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된 식수와 역삼투 필터
카엘 경비대장이 이끄는 야간 수색대가 쓸고 간 바르도의 비밀 제도실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가짜 하중 계산서의 찢어진 양피지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고, 테이블은 뒤집혀 있었다.
에단은 욱신거리는 왼쪽 뺨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카엘의 단단한 가죽 장갑에 얻어맞은 자리가 벌갛게 부어올라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는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진짜 설계도와 주조된 H형강은 바닥의 화강암 비밀 틈새 속에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쥐새끼 슬라이를 광산 노역으로 치워버린 것도 수확이었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한스가 깨진 잉크병을 치우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전직 감시원 게일 역시 에단의 뺨에 흐르는 피를 보며 낮게 혀를 찼다.
“노예의 신분이란 참으로 가혹하군. 요새를 살릴 진짜 기술을 가진 자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다니.”
“상관없소, 게일.”
에단은 차갑게 찢어진 입술을 닦아냈다.
“기득권의 오만함은 언젠가 그들의 발목을 잡는 법이니까. 카엘과 그 밑의 서기 놈은 자신들이 대단한 오류를 잡아냈다고 믿고 안심했을 거요. 그게 중요하지.”
그가 품속에서 바르도의 은제 자를 꺼내어 상태를 확인하려던 찰나였다. 아지트 구석의 낡은 침상에서 격렬한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쿨럭! 쿨럭! 오, 오빠…….”
에단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여동생 릴리였다. 슬래그 구역의 가혹한 매연 때문에 늘 기관지가 약했던 아이였지만, 오늘의 기침 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쇳소리가 섞인 거친 호흡 끝에 릴리가 바닥으로 붉은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릴리!”
에단이 단숨에 침상으로 달려가 동생을 부축했다. 릴리의 이마는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눈가와 목덜미에는 기괴한 푸른색 핏줄이 방사형으로 돋아나 있었다. 단순한 폐 질환이 아니었다.
“이건…… 마력 중독의 징후잖아?”
게일이 릴리의 목덜미를 보며 경악했다.
에단은 다급히 빈민가의 의사 레오나를 불렀다. 야간 순찰의 눈을 피해 아지트로 달려온 레오나는 릴리의 상태를 진찰하더니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력 독수 중독(魔力 毒水 中毒)이야. 지금 제8구역 전체에 이 증상으로 쓰러지는 노동자가 수십 명을 넘어서고 있어. 단순한 전염병이 아니라, 하층민들이 마시는 식수원 전체가 오염된 게 틀림없어.”
“식수원이 오염되다니요? 지하수 정화조가 있지 않습니까?”
한스의 물음에 레오나가 냉소적인 독설을 뱉었다.
“그 정화조의 필터가 완전히 파손된 상태야. 보급 감독관 토마스 그 탐욕스러운 놈이 정화 필터 교체 예산을 통째로 횡령해서 상층부의 유흥비로 날렸거든. 필터가 가동을 멈추자 요새 상층부에서 내려오는 마력 폐수와 결로수가 그대로 하층민들의 우물로 유입된 거지. 하층민들은 이것도 모르고 신의 저주라며 간이 예배당에서 기도만 올리고 있어.”
에단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토마스…… 예산을 횡령해 필터를 방치했다고?’
그는 품속에서 은제 자를 꽉 쥐었다. 마력은 신비로운 기적이자 요새를 띄우는 동력이지만, 가공되지 않은 순수 마력 입자가 인체에 직접 유입되면 세포를 변이시키고 장기를 파괴하는 치명적인 독극물이 된다. 릴리의 쇠약한 몸은 그 독성을 버텨내지 못하고 있었다.
“치료법은 없는 겁니까?”
