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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용융의 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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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이이이잉!


외벽의 칼바람은 데드 앵커의 철갑을 때리며 여전히 사납게 울부짖고 있었다. 까마득한 구름바다 너머로 지상의 붉은 황무지가 얼핏 보였다가 사라지는 아찔한 고공의 사선. 에단은 통증으로 비명을 지르는 왼쪽 어깨를 오른손으로 움켜쥔 채, 방금 손에 넣은 종이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더글라스가 도망치며 흘린 양피지 조각.


그 축축하게 젖은 종이 위에는 에단이 매일 밤 촛불을 켜고 요새의 하중 분산 공식을 계산하던 ‘바르도의 비밀 제도실’ 입구가 붉은 잉크로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이, 이건…….”


옆에서 함께 대피로를 살피던 비계 설치공 피터가 조각을 슬쩍 보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형님, 그 비밀 아지트의 위치 아닙니까? 저놈들이 어떻게 여길……!”


“조용히 해라, 피터.”


에단은 비틀린 어깨의 통증을 곱씹으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머릿속의 슬라이드 룰이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사보타주 전문가 더글라스가 이 지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배후인 헤르만 기술관과 세바스찬 감시관이 이미 에단의 뒤를 밟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들이 당장 군대를 이끌고 아지트를 습격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확실한 반역의 물증과 진짜 설계도를 통째로 장악해 에단 일행을 일망타진하기 위함이리라.


‘그렇다면, 이 위기를 역으로 이용한다.’


에단의 안대를 끼지 않은 오른쪽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냉혹하게 빛났다.


“칼, 마르코. 당장 소형 해치를 통해 안으로 복귀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알았네, 에단! 어서 움직이지!”


대장장이 칼과 마르코가 에단의 양옆을 부축했다. 왼쪽 어깨 인대가 늘어나 왼팔을 전혀 쓸 수 없는 에단에게 외벽의 경사는 지옥 같았으나, 이성적인 의지력이 육체의 고통을 강제로 억누르고 있었다. 그들은 데드 앵커 하부의 좁은 유지 보수용 해치를 통해 요새 최하층의 어두운 배수 터널 안으로 신속히 철수했다.


터널 내부의 매캐한 슬래그 매연이 코를 찔렀다. 에단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피터와 대원들을 바라보았다.


“피터, 루시와 토비를 긴급 호출하십시오.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아지트로 침투해야 합니다.”


“아지트로 말입니까? 거긴 이미 들통난 곳 아닙니까?”


“그러니까 가는 겁니다. 진짜 도면들과 바르도의 일지첩, 그리고 숀 영감의 유품들은 전부 칼의 대장간 비밀 틈새로 수송할 겁니다. 그리고 그 텅 빈 제도실에는…….”


에단은 찢어진 입술을 깨물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데니스 그 기회주의자 놈이 물어갈 아주 탐스러운 미끼를 남겨둘 겁니다.”


“미끼라니요?”


칼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오일러의 좌굴 공식(Euler's Buckling Formula)에서 분모에 있는 유효 길이의 제곱(Square) 항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설계도입니다. 겉보기에는 완벽한 구조 보강도처럼 보이지만, 실제 하중을 받는 순간 기둥을 소성 변형 단계로 밀어 넣어 순식간에 붕괴시키는 시한폭탄이지요. 데니스가 신분 상승을 위해 내 도면을 훔치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기꺼이 훔쳐 가게 놔둘 겁니다.”


에단의 설명에 칼과 마르코는 소름이 돋는 듯 마른침을 삼켰다. 공학적 수치를 속인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지 그들은 이미 기어 스퀘어에서 목격했기 때문이다. 에단은 그 길로 비밀 제도실로 향했다.


***


심야의 바르도 비밀 제도실.


화강암 벽 틈새의 비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한 참나무 제도판과 낡은 도구들이 에단을 맞이했다. 왼팔을 쓸 수 없는 에단은 한스의 도움을 받아 바르도의 일지첩과 진짜 보강 설계도들을 신속히 가죽 자루에 담았다. 요새의 무게 중심을 가리키는 숀 영감의 녹슨 나침반도 품속 깊이 안전하게 수납했다.


그리고 에단은 오른손만으로 연필을 쥐고, 미리 준비해 둔 누런 양피지 위에 가짜 도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사사삭.


기어 스퀘어의 중앙 지지 기둥을 보강하는 도면이었다. 겉보기에는 가세판의 각도와 H빔의 배치가 우아하게 정렬되어 있었으나, 하단부의 응력 계산식 분모에서 ‘제곱’ 표시가 교묘하게 빠져 있었다. 이 도면대로 시공하면 기둥의 실제 좌굴 임계 한계는 설계 수치의 4분의 1 이하로 떨어진다.


“이걸 참나무 제도판 위에 자연스럽게 펼쳐놓으십시오. 촛불은 켜둔 채로요. 도망치다 미처 챙기지 못한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에단의 지시에 한스가 침을 삼키며 가짜 도면을 배치했다.


진짜 자재들과 도면을 칼의 대장간 비밀 틈새로 완전히 이송한 지 불과 몇 시간 뒤, 예상대로 데니스가 피터 서기의 묵인 하에 비밀 제도실에 잠입해 그 가짜 도면을 훔쳐 갔다는 루시의 제보가 들려왔다. 헤르만과 세바스찬은 에단의 아지트를 확보했다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을 터였다.


하지만 에단은 안심할 수 없었다. 그들이 아지트 노출이라는 카드를 아끼고 있다는 것은, 하층 구역을 통째로 침수시켜 자신들을 학살할 더 거대하고 즉각적인 사보타주 공작을 배후에서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안에 현실로 다가왔다.


