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을 벗는 시간
설약경의 차가운 백초당 밀실에는 지독한 약초 탄내와 피비린내가 뒤섞여 흐르고 있었다. 단전의 이종진기 충돌을 억누르기 위해 복용한 이종진기단의 약효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지만, 무진의 등 뒤와 갈비뼈를 짓누르는 둔탁한 통증은 여전히 뼛속 깊이 박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무진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고 냉혹했다. 손가락 끝으로 움켜쥔 피 묻은 비단 서찰과, 그 아래 바닥에 뒹구는 부러진 나무 빗 조각이 그의 전신을 분노의 불길로 단련시키고 있었다.
“미친 짓이다. 쇠돌이, 아니 무진아.”
설약경이 약탕기를 거칠게 내려놓으며 무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백발이 분노와 우려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지금 네 상태에서 단전의 기혈을 강제로 각성시키는 각성 비약을 마신다면, 경맥의 8할이 영구적으로 파열될 것이다. 오늘 밤 백골문의 무사들을 도살할 힘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내일 해가 뜰 때 너는 온몸의 기혈이 마비된 진짜 폐인이 되어 휠체어에서 영영 일어나지 못할 게야!”
“상관없다.”
무진의 변성술 목소리가 한철가면의 좁은 틈새를 뚫고 서늘하게 흘러나왔다. 목구멍에서 흘러내린 검붉은 피가 가면 턱밑으로 뚝뚝 떨어졌다.
“내 누이 무희가 저들의 지옥 같은 고문실에 갇혀 피를 흘리고 있다. 나를 위해 그 오랜 세월 동안 채찍질을 견디며 살아온 아이다. 그 아이를 구하지 못하고 대역 무사 노릇이나 하며 목숨을 연명한다면, 나는 진짜 괴물에 불과하다. 설 의원, 비약을 내놓아라.”
설약경은 무진의 가면 틈새로 번뜩이는 붉은 정안(靜眼)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안에는 어떠한 타협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었다. 오직 거대한 가문을 통째로 불태워버리겠다는 야수 같은 살의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설약경은 지독한 한숨을 내쉬며 약방 깊숙한 곳의 흑철 상자에서 검붉은 빛을 띠는 작은 약병을 꺼내 들었다.
“단전의 음기와 양강의 진기를 강제로 폭발시켜 일시적으로 일류(一流) 극의의 내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비약이다. 약효는 단 세 시간. 그 시간이 지나면 전신의 뼈마디가 무너져 내리는 작열통이 찾아올 것이다.”
무진은 주저 없이 약병을 빼앗아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순간, 단전 깊은 곳에서 얼어붙어 있던 음기 진기가 뜨거운 불길로 변해 경맥을 타고 폭발하듯 분출되기 시작했다. 으스러졌던 오른쪽 어깨 관절과 찢어진 손목 인대로 뜨거운 기혈이 강제로 흘러들며 일시적인 감각 마비와 함께 엄청난 힘이 솟구쳤다. 무진은 끓어오르는 내력을 억누르며 백초당의 비밀 지하 통로를 통해 천마각(天魔閣) 침전으로 소리 없이 복귀했다.
침전 내부에는 촛불 하나만이 간당거리며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침상 옆 흑단목 휠체어에는 13세의 어린 시종 소천(小天)이 긴장한 기색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형님……!”
소천이 무진을 보자마자 굵은 눈물을 흘리며 다가왔다. 무진은 말없이 소천을 휠체어에 앉히고, 호랑이 가죽 담요를 그의 무릎 위에 덮어주었다. 그리고 품속에서 탁무선이 정교하게 복제해 준 가짜 한철가면을 꺼내 소천의 얼굴에 씌워주었다.
“소천, 잘 듣거라. 내가 백골문을 피로 쓸어버리고 무희를 구해올 때까지, 너는 이곳에서 완벽한 소교주 설하진이 되어야 한다.”
무진이 소천의 어깨를 묵직하게 움켜쥐었다.
“곽 집사나 장로회의 감시단이 문밖에서 대화를 시도하면, 내가 가르쳐 준 변성술 목소리로 최대한 오만하고 변덕스럽게 독설을 퍼부어라. ‘시끄럽다, 늙은 개놈아! 내상 치료 중이니 당장 꺼지지 못할까!’라고 소리치면 감히 문을 열고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예, 형님…… 꼭 무희 누이를 구해서 살아 돌아오셔야 합니다. 제 걱정은 마십시오.”
소천이 가면 뒤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그의 눈빛에는 주군을 향한 절대적인 신의가 깃들어 있었다.
그때, 침전의 그림자 속에서 묵검(墨劍)을 등에 멘 호위무사 위강(위강)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위강은 이미 무진이 진짜 소교주 설하진이 아님을 완전히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진짜 설하진의 잔혹함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고, 가짜 소교주 무진이 보여준 인간적인 기개에 마음을 빼앗긴 뒤였다.
