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의 흔적, 우물의 독쟁이
돌이가 내민 가죽 주머니 속에서 음산한 초록색 독가루가 흘러내렸다.
태벽은 주먹에 감긴 흑철 사슬을 팽팽하게 당겨 쥐며 차가운 살기를 뿜어냈다. 흙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약손 사부의 침술로 간신히 골독(骨毒)의 역류를 억눌렀으나, 태벽의 몸에서는 여전히 서늘한 냉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피부 아래 도드라진 검붉은 철색 무늬가 그의 기이한 골격의 변화를 증명하듯 요동쳤다.
“형, 우물가 주변의 진흙 바닥을 조사하다가 이 흔적을 발견했어요.”
돌이가 쇳가루로 얼룩진 뺨을 훔치며 낮게 속삭였다. 소년의 눈에는 두려움 속에서도 영리한 안광이 빛나고 있었다.
“이 독가루는 광산에서 간수들이 폭동을 모의하는 노예들을 은밀히 중독시킬 때 쓰던 ‘만성 마비독’의 찌꺼기예요. 물에 닿으면 특유의 비린내를 풍기는데, 손가락으로 가루를 만지면 피부에 지워지지 않는 초록색 물이 들어요. 요새 내부의 식수원에 이걸 풀려던 놈이 분명히 이 성채 안에 숨어 있어요.”
태벽은 묵직한 침묵 속에서 탁자 위에 놓인 사공혁의 부러진 추풍검 파편을 내려다보았다. 황실 추격대의 위협이 성문 밖을 옥죄어오는 이 시점에, 내부에서 우물에 독을 풀려던 배신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성채의 숨통을 끊어놓겠다는 적들의 비열한 수작이었다.
“내부의 쥐새끼를 먼저 잡지 않으면, 성문은 안쪽에서부터 열린다.”
태벽의 갈라진 쇳소리가 어두운 흙방을 차갑게 울렸다. 무릎 관절을 찌르는 시린 만성 관절통이 하체를 무겁게 짓눌렀으나, 그는 무통식(無痛式)을 전개하여 몸의 고통을 이성 아래로 억눌렀다. 태벽은 바닥에 놓인 백 근 무게의 대장간 망치를 오른손에 고쳐 잡았다. 쇠사슬이 손목에서 쩔렁이며 거친 마찰음을 냈다.
“돌이, 범인을 색출할 방법이 있느냐.”
“네, 형. 철기방 단원들과 탈출한 노예들을 한자리에 모을 구실이 필요해요. 마침 아침 배급 시간이니, 주조소의 열기로 가마솥에 끓인 따뜻한 죽을 나누어 주겠다고 해요. 배고픈 사람들은 무조건 모이게 되어 있어요. 제가 배급 줄 앞에서 사람들의 손을 하나하나 검사할게요.”
돌이의 제안은 치밀했다. 태벽은 고개를 끄덕이며 흙방을 나섰다. 수백 근에 달하는 강철 골격의 질량이 실린 그의 발걸음이 성채 복도의 석판을 쿵, 쿵 흔들었다.
잠시 후, 성채 중앙 연무장 마당에 가마솥의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다. 배고픔과 추위에 지친 철골동맹의 노예들과 철기방 단원들이 그릇을 든 채 길게 줄을 섰다. 돌이는 배급대의 맨 앞에서 그릇을 건네받으며, 사람들의 손을 은밀하고도 신속하게 훑어보았다.
“다음 사람, 손을 내미세요. 상처가 있으면 약손 사부님이 조제한 고약을 발라드릴게요.”
돌이는 영리하게 구실을 대며 사람들의 손가락 끝을 살폈다. 수십 명의 노예들이 지나가고, 마침내 회색 마의를 걸친 왜소한 사내 하나가 돌이의 앞에 섰다. 사내는 유독 초조한 기색으로 자신의 양손을 소매 안으로 깊숙이 밀어 넣은 채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과거 광산에서 최현도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배신자 삼수의 잔당, ‘임가(林哥)’였다.
