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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음 없는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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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침묵할 때, 그것은 고요함이 아니라 물리적인 압박감으로 다가온다.


은수현은 닳아빠진 메트로놈을 바라보았다. 좌우로 흔들리는 금속 추가 오선지 위를 기어가듯 불규칙하게 시각을 쪼개고 있었다. 소리는 없었다. 귀를 찢을 듯한 이명조차 거세된 완전한 무음(無音). 그것은 거대한 점토가 귓구멍을 막고 머리통 전체를 짓누르는 것 같은 둔탁한 압력이었다. 과거에 그녀가 지휘봉을 휘두르면 백 명의 단원이 빚어내던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선율은 이제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파편화된 환청에 불과했다.


수현은 메트로놈의 플라스틱 몸체에 손가락 끝을 가져다 대었다. 미세하게 전해지는 태엽의 덜컥거림.


‘60bpm.’


귀가 아닌 손끝의 촉각이 박자를 읽어냈다. 그것이 지금 수현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주파수였다.


이곳은 서울 서대문구 산복도로의 끝자락에 위치한 가파른 옥탑방이었다. 한때 카네기홀의 붉은 벨벳 무대 위에서 전 세계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던 천재 지휘자의 거처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초라하고 습한 방구석. 벽지는 곰팡이로 얼룩져 있었고, 방 한구석에는 낡은 악보 더미와 기능하지 않는 보청기 상자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쌓여 있었다.


수현은 고개를 돌려 미닫이문 너머의 작은 방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수현의 유일한 피붙이이자 현실적 족쇄인 남동생 은수호가 누워 있었다. 선천성 심장 질환을 앓고 있는 수호는 병원복이 헐렁할 정도로 마른 체구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침대 옆 협탁에는 태안의료원에서 보낸 ‘VIP 병동 치료비 연체 고지서’가 놓여 있었다.


[미납 금액: 54,200,000원]

[지급 기한 경과 시 퇴원 및 이식 대기 명단 제외 조치 예정]


붉은색 경고 도장이 수현의 심장을 예리하게 찔렀다. 매달 5천만 원에 달하는 치료비와 이식 대기 자금은 수현이 가진 모든 명예와 자산을 갉아먹은 지 오래였다.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독립 자산은 이 초라한 옥탑방의 전세 보증금 3천만 원이 전부였다. 그것마저 빼앗기면 수호는 병원 길바닥으로 나앉아 서서히 죽어갈 것이 뻔했다.


바로 그때였다.


수현은 귀로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발바닥이 닿아 있는 낡은 장판을 통해 강력한 파동이 전해졌다.


쿵! 쿵!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가파른 옥탑방 계단을 거칠게 밟고 올라오는 발걸음의 진동이었다. 본능적인 공포가 수현의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수현은 반사적으로 서랍을 열어 아버지가 남긴 유품인 낡은 소리굽쇠를 손에 꽉 쥐었다. 차가운 스틸의 감각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콰쾅!


낡은 알루미늄 철문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안쪽으로 사정없이 꺾여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순간, 밖에서 들이치는 비바람의 차가운 습기가 수현의 뺨을 때렸다.


검은색 가죽 재킷을 걸친 거구의 사내들이 좁은 옥탑방 안으로 거침없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중심에 선 사내, 화려한 금목걸이를 목에 걸고 문신이 가득한 팔을 드러낸 사채업자 두목 장도식이었다.


장도식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이빨을 드러냈다. 그의 입술이 거칠게 움직였다. 수현은 극도로 집중하며 그의 입술 모양을 읽어내려 애썼다.


‘은수현... 은태우 그 쓰레기 새끼가... 돈을 안 갚아서...’


삼촌 은태우. 아버지가 사망한 후 수현 남매의 명의를 도용해 불법 사채를 끌어 쓰고 도망친 파렴치한 인간. 장도식은 품 안에서 붉은색 가압류 딱지 뭉치와 은태우가 작성한 허위 연대보증 서류를 꺼내 들었다.


