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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비린내 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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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전(天魔殿)의 침묵은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


장막 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있는 연하진은 자신의 거친 호흡을 다스리려 애썼다. 은빛 천마 철가면 내부로 뜨거운 열기가 가득 차올랐다. 오른팔은 사흘 전 좌호법 설천우를 속이기 위해 펼쳤던 맥박 역행 사술의 반동으로 인해 손가락 끝부터 어깨까지 완벽하게 마비되어 감각이 사라진 상태였다. 게다가 단전을 채운 구음절맥(九陰絶脈)의 얼어붙을 듯한 냉기와, 억지로 들이켰던 만독즙의 화독(火毒)이 위장을 사정없이 갉아먹으며 피비린내를 끊임없이 목구멍 위로 밀어 올리고 있었다.


‘대장로 독고용…… 기어이 움직였구나.’


하진은 뇌리 속 가상의 서고, ‘기억의 궁전’을 무섭게 회전시켰다. 머릿속에서 전임 천마 독고혈의 비망록인 ‘천마비록(天魔秘錄)’의 한 페이지가 선명하게 펼쳐졌다. 대장로가 거느린 자객들의 침투 경로, 천마전 내부의 지형지물, 그리고 침전의 가장 취약한 사각지대까지 모든 정보가 하진의 머릿속에서 정교하게 정렬되었다.


공기 중의 피비린내가 급격히 짙어졌다. 천마전 천장의 어두운 대들보 사이에서 뼛속까지 시린 살기가 낙하하는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천장의 기와가 산산조각 나며 붉은색 장포를 입은 자가 번개처럼 하진의 침상을 향해 수직으로 낙하했다. 대장로 독고용이 보낸 최정예 살수, 혈마 자객 삼호였다. 그의 손에 쥔 비수가 붉은 검강(劍罡)을 내뿜으며 하진의 목덜미를 향해 무자비하게 내리꽂혔다.


절체절명의 위기. 일반적인 무인이라면 그 압도적인 검기에 단전이 얼어붙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목이 달아났을 터였다. 하진은 무공이 없는 폐인이었기에 그 압박감이 심장을 멈추게 할 만큼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이성은 차갑게 깨어 있었다.


하진은 마비된 오른손 대신, 하나 남은 왼손으로 휠체어(흑단목 거치 휠체어) 양팔걸이 안쪽에 숨겨진 미세한 비상 레버를 힘껏 움켜쥐었다. 그리고 거칠게 당겼다.


퍼억-!


압축된 스프링과 화약이 동시에 격발되는 굉음이 침전을 울렸다. 하진이 탑승한 특제 휠체어가 후방 삼 장 뒤로 번개처럼 미끄러지며 급발진했다. 자객 삼호의 일격필살 비수가 하진의 코끝을 한 푼 차이로 스치며 두꺼운 침상을 반으로 쪼개버렸다. 침상의 목조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우웁, 윽……!"


휠체어가 뒤로 튕겨 나갈 때 발생한 강력한 반발력이 하진의 병약한 신체에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약하디약한 경추와 심맥에 가해진 충격으로 인해 하진은 철가면 밑으로 뜨거운 선혈을 한 움큼 토해냈다. 전신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눈앞이 일시적으로 흐려졌다.


자객 삼호는 자신의 일격이 빗나갔음에 경악했으나, 초일류 살수답게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신법을 가동했다. 그의 신형이 붉은 잔상을 남기며 다시 한번 하진의 목을 노리고 쇄도했다. 비수의 날카로운 궤적이 하진의 가냘픈 목덜미에 닿기 직전이었다.


하진은 고통으로 흐려지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았다. 그는 휠체어 바퀴 오른쪽 손잡이에 내장된 청동 다이얼을 왼손 손가락으로 빠르게 회전시켰. 천마전 전체의 기계 함정을 통제하는 ‘기관동 함정 작동 수칙’의 가동이었다.


쿠구구구구-!


침전 바닥의 거대한 기어와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소름 끼치는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자객 삼호가 딛고 서 있던 바닥 타일들이 좌우로 순식간에 갈라지며, 그 아래 독충이 가득한 만독굴(萬毒窟)로 이어지는 어두운 심연이 입을 벌렸다.