“일반적인 약초 처방이나 민간요법은 아무런 효과가 없어. 오히려 마력 독성과 결합해 환자의 상태를 악화시킬 뿐이지. 유일한 해결책은 체내의 마력 농도를 희석할 ‘순수한 무마력 정화수’를 대량으로 투입하는 것뿐이야. 하지만 하층에는 그런 깨끗한 물이 단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아.”
레오나의 말은 사형 선고와 같았다.
에단은 침대에 누워 신음하는 릴리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빠를 믿는다는 듯 그의 거친 손을 꼭 쥐고 있는 여동생. 현대 대한민국에서 초고층 빌딩과 대형 교량을 설계하던 엘리트 토목공학자였던 그였다. 수많은 인명을 책임지는 구조물을 설계하던 이성이 그의 머릿속에서 차갑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법의 저주가 아니다. 이건 유체 내부의 미세 입자 오염 물질일 뿐이다. 걸러낼 수 있어.’
그의 뇌세포가 현대의 정수 기술을 인출해 냈다.
‘역삼투압(Reverse Osmosis) 방식이다.’
일반적인 여과 필터로는 물 분자보다 미세한 마력 이온 입자를 걸러낼 수 없다. 하지만 물의 자연스러운 삼투압을 거스르는 강한 압력을 가해, 미세한 다공성 반투막(Semi-permeable Membrane)을 통과시키면 순수한 물 분자만을 분리해 낼 수 있다. 이세계의 마법적 독수 역시 물리적인 질량을 지닌 미세 입자의 집합체에 불과하다는 것이 에단의 판단이었다.
“한스, 당장 대원들을 소집해라. 지하수 정화조 구역으로 간다.”
“하지만 형님, 정화조 구역은 토마스 감독관의 사설 경비병들이 통제하고 있습니다! 무단으로 침입했다간……”
“내 동생이 죽어가고 있어.”
에단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거절할 수 없는 압도적인 중압감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제8구역의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물을 고치지 못하면 보강 공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모두가 죽는다. 강제로라도 점거한다.”
에단은 빌리와 마르코를 불렀다. 거구의 화부 빌리와 철공 마르코는 에단의 지시를 받자마자 무거운 강철 쇠지렛대와 해머를 들고 앞장섰다.
지하수 정화조 구역은 제8구역 하부의 어두운 석조 돔 내부에 위치해 있었다. 천장에서는 상층부의 폐수가 떨어지는 배관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중앙의 거대한 청동제 정화조 탱크에서는 불길한 청색 광을 내뿜는 탁한 오수가 부글거리며 넘쳐흐르고 있었다.
“누구냐! 이곳은 토마스 감독관님의 허가 없이는 출입할 수 없다!”
초소를 지키던 토마스의 사설 경비병 세 명이 석궁을 겨누며 소리쳤다.
“비켜라.”
빌리가 앞으로 나서며 거대한 석탄 삽을 바닥에 쾅 내리쳤다. 마르코 역시 벌갛게 달아오른 철골 조각을 손에 쥔 채 경비병들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수십 명의 굶주리고 병든 하층 노동자들이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경비병들은 하층민들의 압도적인 기세와 분노에 질려, 감히 석궁 시위를 당기지 못하고 무기를 버린 채 달아났다.
“정화조를 확보했습니다, 형님!”
한스가 외쳤다. 에단은 즉시 정화조 탱크로 다가가 수동 점검 해치를 열었다.
철컥, 콰아아아!
해치가 열리자마자 뿜어져 나오는 유독한 마력 증기에 에단은 기침을 터뜨렸다. 그의 ‘공학적 직관’이 발동했다. 시야가 적색과 청색의 선으로 변하며 정화조 내부의 유체 흐름이 가시화되었다.
탱크 내부의 다단계 석영 필터와 활성탄 필터 베드는 오랫동안 교체되지 않아 시커뎠고, 마력 찌꺼기가 엉겨 붙어 완벽하게 폐쇄되어 있었다. 오수는 필터를 거치지 않고 바이패스 관을 통해 그대로 하층 식수 우물로 흘러들고 있었다.
