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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번 도크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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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번 도크…….”


대장간의 뜨거운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에단은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칼의 용광로가 내뿜는 붉은 아지랑이가 아른거렸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제8구역의 가장 어둡고 은밀한 경계선을 향해 있었다.


세무관 찰스의 압류 소동을 법과 숫자로 완벽하게 잠재운 것은 일시적인 승리에 불과했다. 진짜 문제는 요새의 비틀려가는 척추, 즉 수직 하중 전달 기둥이었다. 요새가 15도 기운 채 버텨내면서 중심 기둥에 가해지는 비틀림 전단 응력(Torsional Shear Stress)은 이미 임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기둥 표면의 미세한 균열들이 쩍쩍 갈라지며 내는 비명은 에단의 ‘미세 진동 이상 감지’ 능력을 타고 매 순간 그의 신경을 긁어댔다.


‘H빔만으로는 부족해. 기둥의 비틀림 변형을 강제로 억제하려면 외부에서 기둥 전체를 강하게 묶어줄 고인장 탄소 와이어가 필요하다.’


하지만 하층의 철강 유통망을 꽉 쥐고 있는 중간층의 독점 상인 그레고리는 이미 헤르만 기술관의 사주를 받아 하층으로 향하는 모든 고급 자재를 동결한 상태였다. 합법적인 경로로는 단 일 센티미터의 와이어도 구할 수 없었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뿐이었다. 요새 건설 초기에 사용된 후 영구히 폐쇄되었다는 금단의 구역, ‘버려진 0번 도크’를 털어내는 것.


심야의 차가운 매연이 자욱한 슬래그 구역 외곽의 폐쇄 격벽 앞.


“정말 이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겁니까, 형님? 여긴 제국 경비대조차 귀신이 나온다며 순찰을 꺼리는 곳입니다만…….”


더벅머리에 둥근 안경을 쓴 한스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황동제 정밀 계산척을 꼭 쥔 채 에단의 눈치를 보았다. 그의 귀에 꽂힌 제도용 연필이 그의 불안한 심경을 대변하듯 가늘게 흔들렸다.


“한스, 겁먹지 마라. 귀신보다 무서운 건 내일 아침 당장 우리 머리 위로 떨어질 수십만 톤의 화강암 대들보다. 기둥이 무너지면 귀신이 되기도 전에 납작한 고기반죽이 될 테니까.”


에단의 곁에 선 사내가 낮게 읊조리며 씩 웃었다. 가죽 코트를 걸치고 삼각모를 깊게 눌러쓴 사내, 자유 밀수 비행선 ‘블랙 윈드호’의 선장 드레이크였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날카롭게 빛나는 외눈으로 주변의 경계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드레이크는 지상과 요새를 오가며 밀수를 하는 베테랑답게, 공중 요새의 위험한 틈새를 드나드는 데 도가 터 있었다.


“드레이크 선장, 준비는 되셨습니까?”


“물론이지, 에단 선생. 당신이 제안한 비행선 균형 제어법 공식 덕분에 우리 블랙 윈드호가 지난번 폭풍우를 깃털처럼 가볍게 돌파했거든. 그 대가로 이 정도 위험한 밤마실쯤은 기꺼이 동행해 주지. 게다가 고대 에테리아 제국의 자재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라니, 밀수업자로서 침이 고이지 않을 수 없잖아?”


드레이크가 허리춤에 찬 구형 자가발전 조명등의 태엽을 가볍게 감았다. 징, 징 하는 태엽 소리가 어둠 속에 나직하게 울렸다.


에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서 붉은빛이 감도는 묵직한 구리 열쇠를 꺼냈다. 선대 설계 노예 바르도가 목숨처럼 아끼며 숨겨두었던 유품, ‘폐쇄 구역 비밀 마스터 키’였다.


세월의 흔적으로 푸른 녹이 슬어 있었지만, 열쇠 끝부분의 톱니들은 기하학적인 규칙성을 지닌 채 정교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에단은 바르도의 은제 제도 자를 꺼내 열쇠의 눈금과 격벽 해치의 중앙 실린더 홈을 대조했다.


‘바르도의 일지에 적힌 대로군. 단순한 회전식 열쇠가 아니다. 내부의 핀들이 특정 압력과 기하학적 각도로 정렬되어야만 해.’


에단은 은제 자의 끝부분으로 해치 표면의 먼지를 긁어냈다. 화강암 벽면과 두꺼운 주철 격벽이 만나는 경계선에 미세한 구리 슬롯이 모습을 드러냈다.


딸칵.


에단이 마스터 키를 슬롯 깊숙이 밀어 넣었다. 회전시키려 하자 강한 저항감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내부의 스프링 장력이 엄청났다. 에단은 공학적 직관을 발동했다. 그의 시야에 격벽 내부의 잠금장치 실린더가 적색과 청색의 응력선으로 가시화되었다.


