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조력자들
설천우가 물러간 천마전(天魔殿)의 침묵은 얼음보다 차가웠다.
장막 뒤에 홀로 남겨진 연하진은 그제야 억눌렀던 숨을 토해내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은빛 철가면 내부로 뜨거운 열기가 가득 찼다.
"우웁, 윽……!"
하진은 황급히 소매로 입을 틀어막았다. 소매 너머로 검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만독즙(萬毒不侵)의 지독한 화독(火毒)이 구음절맥의 한기와 충돌하며 위장을 찢어발기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내공이 없어 기맥이 폭발하는 사태는 면했을지언정, 독액 자체의 물리적인 부식 성분은 여전히 그의 약하디약한 오장육부를 사정없이 갉아먹고 있었다. 게다가 맥박을 조작하기 위해 가동했던 맥박 역행 사술의 반동으로 오른손은 손가락 끝부터 팔꿈치까지 완벽하게 마비되어 감각이 사라진 상태였다.
스르륵, 탁.
어둠 속에서 늙은 벙어리 시종 아복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그는 하진이 겪고 있는 처절한 고통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아무런 말도 없이 따뜻하게 데운 약선 차와 깨끗한 수건을 바쳤다. 하진은 떨리는 왼손으로 차를 받아 마시며 위장의 불길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아복은 바닥에 떨어진 피 자국을 청소용 빗자루로 흔적도 없이 쓸어내며 하진의 안위를 묵묵히 수호했다.
‘설천우라는 가장 위험한 칼날은 꺾었다. 하지만 이건 임시방편일 뿐이다.’
하진은 은빛 철가면 너머의 어두운 천장을 응시하며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생각했다.
설천우는 공포에 질려 무릎을 꿇었지만, 교단 내부에는 여전히 대장로 독고용을 필두로 한 역모의 무리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든 하진의 빈틈을 노려 철가면을 벗기려 들 터였다. 게다가 우호법 독고린이나 소교주 백화련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대역극을 묵인하고 있을 뿐, 진정한 의미의 아군이라 할 수 없었다.
‘나만의 손발이 필요하다. 겉으로는 철저히 무해해 보이며, 대장로파의 삼엄한 감시망을 피해 교단 밑바닥의 정보와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그림자 같은 존재가.’
하진은 뇌리 속 가상의 서고인 ‘기억의 궁전’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수많은 마교도들의 이름과 행적이 적힌 서랍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흑월천뢰(黑月天雷) 지하 깊은 곳에서 자신에게 따뜻한 밥물 한 그릇을 건넸던 한 인물의 얼굴을 찾아냈다.
임소승(林昭升).
그는 흑월천뢰의 하급 옥졸이었다. 마교도답지 않게 겁이 많고 왜소한 체구를 가졌으나, 감옥에 갇혀 죽어가던 서생 연하진을 인간적으로 불쌍히 여겨 몰래 먹을 것을 챙겨주던 선량한 인물이었다. 마교라는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장에서 그런 자비심을 지닌 자는 극히 드물었다.
하진은 아복을 향해 나지막이 속삭였다. 목의 은판을 울리는 복화술의 음성이 방안을 무겁게 울렸다.
"아복. 아무도 모르게 흑월천뢰의 옥졸, 임소승을 이곳으로 데려오너라. 쥐도 새도 모르게 움직여야 한다."
아복은 묵묵히 고개를 숙인 뒤, 어둠 속으로 신형을 감추었다. 천마전 내부의 비밀 통로를 숙지하고 있는 아복에게 하급 옥졸 하나를 은밀히 데려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반 시진이 지났을 무렵, 천마전 침실 벽면의 석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아복의 거친 손에 이끌려 들어온 사내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낡은 옥졸 무복을 입은 임소승이었다. 그는 자신이 왜 마교 최고의 금역이자 공포의 상징인 천마전에 끌려왔는지 영문을 모른 채, 바닥에 넙죽 엎드려 이마를 찧었다.
"교, 교주님! 미천한 옥졸 임소승,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임소승은 철가면을 쓴 채 휠체어에 앉아 있는 하진의 압도적인 기세에 눌려 숨조차 쉬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자신이 저지른 사소한 실수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즉형(卽刑)의 공포가 가득 차 있었다.
장막 뒤에서 하진은 왼손으로 은빛 철선 '천기선'을 가볍게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성음공 트릭을 가동하여 침전 전체를 진동시키는 장엄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임소승."
