덫과 소문
천마전(天魔殿)의 아침은 밤보다 차가웠다.
연하진은 옥좌에 비스듬히 기댄 채, 철가면 슬릿 너머로 스며드는 새벽빛을 바라보았다.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어젯밤 최정예 자객 삼호를 처단하기 위해 특제 휠체어의 급발진 장치를 가동했던 반동이 뒤늦게 온몸을 사정없이 짓누르고 있었다. 뒤틀린 구음절맥(九陰絶脈)의 냉기가 심장 주변을 칼날처럼 쑤셔댔고, 억지로 삼켰던 만독즙의 화독이 위장을 불태우는 듯한 극통을 유발했다.
"우웁, 윽……."
하진은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나지막이 신음했다. 손수건을 떼어내자 붉고 차가운 선혈이 선명하게 묻어 있었다. 오른손은 사술의 여파로 여전히 감각이 없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오직 지혜와 임기응변만으로 초일류 고수들을 상대해야 하는 서생에게, 이 망가진 육체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그때, 늙은 벙어리 시종 아복이 소리 없이 다가와 따뜻한 약차를 바쳤다. 아복은 하진이 토해낸 핏자국을 묵묵히 닦아내며, 걱정 어린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진은 아복에게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여 안심시킨 뒤,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씁쓸한 약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요동치던 심맥이 겨우 진정되었다.
타다닥-
급박한 발소리와 함께 천마전의 무거운 내문이 열렸다. 들어선 이는 하진의 비밀 심복이자 초고속으로 외당 정보 단주가 된 임소승이었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안색은 흙빛으로 질려 있었다. 소승은 옥좌 아래 넙죽 엎드리며 다급하게 보고했다.
"교, 교주님! 큰일이 났습니다! 대장로 독고용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철가면 뒤의 하진은 눈동자 하나 흔들리지 않은 채 복화술의 웅장한 성음으로 대꾸했다. 소리 반사 공명판을 타고 흐르는 목소리가 천마전을 무겁게 울렸다.
"대장로가 쥐새끼의 머리를 받고 결국 미쳐버렸더냐?"
"그, 그것이 아닙니다. 무력으로 침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아주 비열한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지금 교단 밑바닥의 하급 교도들 사이에서 기괴한 유언비어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있습니다!"
"유언비어라……."
"‘현재의 천마는 주화입마로 인해 무공을 완벽히 잃었으며, 옥좌에 앉아 있는 자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소문입니다! 대장로파의 선동꾼인 지옥마 백강(地獄魔 白强)이 하급 교도들이 모이는 야시장과 도박장을 돌며 조직적으로 소문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밑바닥 교도들의 눈빛이 흉흉해지고 있으며, 교주전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하진은 철가면 뒤에서 차갑게 미소 지었다.
대장로 독고용. 무력으로 자신을 시해하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교단 내부의 여론을 뒤흔들어 자신을 옥죄려는 속셈이었다. 힘이 지배하는 마교에서 교주가 무공을 잃었다는 소문은 반란의 가장 완벽한 명분이 된다. 대장로는 스스로 피를 흘리지 않고, 굶주리고 억압받는 하급 교도들의 분노를 이용해 천마전을 무너뜨리려는 것이다.
‘비열하지만 확실한 방법이군. 하지만 내게 여론전은 무공보다 더 쉬운 영역이다.’
하진은 기억의 궁전을 가동했다. 뇌리 속 서고에서 천마전 내부의 인물 정보가 적힌 서랍이 열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은밀한 구석에 보관된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매향(梅香).
천마전의 수석 시녀이자, 대장로 독고용이 교주를 밀착 감시하기 위해 심어놓은 가장 오래된 세작.
하진은 소승을 향해 나지막이 지시했다.
"소승아. 지옥마 백강의 뒤를 쫓아라. 단, 은밀하게 움직여야 한다. 그놈의 배후에 대장로 외에 또 다른 거물이 숨어 있는지 확실히 파악하기 전까지는 절대 꼬리를 밟혀서는 안 된다."
"존명! 목숨을 걸고 백강의 은신처를 찾아내겠습니다!"