‘단순히 필터를 청소하는 것으론 안 돼. 마력 이온을 흡착하고 걸러낼 새로운 다공성 반투막 필터를 급조해야 한다.’
에단은 뒤따라온 고철 수집 노예 폭을 불렀다.
“폭! 당장 쓰레기 매립지로 가서 미세 고철 모래(Fine Scrap Sand)를 최대한 긁어모아 와라. 입자가 가장 고르고 녹슬지 않은 고순도 철가루여야 한다.”
“폭, 잘한다! 쥐새끼처럼 빠르게 다녀오겠다!”
폭은 커다란 가죽 자루를 짊어지고 어둠 속으로 번개처럼 사라졌다.
동시에 에단은 괴짜 연금술사 레이먼드의 은신처로 향했다. 레이먼드는 독특한 구리 보호 안경을 쓴 채 기괴한 화학 약품 냄새를 풍기며 실험에 열중하고 있었다. 에단은 그가 연구하던 마력 유황 정제법의 화학 반응식을 칠판에 적어 보이며 제안했다.
“레이먼드, 당신이 가진 물질 중 마력 입자와 강하게 이온 결합을 일으켜 침전시키는 특수 흡착제가 필요하오. 내게 그걸 제공해 준다면, 당신이 그토록 고민하던 유황 정제 과정의 열역학적 평형 공식을 완성해 주겠소.”
레이먼드는 에단이 제시한 수식을 보자마자 안경을 치켜올리며 비명을 질렀.
“이, 이 아름다운 수식은 뭐지? 마법의 파동을 분자 단위로 계산해 내다니! 당장 가져가게! 내가 가진 고성능 다공성 세라믹 분말과 마력 흡착 촉진제를 전부 주겠네!”
레이먼드가 건넨 특수 배합제와 폭이 쓰레기장에서 목숨 걸고 수거해 온 미세 고철 모래가 정화조 광장에 모였다.
에단은 정화조의 압력 탱크를 개조하기 시작했다. 역삼투압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물에 강한 물리적 압력을 가해야 했다. 그는 보일러실에서 가져온 수동식 고압 펌프를 정화조의 1차 유입관에 결속했다.
“한스, 칼의 대장간에서 가져온 조밀한 청동 격자판을 가져와라. 그 사이에 레이먼드의 세라믹 분말과 폭의 고철 모래를 다단계로 다져 넣는다. 층의 두께는 정확히 50밀리미터, 밀도는 균일하게 유지해야 해. 단 한 곳이라도 틈이 생기면 삼투압 장벽이 무너진다.”
에단의 지시에 따라 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청동 격자판 사이에 다공성 세라믹과 고철 모래가 층층이 쌓이며, 이세계 최초의 ‘물리-화학적 다단계 역삼투 필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문제는 정화조 내부의 고압 챔버에 이 필터를 고정하는 작업이었다.
“내가 들어가서 고정하겠소.”
에단이 고압 방호복도 없이 탱크 내부로 몸을 밀어 넣으려 하자, 레오나가 그의 팔을 잡았다.
“미쳤어? 정화조 내부는 마력 독성이 가장 강한 곳이야. 방호 장비도 없이 들어갔다간 피부가 녹아내릴 수도 있어!”
“시간이 없소. 릴리의 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있단 말이오.”
에단은 레오나의 손을 뿌리치고 정화조 해치 내부로 진입했다.
욱ーーー!
탱크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청색 광과 함께 찌르는 듯한 열기가 전신을 덮쳤다. 에단은 ‘마력 파동 수치화’ 감각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공중에 떠도는 독성 입자들의 흐름을 읽어냈다.
그는 이중 격자 필터를 챔버 중앙의 고정 홈에 밀어 넣었다. 볼트를 조여야 하는 순간, 손끝이 마력 독수에 닿았다.
치이이익!
“으아아악!”