"이, 이놈이……!"


공중에서 중심을 잃은 자객 삼호의 몸이 아래로 기울었다. 초일류 고수의 신법으로도 허공에서 디딜 발판이 사라지자 중심이 무너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자객이 아래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내력을 방출하며 벽면을 짚으려던 바로 그 찰나.


하진은 왼손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딱-!


맑고 날카로운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침전 벽면의 청동 공명판을 타고 웅장하게 반사되었다. 그 소리는 천마전 내부의 모든 어둠에 내리는 단 하나의 사형 선고였다.


스슥-


침전 한구석, 그림자가 드리워진 벽면에서 형체조차 희미한 극도로 마른 체구의 사내가 소리 없이 튀어나왔다. 전임 교주 독고혈이 어둠 속에서 키워낸 최종 병기, 그림자 자객 귀영(貴影)이었다.


귀영은 하진의 수신호 소리와 동시에 신속하게 공간을 가르며 나타났다. 그의 손에 쥔 암영도(暗影刀)가 빛을 흡수하며 칠흑 같은 검선(劍線)을 그렸다. 귀영 공간 살수 (鬼影 空間 殺手)의 극의였다.


스윽-


어떠한 파공음도, 내력의 마찰음도 없었다. 공중에서 중심을 잃고 버둥거리던 자객 삼호의 목덜미로 검은 선이 지나갔다.


툭.


자객 삼호의 머리가 몸체와 분리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잘려 나간 목 단면에서 뿜어져 나온 핏방울들이 바닥을 붉게 적셨다. 그의 몸뚱이는 바닥 아래 갈라진 심연 속으로 소리 없이 추락했다. 침전 내부에는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귀영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지도 않은 채, 다시 하진의 휠체어 뒤편 어둠 속으로 녹아들듯 사라졌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완벽한 은형(隱形)이었다.


하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휠체어 손잡이를 쥔 손을 천천히 풀었다. 철가면 슬릿 너머로 바닥에 뒹굴고 있는 자객 삼호의 잘린 머리를 응시했다. 자객의 검날에 묻은 검은 독액에서 기묘한 쓴 아몬드 향과 독특한 꽃 향이 미세하게 풍겨 나왔다.


‘이건 사혼산(死魂散)의 향취…… 그리고 만독각(萬毒閣)의 독초 향이로군. 대장로 독고용이 만독각주 도천극과도 이미 내통하고 있다는 뜻인가.’


하진은 가슴의 통증을 억누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대장로가 보낸 자객을 완벽하게 격살했으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대장로는 자객이 돌아오지 않으면 자신이 무공을 잃었다는 의심을 확신으로 굳히고 교단 내부의 여론을 더욱 선동하려 들 터였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먼저 대장로가 감당할 수 없는 피의 경고를 보내야 했다. 공포를 지배하는 자만이, 강자들의 칼날 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법이다.


하진은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늙은 시종 아복을 눈빛으로 불러들였다. 아복은 바닥의 핏자국을 묵묵히 닦아내며, 잘려 나간 자객의 머리를 비단 상자 속에 정교하게 담았다. 하진은 상자 뚜껑을 덮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아복. 이 상자를 대장로의 처소로 보내라. 그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이 선물을 받도록 해라."


아복은 묵묵히 고개를 숙인 뒤 상자를 품에 안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흑월마교 총단 외곽에 위치한 대장로 독고용의 집무실.


독고용은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의문의 비단 상자를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천천히 상자 뚜껑을 열었을 때, 집무실 내부의 온도가 얼어붙는 듯한 침묵이 감돌았다. 상자 속에는 전날 밤 천마전으로 보냈던 그의 최정예 자객 삼호의 처참하게 잘려 나간 머리가 들어 있었다. 자객의 벌어진 입 안에는 차가운 조롱이 담긴 서신 한 장이 쑤셔 박혀 있었다.


[본좌의 침전은 쥐새끼가 드나들 만큼 허술하지 않다. 다음은 네놈의 목 차례다.]


그 시각, 천마전 높은 옥좌에 앉아 철가면 너머로 대장로의 처소 방향을 굽어보는 연하진의 입가에는 피비린내 나는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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