임소승이 신속하게 물러가자, 하진은 아복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아복은 즉각 교주의 의도를 알아채고 고개를 숙인 뒤 장막 뒤로 사라졌다.
잠시 후, 천마전의 문이 열리며 화려한 시녀 복을 입은 요염한 자태의 여인이 찻상을 들고 들어왔다. 대장로의 밀정, 매향이었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고요하고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하진의 휠체어 앞으로 다가왔다.
"교주님, 아침 약선을 준비해 왔사옵니다."
매향이 몸을 숙여 찻잔을 내려놓는 순간, 하진의 예리한 관찰안(Observation Eye)이 그녀의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좌측 하단으로 0.5초 더 빠르게 움직였고, 찻잔을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경동맥은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어젯밤 자객 삼호의 머리가 대장로에게 배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여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진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복화술 은판의 진동이 그녀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매향아."
"예, 교주님. 말씀하십시오."
"대장로에게 전령을 보내는 솜씨가 날이 갈수록 정교해지는구나. 어젯밤 천마전 내부의 호위 공백을 보고한 서신도 제법 매끄러웠다."
쨍그랑-!
매향이 들고 있던 은제 주전자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녀의 안색이 순식간에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매향은 무릎을 꿇으며 바들바들 떨었다.
"교, 교주님! 무슨 말씀이신지 미천한 시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사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그녀는 즉시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결백을 주장했다. 하지만 하진은 그녀의 뺨 근육이 미세하게 경련하는 것과 호흡 주기가 완전히 망가진 것을 읽어냈다. 기만론(欺瞞論)의 법칙에 따르면, 거짓을 말하는 자는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순간 가장 극단적인 방어 기제를 작동시킨다.
하진은 휠체어 바퀴를 천천히 굴려 그녀의 눈앞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차가운 은빛 철가면을 그녀의 안면 가깝게 들이밀었다.
"네 남동생은 교단의 서쪽 약재 창고에서 일하고 있지. 그리고 네 병든 아비는 총단 외곽의 하급 의원에 누워 있고."
매향의 눈동자가 공포로 거대하게 팽창했다. "어, 어찌 그것을……."
"대장로 독고용이 네 가솔들의 목숨을 쥐고 너를 협박했다는 것쯤은 본좌에게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쉽다. 하지만 매향아, 독고용이 네 가족을 지켜줄 수 있을 거라 믿었느냐? 본좌의 손가락 한 번 튕김에 목이 날아간 자객 삼호의 꼴을 보고도?"
하진의 목소리에는 내공이 한 푼도 섞여 있지 않았으나, 사방 벽면의 청동판을 타고 반사되는 성음공 트릭 덕분에 마치 초절정 고수의 살기가 침전을 가득 채운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 매향은 숨이 막히는 듯 가슴을 부여잡으며 울부짖었다.
"흐윽, 교주님! 잘못했습니다! 대장로가 제 남동생의 목숨을 쥐고 있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제발 가솔들만은 살려주십시오! 저를 죽이셔도 좋으니 제발……!"
하진은 왼손으로 은빛 철선 ‘천기선’을 가볍게 펼치며 차갑게 속삭였다.
"네 가족은 이미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다. 외당 상단의 장철(張鐵)이 본좌의 명을 받고 새벽녘에 그들을 비밀 호위하여 총단 외곽의 안전한 장소로 이주시켰지. 지금 이 순간, 네 가솔들의 생사여탈권은 대장로가 아닌 본좌의 손에 있다."
이것은 하진이 새벽에 장철의 비자금을 세탁해 확보한 자금과 인력을 동원해 극비리에 실행한 조치였다. 스파이를 처리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목을 베는 것이 아니다. 그 스파이가 목숨보다 아끼는 약점을 장악하여, 적의 눈과 귀를 조작하는 이중간첩으로 완벽하게 전향시키는 것이다.
매향은 하진의 믿기지 않는 정보력과 신속한 조치에 완전히 굴복했다. 그녀는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눈물을 흘렸다.
"교주님…… 제 평생을 교주님의 그림자가 되어 살겠습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진은 철가면 뒤에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심리적 지배력(心理支配)의 고리가 완벽하게 연결된 순간이었다.