그의 부하들이 수현의 책상을 발로 차며 방을 난장판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남긴 낡은 첼로 활이 바닥에 떨어져 짓밟혔고, 수현이 밤새 분석하던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총보가 사방으로 찢겨 흩날렸다.


수현은 이를 악물고 장도식의 앞으로 걸어 나갔. 목소리를 내야 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이후로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크고 부자연스럽게 나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기가 죽어서는 안 되었다.


"당장 나가세요! 은태우 씨가 빌린 돈이지, 저와는 상관없는 채무입니다! 이 보증서도 위조된 거예요!"


장도식은 수현의 목소리를 듣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발음이 미세하게 뭉개지고, 목소리의 톤이 지나치게 일정하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장도식은 수현의 눈앞에서 손뼉을 크게 짝, 하고 쳤다.


수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반사적인 동공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장도식의 비열한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야, 이년 봐라? 귀가 먹었네.’


그는 부하들을 바라보며 낄낄거렸다. 수현의 심장이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들켰다. 자신이 완전한 청각 상실 상태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이 짐승 같은 사채업자에게 노출된 것이다.


장도식은 거칠게 수현의 가방을 빼앗아 바닥에 쏟아버렸다. 가방 속에서 수호의 병원비 영수증과 수술 대기 보증서 사본이 쏟아져 나왔다. 장도식은 비웃으며 수호의 보증서를 구두 굽으로 짓밟았다.


‘귀머거리 지휘자 년이 동생 살리겠다고 발악을 하네. 야, 돈 안 되면 이 방 보증금이라도 압류 걸어.’


그의 입술 모양을 읽은 수현의 눈이 뒤집혔. 보증금 3천만 원. 그것은 수호의 생명줄이었다. 수현은 장도식의 손에 들린 전세 보증금 영수증 원본을 빼앗기 위해 몸을 날렸다.


"안 돼! 그거 놔! 당장 놓으라고!"


수현은 장도식의 가죽 재킷을 붙잡고 거칠게 매달렸다. 하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는 세계에서의 대결은 잔혹했다. 귀밑 전정기관의 손상으로 인해 균형 감각이 완벽하지 못한 수현은 장도식이 가볍게 어깨를 밀치자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바닥의 모서리에 짓눌린 무릎에서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뺨 위로 눈물이 번졌지만, 수현은 비명을 지르는 대신 바닥에 떨어진 소리굽쇠를 움켜쥐고 다시 일어섰.


"경찰에... 경찰에 신고할 거야!"


수현이 낡은 휴대전화를 집어 들려 하자, 장도식이 한발 빠르게 수현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머리가 뒤로 꺾이며 가해지는 끔찍한 통증 속에서도 세상은 여전히 무음이었다. 장도식은 수현의 손에서 휴대전화를 빼앗아 바닥에 사정없이 내던졌다. 액정이 산산조각 나며 으스러지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장도식은 수현의 턱을 움켜쥐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의 입술이 살기등등하게 움직였다.


‘귀머거리 년이 까불고 있어. 조용히 지장 찍어. 안 그러면 네 동생 링거 줄을 당장 뽑아버릴 테니까.’


수호의 목숨을 담보로 한 잔혹한 협박. 수현은 전신을 뒤흔드는 무음의 공포(Deaf Panic) 속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고, 머릿속에서는 과거 사고 당시의 날카로운 타이어 마찰음과 비바람 소리가 환청처럼 소용돌이쳤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그녀의 숨통을 조여왔다.


장도식은 수현의 포기를 확신한 듯,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뺨을 내리치기 위해 굵은 손바닥을 치켜들었다.


바로 그 절체절명의 순간.


쿵!


옥탑방의 낡은 철문이 찌그러지는 진동이 수현의 맨발 바닥을 타고 강렬한 전류처럼 흘러들었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거대하고 차가운 실루엣의 남자가 비 내리는 어둠을 뚫고 등장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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