‘내부의 핀이 총 여섯 개. 세 번째와 다섯 번째 핀이 맞물리는 각도가 15도 경사져 있군. 요새의 기울기 때문에 중력 방향이 뒤틀려서 실린더 축이 미세하게 편심(Eccentricity)되어 있어.’


“한스, 내 은제 자의 끝부분을 잡고 3시 방향으로 미세하게 2밀리미터만 당겨라. 축의 편심을 수동으로 보정해야 해.”


“예, 예! 형님!”


한스가 침을 꿀꺽 삼키며 에단의 지시에 따라 은제 자를 붙잡고 힘을 조절했다. 에단은 그 미세한 틈을 타 마스터 키를 시계 방향으로 지그시 돌렸다.


스으으으으응.


묵직한 금속 마찰음과 함께, 수십 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고대 주철 격벽 내부에서 거대한 강철 실린더들이 차례로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찰칵, 찰칵, 찰칵! 여섯 개의 핀이 완벽하게 정렬되는 경쾌한 타격음이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스화아아아아ーーー!


격벽 틈새로 오랫동안 갇혀 있던 고압의 질소 가스와 먼지가 하얀 수증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차갑고 비린 dead air가 에단의 뺨을 스쳤다. 수십 년간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심연의 냄새였다.


“열렸다. 들어가자고.”


드레이크가 조명등의 셔터를 열어 전방을 비추었다. 가늘고 날카로운 황색 광선이 어둠을 찢어발기며 내부의 광경을 드러냈다.


그곳은 거대한 동굴이었다. 요새의 외벽과 바로 맞닿아 있는, 지름이 수백 미터에 달하는 반원형의 공동(Cavity). 천장에는 거대한 강철제 가이드 레일과 도르래 체인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고, 바닥에는 먼지를 두껍게 뒤집어쓴 고대 비행선들의 잔해가 뼈대만 남은 채 뒹굴고 있었다.


“세상에…….”


한스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경악 어린 탄성을 질렀다.


“이게 전부 고대 에테리아 제국의 정비 도크란 말입니까? 요새 상층부의 기록 보관소에서도 이런 대규모 시설에 대한 언급은 없었는데…….”


“귀족 놈들이 일부러 지워버린 거겠지.”


에단은 먼지 여과 마스크를 고쳐 쓰며 차갑게 말했다.


“자신들이 천공의 신성한 지배자라고 주장하려면, 이 요새가 과거 지상의 기술자들이 강철과 볼트를 조여 만든 ‘비행선 정비 방주’였다는 사실을 숨겨야 했을 테니까. 저 정비용 기중기들을 봐라. 마법이 아니라 철저한 기하학적 도르래와 기어로 움직이도록 설계되어 있어.”


에단 일행은 두껍게 쌓인 gray dust를 밟으며 도크 내부로 깊숙이 걸어 들어갔. 바닥에 쌓인 먼지는 마치 눈밭처럼 발목까지 푹푹 빠졌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뿜어지는 미세한 석탄 가루와 산화된 철가루 때문에 조명등의 빛줄기가 흐릿하게 산란되었다.


드레이크가 조명등을 천장으로 치켜올렸다.


“에단 선생, 저길 봐. 우리가 찾던 게 저기 매달려 있는 것 같은데?”


빛줄기의 끝에 거대한 강철제 기중기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기중기의 메인 드럼 윈치에는, 어둠 속에서도 기이한 광택을 내뿜는 검붉은색 와이어 타래가 칭칭 감겨 있었다.


에단은 마력 파동 수치화 능력을 발동했다. 그의 눈앞에 와이어의 분자 구조와 인장 강도가 가시적인 수치로 변환되어 나타났다.


‘고인장 탄소 와이어(High-Tensile Carbon Wire)……!’


수치상으로 평방밀리미터당 무려 2200메가파스칼(MPa)의 인장 강도를 견디는 괴물 같은 자재였다. 현대의 초고층 현수교에 쓰이는 최고급 강선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아니 오히려 미세한 마력 전도율까지 가미되어 진동 흡수력은 그 이상인 고대의 유물이었다.


“완벽합니다.”


에단의 목소리에 이례적으로 흥분이 서렸다.


“저 와이어만 있으면 수직 하중 기둥의 비틀림 변형률을 제로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기둥 양끝에 저 와이어를 대각선으로 감고, 턴버클 방식으로 인장력을 가하면 편심 하중을 완벽하게 상쇄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저 높은 곳에 매달린 수십 톤짜리 와이어 타래를 어떻게 아래로 내린단 말입니까? 기중기의 전원은 이미 꺼진 지 반세기는 된 것 같은데.”


한스가 고개를 들어 까마득한 높이의 기중기를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전원이 꺼졌다면 수동으로 내리면 된다.”