위강은 무진의 한철가면 뒤에 숨겨진, 가시 침 흉터로 얼룩진 진짜 얼굴의 윤곽을 똑바로 응시했다.
“배후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위강이 묵직하게 검자루를 쥐며 무릎을 꿇었다.
“장로회가 소교주님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제 목숨을 걸고 천마각의 흑철 대문을 지키겠습니다. 제 주군은 오직 이 천마각에 앉아 계신 분뿐입니다.”
“고맙다, 위강.”
무진은 짧은 인사를 남긴 채, 야행복 소매 안쪽으로 녹슨 무명 대도(녹슨 무명 대도)를 고쳐 매고 천마각 후원의 비밀 개구멍으로 빠져나갔다.
천마각 외곽의 어두운 마구간 뒤편에는 전용 마부 맹필(맹필)이 마차를 대기시킨 채 어둠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맹필은 말없이 마차 바닥의 비밀 판자를 들어 올렸다. 무진은 비좁은 마차 바닥 밀실 속으로 축골술을 시전해 몸을 웅크려 기어 들어갔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진동과 함께, 맹필은 장로회의 감시망이 가장 느슨한 흑령림의 사각지대 순찰로를 향해 천리마들을 몰기 시작했다. 마차 벽 너머로 장로회 순찰대원들의 거친 호통 소리와 횃불의 붉은 빛이 수시로 스쳐 지나갔지만, 맹필의 신묘한 마차 조종술과 완벽한 알리바이 덕분에 무진은 마교 총단의 경계선을 무사히 돌파할 수 있었다.
마차가 백골문 외곽의 험준한 숲속 공터에 멈춰 섰다.
비밀 판자가 열리고 무진이 밖으로 나오자, 그곳에는 늙은 대장장이 탁무선(탁무선)이 풀무질로 단련된 탄탄한 상체를 드러낸 채 한철 열쇠를 손에 쥐고 기다리고 있었다.
“왔느냐, 무진아.”
탁무선의 목소리는 무뚝뚝했지만 깊은 염려가 담겨 있었다. 무진은 말없이 탁무선 앞에 꿇어앉아 자신의 귀밑에 잠겨 있는 한철가면의 흑철 홈을 내밀었다.
철컥, 철컥.
탁무선이 한철 열쇠를 홈에 꽂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렸다. 기계 장치가 맞물려 돌아가며 가면 내부의 가시 침들이 무진의 안면 뼈대와 살가죽에서 강제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으드득……! 으으윽!”
무진의 이빨이 깨질 듯이 맞물렸다. 생살이 찢어지고 뼈를 긁으며 쇠가시가 뽑혀 나오는 고통은 단전이 파열되는 내상보다 더 끔찍했다. 가면의 틈새로 검붉은 선혈이 분수처럼 쏟아져 나와 그의 야행복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하지만 무진은 단 한 번의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오직 이빨 사이로 거친 신음만을 흘려보낼 뿐이었다.
마침내 반으로 갈라진 한철가면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차가운 밤바람이 무진의 맨얼굴에 닿았다. 가시 침 자국과 붉은 화상 흉터로 가득한 흉측한 얼굴이었지만, 그것은 대역의 가면 뒤에 숨어 있던 노비 쇠돌이가 아닌, 인간 무진의 진짜 얼굴이었다.
탁무선은 무진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거친 광목천으로 닦아주며, 밤눈옷과 잘 길들여진 투박한 녹슨 무명 대도를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네 진짜 얼굴로 싸워라, 무진아. 그리고 네 누이를 반드시 살려와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무진은 찢어진 인피아 가죽 가면 대신, 탁무선이 건넨 검은 복면으로 하반신만을 가린 채 녹슨 대도를 어깨에 메었다.
쉬이익!
무진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유령처럼 사라졌다. 독고충 스승이 전수한 묵영신법(墨影身法)의 구결이 전신의 경맥을 타고 흐르며 지면과의 마찰 소음을 완벽히 지워버렸다. 얼굴에 부딪히는 차가운 밤바람의 해방감과,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살의가 무진의 발걸음에 파괴적인 기동력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가짜 소교주 설하진이 아니었다. 오직 누이를 구하기 위해 백골문 전체를 도살하러 가는 밤의 살수, 무진이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울창한 침엽수림 너머로 기괴한 백골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흑철 대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교의 잔혹한 하급 지부이자, 무희가 사슬에 묶여 신음하고 있는 백골문의 본단이었다.
무진은 대문 앞 거대한 바위 그림자 속에 신형을 숨긴 채 숨을 죽였다. 복면 위로 드러난 그의 붉은 정안이 어둠 속에서 야수처럼 번뜩였다. 그는 어깨에 멘 녹슨 무명 대도의 손잡이를 하얗게 질리도록 쥐어틀었다.
백골문의 거대한 흑철 대문 앞에 도달한 무진이 한철가면을 벗어 소매에 넣고 녹슨 대도를 어깨에 메자, 문 안쪽에서 백골 무사들의 거친 순찰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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