***


며칠 뒤, 요새 최하층 제8구역의 심장부인 ‘3번 보일러실’ 부근.


이곳은 요새의 양력을 유지하기 위해 거대 부유석을 자극할 고압 증기를 생산하는 핵심 동력원이었다.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증기와 100도가 넘는 열기 때문에 숨을 쉴 때마다 폐부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열 지대였다.


에단은 어깨의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단단한 가죽 끈으로 왼팔을 몸에 밀착 고정시킨 채, 보일러실 주변의 철골 구조를 순찰하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오일 관리인 샘과 야근 전담 보일러 감시인 잭이 바짝 따르고 있었다.


웅ーーーーーー.


기계실 가득히 울려 퍼지는 거대한 동력 기어들의 회전음 사이로, 에단의 발밑에서 이상한 파동이 감지되었다.


‘……진동이 다르다.’


에단의 ‘미세 진동 이상 감지’ 패시브 능력이 뇌 신경을 날카롭게 자극했다. 요새 전체에 흐르는 정상적인 기계적 진동 주파수는 보통 50Hz에서 60Hz 사이의 일정한 맥동을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부츠 밑창을 타고 올라오는 진동은 주파수 10Hz 미만의 기분 나쁜 극저음 저주파(Hz)였다.


쿵. 쿵. 쿵. 쿵.


마치 거대한 괴수가 심장을 불규칙하게 뛰는 듯한 기괴한 맥동.


“샘, 잭. 이리 와서 압력 게이지 기록판을 보여주십시오.”


에단의 목소리가 급격히 무거워졌다. 잭이 다급히 황동 클립보드에 기록된 일일 압력 변화 수치 장부를 에단에게 내밀었다.


“에단 형님, 게이지 수치는 정상 범위 내에 있습니다. 3번 보일러의 주 압력은 12기압을 유지하고 있고, 증기 배출량도 평소와 다름없습니다만…….”


에단은 마력 파동 수치화 능력을 발동해 기록판의 숫자들을 훑어내렸다. 그의 눈에 미세한 수치적 모순들이 포착되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주 압력은 정상처럼 보이지만, 우회 바이패스(Bypass) 라인의 미세 압력이 0.12바(bar)씩 주기적으로 강하하고 있어요. 배출량이 일정한데 바이패스의 압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내부에서 증기가 흐르지 못하고 어딘가 갇혀서 누적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 하지만 밸브는 다 열려 있는데요?”


샘이 기름통을 든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순한 노후화나 오일 부족으로 인한 기어 마찰음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마찰음은 고주파의 쇳소리를 냅니다. 하지만 이 진동은 배관 내부의 유체 흐름이 인위적으로 왜곡되면서 발생하는 맥동(Pulsation)입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바이패스 차단 밸브를 건드렸어요.”


에단은 확신했다. 이것은 단순한 기계 고장이 아니었다. 누군가 요새 하부를 완전히 녹여버릴 인위적인 동력로 파괴 공작, 즉 사보타주를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잭, 샘. 당장 보일러실 배후의 어두운 배관망으로 진입합니다. 경비대에게는 알리지 마십시오. 이미 그들과 한패일 테니까요.”


에단은 오른손으로 수동식 밸브 차단 기어 렌치를 꽉 쥐고, 3번 보일러실 배후의 비좁고 어두운 파이프 미로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사방에서 고압 증기가 쉭쉭 소리를 내며 뿜어져 나와 시야를 가렸고, 열기는 이미 정상 범위를 초과해 방호복 내부를 땀으로 적셨다. 에단은 ‘증기 기류 흐름 독해’ 능력을 발휘해, 뜨거운 증기의 온도와 기압 분포를 피부로 느끼며 배관 내부의 압력 이상 부위를 역으로 추적해 나갔.


터널 깊숙한 곳, 붉은 경보등조차 닿지 않는 어두운 구석의 배관 접합부에 도달했을 때였다. 에단은 바닥에 엎드려 손가락으로 배관 이음새를 쓸어내렸다.


손끝에 끈적하고 차가운 액체가 묻어났다.


마력 파동 수치화 능력을 통해 액체의 성분을 감지한 에단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건…… 상층부의 특수 공작 부대에서나 사용하는 고융점 방수 윤활유입니다. 최하층 노예들의 대장간에서는 절대로 구할 수 없는 물건이지.”


그 윤활유의 흔적은 3번 보일러의 가장 핵심적인 비상 감압 장치, 즉 ‘압력 제어 밸브’를 향해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귀족들의 배후 사주를 받은 베테랑 파괴 공작원 이반이 이곳에 침투해 작업을 벌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의 목적은 단순한 고장이 아니었다. 요새 하부를 통째로 날려버릴 대참사를 유도하는 것.


에단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3번 보일러의 거대한 주철 감압 파이프 앞으로 다가갔.


주변의 열기는 이미 150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왼팔의 통증이 열기와 만나 비명을 질렀으나, 에단은 숨을 죽인 채 청동 청진기를 꺼내 감압 파이프 표면에 가져다 대었다. 귀를 밀착시키는 순간, 파이프 내부의 미세한 주파수 파동이 그의 뇌리로 직접 전달되었다.


금속관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불길한 금속음.


*틱.*


*틱.*


차가운 기계식 제어핀이 고의로 해제되어 완전히 이탈하는 소리였다. 압력을 제어하던 마지막 안전장치가 풀려나간 것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동시에 보일러 내부의 압력 게이지 바늘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적색 한계선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이미 늦었다. 대참사의 서막을 알리는 용융의 불길이, 보이지 않는 심연 속에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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