녀는 귀밑에 끼워져 있던 보청기를 미련 없이 빼내어 화장대 위에 내려놓았다. 완전한 무음의 세계가 그녀를 감싸 안았다.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공포였지만, 동시에 외부의 모든 잡음과 비난으로부터 자신을 완벽하게 격리해 주는 방패이기도 했다.


그녀는 주머니 속 아버지의 낡은 소리굽쇠를 만지며 심박수를 조절했다. 포커페이스 완벽 제어.


“지휘자님, 준비되셨습니까?”


대기실 문가에서 윤 실장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인 뒤, 당당하게 리허설룸의 문을 열고 걸어 나갔.


수현이 리허설룸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사방에서 눈이 멀 것 같은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폭발했다. 하얀 빛의 소용돌이가 그녀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기자들이 마이크를 들이밀며 일제히 입술을 거칠게 놀리기 시작했다. 수현은 구화술을 이용해 그들의 입모양을 날카롭게 해독해 나갔.


‘은수현 씨! 차도현 이사장과의 스폰서 관계가 사실입니까?’

‘어제 리허설룸 폭행 사건을 직접 지시하신 겁니까?’

‘청각 장애인이라는 찌라시가 돌고 있는데, 들리지 않는 귀로 어떻게 지휘를 한다는 말입니까?’


악의적이고 자극적인 질문들이 소리 없는 칼날이 되어 수현의 눈을 통해 뇌리로 날아와 박혔다.


대기실 구석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라이벌 지휘자 강민우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한 기자에게 눈짓을 보냈다. 강민우에게 매수당한 그 기자가 슬그머니 수현의 측면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인간의 가청 영역을 넘나드는 초고주파 음향 송출기가 쥐어져 있었다.


삐이이이이-!


물리적인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수현의 귀밑 림프선과 측두엽에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기습적으로 가해졌다. 고주파가 만들어낸 공기의 미세한 파동이 그녀의 손상된 청신경을 직접 타격한 것이다. 수현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확장되며 전신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뇌리 속에 구축해 둔 템포의 메트로놈이 흔들리고 이명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들리지 않는 척 연기하는 건가? 아니면 진짜 귀머거리인가?’


측면에서 기자가 송출기를 든 채 수현의 동태를 매섭게 관찰하고 있었다. 미세한 찡그림 하나만으로도 난청 사실이 폭로될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수현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심폐 자율 제어 호흡법을 발동했다. 폐부의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며 심장 박동수를 강제로 60bpm 이하로 가라앉혔다. 동공의 흔들림을 억누르고, 입가에 우아하고 여유로운 포커페이스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주파 테러의 통증을 정신력 하나로 지워버린 것이다. 기자는 당황한 듯 송출기를 거두었다.


윤 실장이 기자들의 무례한 질문 공세를 차단하기 위해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앞으로 나서려 했다. 수현은 가볍게 손을 들어 윤 실장의 개입을 제지했다. 도현의 힘을 빌려 이 상황을 모면한다면, 자신은 평생 ‘권력의 그늘에 숨은 약자’로 남을 터였다.


수현은 기자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매서운 안광이 질문을 던지던 기자들의 눈동자를 하나하나 꿰뚫었다. 오직 눈빛만으로 언론인들의 기세를 완벽하게 장악하는 침묵의 지배력이었다. 리허설룸의 시끄러운 수군거림이 수현의 압도적인 카리스마 앞에 일순간 굳어버렸다.


수현은 입을 열지 않았다. 변명도, 해명도 필요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지휘단상 위로 걸어 올라갔다. 맨발로 나무 단상을 딛는 순간, 차가운 질감이 발바닥을 통해 온몸의 신경을 깨웠다. 단원들은 이미 악기를 쥔 채 수현을 주시하고 있었다. 악장 한지원이 스트라디바리우스를 턱에 괸 채 결연한 눈빛으로 수현과 시선을 맞추었다.


수현은 보면대 위에 놓인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의 총보를 응시했다. 이미 머릿속에 완벽하게 시각화되어 있는 악보였다.


그녀는 오른손을 뻗어 카본 하이테크 지휘봉을 쥐었다. 탄소 섬유의 차갑고 가벼운 촉감이 손가락 끝의 감각 세포를 자극했다. 수현은 지휘봉을 높이 들어 올렸다.


수많은 취재진의 카메라 플래시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터지며 리허설룸 전체를 하얀 광기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 눈이 멀 것 같은 하얀 빛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은수현은 오직 자신만의 침묵의 우주를 지배하며 지휘봉 끝을 날카롭게 겨누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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