에단은 기중기 지지 기둥 하단부로 걸어가 주철로 된 수동 기어 크랭크 핸들을 찾아냈다. 먼지와 굳어버린 그리스로 가득 차 있었지만, 기어의 이빨들은 상한 곳 없이 완벽한 정밀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드레이크 선장, 한스. 크랭크의 기어비를 확인해라. 1대 64의 다단계 감속 기어다. 우리가 인력으로 돌려도 충분히 저 와이어 드럼의 브레이크를 풀고 하강시킬 수 있어. 다만, 마찰 저항을 줄여야 하니 대장간에서 가져온 윤활유를 기어 맞물림 부위에 주입해라.”


“오케이, 기계라면 나도 비행선 돌리며 질리도록 만져봤지.”


드레이크가 허리춤에서 특제 오일 펌프를 꺼내 기어 이빨 사이에 정밀하게 오일을 분사했다. 한스는 에단의 지시에 따라 슬라이드 룰을 돌리며 와이어가 하강할 때 발생할 자유낙하 가속도와 드럼의 제동 토크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형님, 현재 마찰 계수를 0.15로 잡고 계산하면, 드럼 브레이크를 풀었을 때 수동 제동 레버에 가해야 하는 힘은 약 250뉴턴(N)입니다. 빌리 같은 장사가 없어도 우리 셋이서 체중을 실으면 충분히 제어할 수 있습니다!”


“좋아, 한스. 아주 훌륭한 계산이다. 역시 내 제자답군.”


에단이 한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자, 한스의 둥근 안경 너머 눈빛이 긍지와 열정으로 반짝였다. 무지한 노예 청년이었던 그가 이제는 스스로 역학 계산을 해내며 에단의 든든한 조수로 성장하고 있었다.


에단은 기중기 하부의 수동 제동 레버에 손을 얹었다.


철컥, 철컥.


오랫동안 굳어 있던 쇠붙이들이 기름을 머금고 부드럽게 맞물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단과 드레이크가 크랭크 핸들에 손을 얹고 힘을 모았다.


“하나, 둘, 셋…… 돌려!”


끄으으으으으으응ーーー!


도크 전체를 울리는 묵직한 금속성 진동과 함께 천장의 거대 드럼이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수십 년의 먼지를 털어내며, 검붉은 고인장 탄소 와이어의 끝부분이 지상을 향해 서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하강하는 와이어를 바라보며 에단은 머릿속으로 수직 기둥의 보강 공정을 실시간으로 시뮬레이션했다.


‘기둥의 중심축에서 외곽으로 45도 각도. 비틀림 전단 응력이 가장 극대화되는 궤적을 따라 이 와이어를 나선형으로 감아올린다. 그리고 하단부의 턴버클 조인트를 조여 와이어에 사전 인장력(Prestressing)을 인가하는 거야. 그러면 기둥에 가해지는 편심 모멘트가 물리적으로 상쇄되면서…….’


와이어 타래의 끝부분이 마침내 바닥에서 불과 2미터 높이까지 내려왔다. 굵기가 에단의 손목만 한, 수십 가닥의 탄소 섬유와 강철선이 정교하게 꼬인 와이어의 실물이 황색 조명등 빛을 받아 둔탁한 금속광을 흘렸다.


“성공이군! 진짜로 이걸 내릴 줄이야!”


드레이크가 흥분한 얼굴로 장갑을 낀 손을 뻗어 와이어의 끝부분을 잡으려 했다.


“기다리십시오, 선장! 함부로 손대지 마세요!”


에단이 다급히 소리쳤다. 그의 공학적 직관이 갑자기 극도로 차가운 적색의 경고선을 시야 사방에 뿌려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도크 내부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입김이 하얗게 얼어붙을 정도의 한기가 순식간에 공동 전체를 지배했다.


위이이이이이이잉ーーー!


도크 구석, 거대한 고철 더미와 먼지 속에 반쯤 파묻혀 있던 높이 3미터짜리 거대 주철 실린더 장치에서 기분 나쁜 구동음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단순한 기계 잔해가 아니었다.


스스스스스.


두꺼운 먼지 장막이 흩날리며, 거미를 닮은 다각 보행형 고대 방어 기계(Defense Machine)의 흉포한 윤곽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계의 중앙 전면에 박혀 있던 거대한 원형 유리 렌즈가 파지직하는 마력 스파크와 함께 핏빛으로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붉은 안구 센서가 번쩍이며 에단 일행을 조준하는 순간, 도크의 모든 출입 해치가 굉음과 함께 자동으로 하강하며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해 버렸다.


쿵! 쿵! 쿵!


사방이 밀폐된 차가운 어둠 속에서, 고대 방어 기계의 붉은 눈빛만이 에단 일행의 머리 위를 잔혹하게 내려다보았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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