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역의 밤
화려한 자색 비단 장포가 촛불을 받아 음산하게 일렁였다. 천마각 침전 중앙, 흑단목 휠체어에 앉은 소년의 어깨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소년의 체구와 머리 모양은 영락없는 흑풍마교의 소교주 설하진이었으나, 가면 너머로 흘러나오는 호흡은 지나치게 가늘고 가빴다.
“소, 소교주님…… 정말 제가 이 자리를 지켜야 합니까?”
휠체어에 앉은 소년, 소천이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얼굴에는 진짜 설하진의 오만한 표정 대신 억누를 수 없는 공포가 가득했다. 소천의 등 뒤, 어두운 침전의 그림자 속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곽 집사가 문틈으로 엿볼 때까지 앞으로 반 각이다.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척 허벅지 위에 호랑이 가죽 담요를 단단히 덮고, 고개를 꼿꼿이 세워라. 네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는 순간, 우리 둘 다 이 침전 바닥에서 목이 잘릴 게다.”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온 무진의 몰골은 처참했다. 낮에 설하태의 자뢰검에서 뿜어진 패도적인 뇌격 진기를 온몸으로 받아낸 대가였다. 무릎의 살가죽은 시커멓게 그을려 진물이 흐르고 있었고, 부러진 오른쪽 어깨와 파열된 손목 인대에서는 심장이 뛸 때마다 욱신거리는 극통이 치솟았다. 설약경이 자침해 둔 맥상위장술의 은침들이 기혈을 억누르고 있어, 단전의 음기 진기를 끌어올리려 할 때마다 전신 경맥이 불타는 듯한 고열이 그를 짓눌렀다.
“쿨럭……!”
무진은 입가로 치밀어 오르는 검붉은 선혈을 소매로 닦아냈다. 입안이 비린 피 맛으로 가득했지만, 그의 눈동자만큼은 정안(靜眼)의 차가운 붉은 안광을 미세하게 빛내고 있었다. 사흘 뒤 대연무장에서 펼쳐질 생사결 비무 전까지 설하태의 뇌풍검법을 파해할 비책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교 최고의 금역인 천마각 비전 서고에 잠입해 진짜 설하진이 수련하던 천뢰마공의 구결을 훔쳐야 했다.
무진은 휠체어 보관함 밑바닥으로 걸어갔다. 목삼이 설계한 정밀한 기계 장치의 비밀 스위치를 누르자, 두꺼운 목재 바닥이 소리 없이 아래로 미끄러지며 비좁고 어두운 지하 통로의 입구가 드러났다. 퀴퀴한 흙냄새와 습한 지하의 냉기가 무진의 얼굴을 때렸다.
“소천, 내가 돌아올 때까지 곽 집사가 말을 걸면 설하진의 변성술 목소리로 최대한 신경질적으로 독설을 내뱉어라. 상대를 무시하는 오만함만이 너를 살릴 무기다.”
“예…… 형님.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소천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진은 낡은 야행복의 끈을 단단히 조여 매고 어두운 지하 통로 속으로 몸을 던졌다.
바닥이 닫히며 침전의 희미한 촛불마저 완전히 차단되었다. 무진은 좁고 어두운 흙길 속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오른쪽 어깨 관절이 부러져 있어 왼팔과 두 다리만으로 몸을 지탱해야 했다. 비좁은 통로를 지날 때마다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찌르는 듯한 고통에 숨이 턱턱 막혔다. 무진은 이 악물고 축골술(縮骨術) 구결의 호흡을 전개했다.
‘단전의 잔류 한기를 척추 마디마디에 주입한다. 뼈의 간격을 조절하여 체구를 압축한다…….’
우두둑, 우드득!
비좁은 흙벽 사이로 뼈가 맞춰지는 기괴한 마찰음이 울렸다. 통증이 뇌리를 찢었지만, 무진은 가면 안쪽으로 비명을 삼켰다. 축골술로 체구를 왜소하게 줄인 덕분에, 그는 좁은 지하 통로를 빠져나와 천마각 후원의 울창한 대나무 숲길로 기어 나올 수 있었다.
숲 밖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하늘에는 달빛조차 검은 구름에 가려져 한 치 앞을 보기 어려웠다. 무진은 발바닥의 용천혈에 미약한 음기 진기를 집중했다. 독고충 스승이 남긴 묵영신법(墨影身法)의 구결이었다. 지면과의 마찰 소음을 완전히 흡수하자, 무진의 신형은 대나무 숲의 그림자 속으로 유령처럼 녹아들었다.