“손을 내미세요.”
돌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임가는 침을 꿀컥 삼키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아니, 나는 배가 고프지 않으니 죽은 필요 없네…….”
“손을 내밀라고 했습니다.”
돌이가 번개처럼 손을 뻗어 임가의 소매를 잡아챘다. 사내의 손목이 밖으로 끌려 나오는 순간, 그의 손가락 끝과 손톱 밑에 묻은 선명하고 음산한 초록색 독가루 흔적이 연무장의 아침 햇살 아래 붉게 드러났다.
“이놈이다! 우물에 독을 풀려던 쥐새끼가 바로 이놈이에요!”
돌이의 날카로운 외침이 연무장 마당의 정적을 찢어발겼다. 사방을 지키고 있던 철기방 무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쥐며 임가를 포위했다.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났음을 깨달은 임가의 눈에 광기 어린 살기가 스쳤다. 사내는 품속에서 예리하게 갈린 비수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서 있던 철골동맹의 어린 노예 소년의 목덜미를 거칠게 낚아채며 자신에게 대어 섰다.
“물러서! 다들 물러서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이 꼬맹이의 목구멍을 찢어발기겠다!”
임가가 비수를 소년의 목에 들이밀며 소리쳤다. 인질이 된 소년은 공포에 질려 눈물을 흘리며 바르르 떨었다. 철기방 단원들이 성급히 다가가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임가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성채 정문을 향해 뒷걸음질 치려 했다.
터벅. 터벅.
그때, 인파를 헤치고 장대한 강철 거인의 실루엣이 걸어 나왔다.
태벽이었다. 그의 어깨에는 백 근 무게의 대장간 망치가 짊어져 있었고, 양 주먹에는 피와 쇳가루로 검붉게 물든 철기 패왕 사슬이 칭칭 감겨 있었다. 태벽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대지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듯한 둔탁한 중압감이 임가의 심장을 사정없이 짓눌렀다. 태벽의 얼음처럼 차가운 안광이 임가의 눈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오, 오지 마! 오면 진짜 찌른다! 네놈이 그렇게 아끼는 동료들의 목숨이 아깝지도 않으냐!”
임가가 비명을 지르며 비수를 쥔 손을 바르르 떨었다.
태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무통식 상태의 이성은 흔들림이 없었다. 임가의 어깨 근육이 미세하게 수축하며 소년의 목을 찌르려던 바로 그 찰나, 태벽의 신형이 대지를 박차고 번개처럼 쏘아져 나갔다. 하체의 관절통을 억누르는 폭발적인 도약이었다.
쉬이이익!
임가가 비명을 지르며 비수를 내리치려 했으나, 태벽의 오른손이 더 빨랐다.
악력 단련법의 극의, 철포악(鐵骨惡).
태벽은 날카롭게 쏟아지는 비수의 날을 자신의 맨손바닥으로 정면에서 움켜잡았다. 손가락 뼈마디들이 피부 아래에서 기이한 마찰음을 내며 강철 집게처럼 맞물렸다.
쩌적! 콰구구국!
임가의 예리한 강철 비수가 태벽의 무쇠 같은 손아귀 안에서 찰흙처럼 찌그러지며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손바닥 가죽이 찢어져 붉은 피가 흘러내렸으나, 그 아래 노출된 태벽의 손가락 뼈들은 상처 하나 없이 단단한 흑빛을 띠고 있었다.
“이, 이 괴물 같은 놈……!”
임가가 경악하여 뒤로 자빠지려 했다. 동시에 사내의 어금니 안쪽에서 미세한 약초 비린내가 풍겼다. 품 속에 숨겨둔 독약을 삼켜 자살하려 한 것이다.
태벽은 일말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의 왼손이 번개처럼 뻗어나가 임가의 턱관절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콰득!