피부를 태우는 듯한 극심한 부식 통증이 오른손을 타고 올라왔다. 살점이 타들어 가고 푸른색 마력 흉터가 실시간으로 손등에 새겨지는 지옥 같은 고통이었다. 에단은 이빨이 깨질 정도로 악물며 비명을 참아냈다. 그는 찢어진 어깨 상처와 손가락의 통증을 이성적인 계산력으로 억누르고, 왼손으로 밸브 렌치를 잡아 돌려 필터 하우징을 완벽하게 밀봉했다.
탁! 철컥!
“필터 고정 완료! 해치를 닫고 펌프를 가동해라!”
에단이 정화조 밖으로 기어 나오자, 빌리와 마르코가 즉시 수동 고압 펌프의 레버를 온몸으로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쿵! 쿵! 쿵!
펌프가 작동하며 정화조 내부의 압력이 급격히 상승했다. 에단의 시야 속에서, 청색의 독성 오수가 강한 유압에 밀려 에단이 급조한 다단계 필터 장벽으로 밀려 들어가는 모습이 가시화되었다.
‘버텨라…… 제발.’
압력 게이지의 바늘이 위험 수위까지 치솟았다. 청동 격자판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레이먼드의 특수 배합제와 고철 모래가 형성한 조밀한 반투막은 수십 기압의 유압을 단단히 지탱해 냈다.
그리고 마침내, 필터의 반대편 출구 배관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부글거리던 불길한 청색 광이 서서히 지워지더니, 유리처럼 맑고 투명한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쪼르르르, 콸콸콸!
“무, 물이…… 물이 맑아졌어!”
한스가 배출구에서 쏟아지는 물을 손으로 받아 올리며 경악 어린 함성을 질렀.
레오나는 다급히 마력 측정 시약을 물에 떨어뜨렸다. 시약의 색상이 무반응을 뜻하는 맑은 녹색으로 유지되었다.
“마력 잔류 농도 0.01ppm 이하…… 완벽한 무마력 정화수야! 신이시여, 어떻게 마법도 없이 이런 깨끗한 물을 만든 거지?”
레오나의 외침에 광장에 모여 있던 하층민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
에단은 오른손의 통증을 잊은 채, 정화수를 가죽 병에 담아 아지트로 달려갔. 그는 숨을 헐떡이는 릴리의 입가에 조심스럽게 정화수를 흘려 넣었다.
꿀컥, 꿀컥.
순수한 물이 릴리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아이의 목덜미를 뒤덮고 있던 불길한 푸른색 핏줄이 눈에 띄게 옅어지기 시작했다. 거칠던 호흡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뜨겁던 이마의 열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빠…… 시원해……”
릴리가 천천히 눈을 뜨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에단은 그제야 긴장이 풀려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오른손의 화상 흉터가 쓰라렸지만, 동생을 살려냈다는 안도감이 전신을 채웠.
식수 정화의 기적은 순식간에 슬래그 구역 전체로 퍼져나갔다. 정화된 물을 마신 하층민들은 마력 중독에서 회복되며 에단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에단 님이 우리를 구하셨다!”
“슬래그의 구원자이시여!”
노예들이 에단을 신처럼 숭배하기 시작하는 거대한 열기가 어두운 지하 광장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에단은 기뻐할 수 없었다. 정화조 구역의 철문 밖에서, 낯선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색 정밀 톱니바퀴 문양이 수놓인 상층부 기술관의 제복을 입은 여성. 한 손에는 특제 마법 현미경을 든 채, 정화조에서 나오는 깨끗한 물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관찰하고 있는 그녀는 상층부 귀족 금속 학회 소속의 연구원, 노라(Nora)였다.
노라의 차가운 눈동자가 에단의 정수 필터를 거쳐, 그의 오른손에 새겨진 마력 화상 흉터로 향했다. 새로운 감시의 눈길이 에단의 목덜미를 죄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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