천마각 뒤편, 흑철 자물쇠로 굳게 잠긴 3층 석탑인 비전 서고가 웅장한 실루엣을 드러냈다. 서고 주변에는 장로회가 심어둔 정예 순찰 무사들의 발걸음 소리가 주기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장벽은 서고 입구를 감싸고 있는 흑령림의 환영 진법(幻影 陣法)이었다.
무진은 소매 안쪽에서 늙은 정원사 노평이 전수한 낡은 양피지 지도를 꺼내 들었다. 정안의 붉은 안광으로 지도의 미세한 궤적과 안개 속 진법의 흐름을 대조했다.
‘삼 보 전진 후, 좌측의 이끼 낀 돌판을 밟아 진법의 눈을 흐려야 한다.’
무진은 지도의 지시대로 소리 없이 움직였다. 첫 발걸음은 가벼웠고, 두 번째 발걸음 역시 완벽했다. 그러나 세 번째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낮에 설하태의 뇌격으로 상처 입은 왼쪽 갈비뼈 부근의 근육이 급격한 경련을 일으키며 뒤틀렸다. 극심한 신경통이 전신을 덮쳤고, 무진의 디딤발이 미세하게 미끄러졌다.
바스락.
돌판이 아닌, 그 옆에 낙엽으로 위장된 기계식 압력 감지 돌판을 밟기 직전이었다. 이 돌판을 누르는 순간, 서고 사방에서 경보 화살 수십 발이 발사되어 천마각 전체에 비상이 걸릴 터였다. 정안의 시야 속에서 바닥 내부의 미세한 기어 장치가 맞물려 돌아가는 궤적이 포착되었다.
찰나의 순간, 무진은 이성을 잃지 않았다. 그는 만상도골공(萬象盜骨功)의 기형적인 신체 유연성을 극도로 발동했다. 미끄러지던 신형을 공중에서 기괴하게 뒤틀었다. 일반적인 인간의 골격으로는 불가능한 각도로 골반과 무릎 관절을 스스로 탈골시키듯 비틀어, 바닥의 압력판을 디디려던 발끝의 무게중심을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스스스슥.
무진의 신형이 허공에서 반 바퀴 회전하며 압력판 바로 옆의 안전한 흙바닥으로 가볍게 떨어졌다. 한 치의 소음도 나지 않은 완벽한 회피였으나, 무리하게 신형을 꺾은 대가로 왼쪽 갈비뼈 부근의 근육이 미세하게 파열되는 통증이 전신을 엄습했다. 입안 가득 비린 핏물이 다시 차올랐다. 무진은 가면 안쪽으로 피를 삼키며 거친 숨을 죽였다.
“……방금 무슨 소리가 나지 않았나?”
서고 모퉁이를 돌던 정예 순찰 무사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무진은 대나무 기둥 뒤로 신형을 완전히 숨기고 묵영신법의 폐기 호흡을 유지했다. 무사는 한참 동안 숲속을 두리번거리다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무진은 서고 2층의 목조 창문 아래에 도달했다. 2층 창문에는 흑철로 제련된 정밀한 기계 자물쇠가 굳게 채워져 있었다. 무진은 정안 경계를 가동했다. 시야가 붉게 충혈되며 안구 주변의 실핏줄이 터져 피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지만, 자물쇠 내부의 미세한 금속 핀들과 기어의 배치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오른손 인대가 파열되어 손끝을 움직일 수 없었기에, 무진은 왼손 손가락을 자물쇠 홈에 밀착시켰다. 그리고 단전 내부의 미약한 음기 진기를 손가락 끝으로 흘려보내며 만상도골공의 미세 진동을 일으켰다.
징, 지이잉.
손가락 끝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이 자물쇠 내부의 흑철 핀들을 하나씩 건드렸다. 자물쇠 내부의 기어들이 기하학적인 궤적을 그리며 맞춰지는 감각이 손끝을 타고 뇌리로 전해졌다.
철컥.
마침내 차가운 쇳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렸다. 무진은 한 치의 소음도 없이 창문을 밀어 열고 서고 2층 내부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듯 침투했다.
서고 내부는 묵은 종이 먼지와 매캐한 곰팡이 냄새로 가득했다. 사방에 거대한 목조 책장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그 위에는 마교 가문 일가의 비전 무공서들이 어둠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무진은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서고 깊숙한 곳에서 풍겨오는 서늘한 음풍과 함께 기이한 광경이 그의 정안에 포착되었다.
먼지 쌓인 고서적들 사이,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책장 한구석에서 희미하게 흔들리는 푸른 등불(푸른 등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자연적인 불꽃이 아니었다. 누군가 최근에 서고 내부를 드나들며 기묘한 음기 진기를 불어넣어 켜둔 비전의 등불이었다. 등불 주변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고, 숲속보다 더 서늘한 기척이 무진의 한철가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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