뼈가 어긋나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임가의 턱뼈가 완전히 탈골되며 아래로 주저앉았다. 사내는 독약을 삼키지도 못한 채, 입안 가득 시커먼 피를 토해내며 연무장 돌바닥 위로 처참하게 굴러떨어졌다. 소년은 철기방 단원들의 품으로 무사히 구출되었다.
태벽은 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리는 임가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움켜쥐어 들어 올렸다. 백 근의 무게를 지닌 거인의 완력 앞에 임가의 왜소한 몸뚱이가 허공에서 무력하게 흔들렸다.
“누구의 사주냐.”
태벽의 쇳소리 섞인 목소리가 사내의 귀를 사정없이 때렸다. 태벽의 손가락 끝이 임가의 부러진 턱관절을 미세하게 압박하자,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극심한 고통에 임가의 전신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으, 으으웁……! 사, 살려다오……!”
태벽이 그의 턱뼈를 억지로 맞춰주자, 임가는 공포에 질려 침과 피를 쏟아내며 비명을 질렀다.
“서, 서산령 포도청 현감 나리께서…… 나를 매수하셨다! 요새 내부의 우물에 마비 독을 풀어 무력화시키면, 가문의 비자금 장부를 회수하고 나를 간수장으로 삼아주겠다고 약조하셨다!”
임가의 고백에 연무장에 모여 있던 노예들과 철기방 단원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현감의 군대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태벽의 안광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 이미 일천 명의 정예 관군과 도성에서 고용된 잔혹한 용병들이 대규모 토벌군을 조직했다! 그들이 요새 외곽의 모든 도주로를 차단하고 이 성채를 향해 진격하고 있다! 나는 그저 길잡이 역할을 했을 뿐이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다오!”
임가는 눈물과 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애원했다. 사내의 고백은 성채에 모인 삼백 명의 노예들과 철기방 단원들에게 절망적인 사형 선고와 같았다. 서산령 포도청의 일천 대군이 요새를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이 험난한 산악 지대에서 일천 명의 정예 병력을 상대로 살아남을 방법은 전무해 보였다.
태벽은 임가의 애원을 묵묵히 들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일지 않았다. 배신자를 살려두는 것은 자신을 믿고 사슬을 끊어낸 동료들의 목숨을 적들에게 내어주는 짓이었다.
“배신자의 말로는 오직 죽음뿐이다.”
콰득!
태벽의 무쇠 손가락이 힘을 가하자, 임가의 목뼈가 허무하게 부러지며 꺾였다. 사내의 시신이 연무장 바닥으로 쓸쓸하게 쓰러졌다. 주변에 모여 있던 노예들은 배신자의 비참한 종말을 보며 침묵 속에서 침을 삼켰다.
태벽은 피 묻은 손을 마의 옷자락에 대충 훔쳐낸 뒤, 성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수백 근에 달하는 강철 골격의 질량이 실린 그의 발걸음이 성채 내부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칠성과 철수, 그리고 돌이가 무거운 침묵 속에서 그의 뒤를 따랐다.
성벽 위로 올라서자, 매서운 새벽바람이 태벽의 검붉은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태벽은 성벽 아래,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는 서산령의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자욱한 안개 너머, 저 멀리 어둠을 뚫고 붉은 불꽃의 바다가 일렁이고 있었다.
수천 개의 횃불.
일천 명의 포도청 관군과 무장한 용병들이 횃불을 밝힌 채, 철기 성채를 겹겹이 포위하며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철제 갑옷과 무기가 횃불 빛에 반사되어 서늘한 살기를 뿜어냈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오직 스스로 뼈를 부러뜨려 사슬을 거부한 자들만이, 대지를 디디고 서서 저 위선적인 제국의 군대를 향해 주먹을 날릴 자격을 얻을 터였다.
태벽은 주먹에 감긴 흑철 쇠사슬을 다시 한번 단단히 쥐어맸다. 검붉은 쇳소리가 차가운 새벽하늘을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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