"좋다. 그렇다면 지금 즉시 대장로에게 전령을 보내라. ‘천마는 어젯밤 자객 삼호를 처단할 때 주화입마의 여파를 완전히 극복했으며, 지금 천마전 내부에서 비밀리에 가공할 만한 진짜 천마신공의 최종 구결을 완성하고 있다’고 보고해라."
매향은 떨리는 손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존, 존명…… 그대로 적어 보내겠습니다."
"대장로가 의심하지 않도록 평소와 같은 필체와 암호를 사용해라. 네 동생의 목숨을 생각한다면 한 자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매향이 하진의 친필 구결(가짜 천마기공 '허무심법'의 일부 역류 구결)이 담긴 서신을 품에 안고 비틀거리며 물러갔다. 대장로 독고용은 매향의 보고를 받는 순간, 천마의 무공 상실 소문이 진짜인지 혹은 자신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교주의 거대한 함정인지 극도의 혼란에 빠질 터였다. 적의 인지 능력을 마비시키는 역정보 살포 작전의 첫 단추가 완벽하게 꿰어졌다.
하루가 지나 황혼이 저물 무렵.
천마전 비밀 석문이 열리며 임소승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무복은 흙먼지와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사냥에 성공한 사냥개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교주님! 찾아냈습니다! 지옥마 백강의 비밀 은신처를 확보했습니다!"
하진은 휠체어 바퀴를 가볍게 굴리며 그를 응시했다. "어디더냐?"
"총단 북쪽 외곽, 버려진 폐광 인근의 허름한 가옥입니다. 백강은 그곳에서 하급 교도들을 비밀리에 모아 소문을 확산시킬 추가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지금 제 직속 정보원들이 가옥 외곽을 완벽하게 포위하고 대기 중입니다!"
"좋다. 당장 출발한다."
하진은 옥좌 옆에 서 있던 호위무사 죽엽(竹葉)에게 휠체어를 밀게 했다. 귀영은 어둠 속의 그림자가 되어 그들의 뒤를 따랐다. 무공이 없는 서생이 직접 사지로 나서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지만, 소문의 근원을 확실히 뿌리 뽑고 대장로파의 배후 세력을 교도들 앞에서 처단하기 위해서는 교주의 직접적인 등장이 필수적이었다.
밤바람이 칼날처럼 매서운 흑월곡의 북쪽 외곽 절벽 지대.
버려진 폐광의 음산한 한기 속에서 허름한 목조 가옥 한 채가 촛불 하나에 의지한 채 서 있었다. 주위는 적막강산이었고, 어둠 속에서 임소승의 정예 정보원들이 숨을 죽인 채 가옥의 모든 탈출로를 봉쇄하고 있었다.
하진은 휠체어에 앉아 차가운 은빛 철가면 너머로 가옥의 틈새를 응시했다.
‘지옥마 백강. 단순한 선동꾼인 네놈이 대장로의 명줄을 잡고 이토록 대담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진짜 배후가 누구인지, 오늘 밤 확실히 밝혀내마.’
임소승이 하진의 수신호(손가락 튕기기 준비)를 받고 검을 뽑아 들었다. 정보원들이 일제히 가옥의 문과 창문을 부수고 진입하려던 바로 그 찰나.
삐이익-
기괴하고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가옥의 낡은 목조 정문이 안에서부터 천천히 열렸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피비린내와 함께, 정문 너머의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지옥마 백강이 아니었다.
붉은 장포를 걸치고, 안광에서 뱀처럼 매서운 살기를 뿜어내는 노인. 마교의 감찰과 형벌을 담당하는 혈조각(血彫閣)의 각주이자, 교단 내부에서 눈치가 가장 빠르기로 악명 높은 일류 고수.
장로 사패(長老 司覇)였다.
사패는 등 뒤로 잘려 나간 지옥마 백강의 머리를 쓰레기처럼 내던지며, 철가면을 쓴 하진을 향해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매서운 안광이 하진의 앉아 있는 기세와 미세한 호흡 주기를 집요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교주님. 쥐새끼를 잡으러 이 험한 곳까지 직접 왕림하셨사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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