"히익! 예, 예! 교주님!"
"고개를 들라."
임소승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그의 시선이 하진의 차가운 은빛 철가면에 닿자마자, 영혼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가 그를 덮쳤.
하진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목소리에는 기묘한 온기와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동시에 실려 있었다.
"네가 천뢰(天雷)의 어두운 감옥 바닥에서, 죽어가던 한 병약한 서생에게 은밀히 건넸던 따뜻한 밥물 한 그릇을 기억하느냐?"
그 순간, 임소승의 눈동자가 깨질 듯이 확장되었다.
그 비밀은 오직 자신과 그 불쌍한 서생만이 아는 극비였다. 만약 교단 상층부에 들통난다면 역모죄로 다스려져 삼족이 멸할 수도 있는 위험한 선행이었다. 그런데 천하제일 마두이자 마교의 지배자인 천마가 그 사실을 입에 담고 있었다.
"교, 교주님…… 그것은……."
"본좌는 천마(天魔)다. 이 흑월곡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본좌의 안광을 벗어날 수 없다. 네가 보잘것없는 서생에게 베푼 자비 역시, 본좌는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하진은 품속에서 칠흑 같은 철로 주조된 작은 패를 꺼내어 임소승의 발치에 툭 던졌다. 패의 전면에는 날개 달린 그림자의 형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마교의 하급 정보 단주를 상징하는 비영패(飛影牌)였다.
"임소승. 본좌는 은혜를 잊지 않는다. 또한, 위선으로 가득 찬 장로들보다 네놈처럼 겁이 많으면서도 최소한의 양심을 지닌 자를 더 신뢰하지. 오늘부로 너를 흑월마교 총단 외당의 정보 단주(情報 壇主)로 임명한다."
임소승은 멍하니 바닥의 비영패를 바라보았다. 하급 옥졸에서 단숨에 교단 내부의 권력자인 단주로의 초고속 승진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신분 상승을 넘어, 천마의 직속 심복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교, 교주님…… 이 미천한 놈을 어찌 이리 믿어주십니까……."
"네놈의 목숨줄은 이제 본좌의 손에 쥐어졌다. 나를 위해 교단의 밑바닥에서 보이지 않는 눈과 귀가 되어라. 대장로 독고용과 외당 상단의 움직임을 은밀히 감시하고 보고하라. 할 수 있겠느냐?"
임소승의 눈에 서려 있던 공포는 순식간에 맹목적인 충성심과 감격으로 뒤바뀌었다. 평생 쓰레기처럼 무시당하며 감옥 구석을 지키던 자신을 알아봐 주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위와 기회를 준 존재. 설령 그가 악마라 할지라도, 임소승은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쿵!
임소승은 머리가 깨질 정도로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소리쳤.
"이 임소승,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교주님의 그림자가 되겠습니다! 만약 교주님을 배신한다면 전신의 기맥이 찢겨 나가는 극형을 달게 받겠습니다!"
"물러가라. 네놈의 첫 번째 임무는 외당 상단주 장철과 대장로 독고용 사이의 은밀한 자금 흐름을 추적하는 것이다."
임소승은 비영패를 품속 깊이 소중하게 찔러 넣은 뒤, 아복의 인도를 받아 비밀 통로를 통해 소리 없이 천마전을 빠져나갔.
그로부터 사흘 동안, 천마전은 고요했다. 하지만 교단 밑바닥에서는 임소승이 가동한 은밀한 정보망이 대장로파의 감시를 피해 빠르게 촉수를 뻗어나가고 있었다. 옥졸이라는 무해한 신분과 천마가 하사한 비영패의 권한은 대장로파의 눈을 피하기에 완벽한 무기였다.
그리고 나흘째 되던 밤, 임소승이 다시 비밀 방으로 찾아왔다. 그의 품에는 기름때와 먼지가 묻은 두꺼운 서책 한 권이 쥐여 있었다.
"교주님! 소승,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임소승은 흥분으로 상기된 목소리로 서책을 바쳤다.
"이것은 대장로 독고용의 재무 관리를 담당하는 겁 많은 서기 고만식의 처소에서 은밀히 빼돌린 이중 장부입니다. 고만식이 대장로의 협박에 못 이겨 작성하던 비밀 장부로, 외당 상단주 장철과의 밀거래 내역이 상세히 적혀 있습니다!"
하진은 떨리는 왼손으로 장부를 받아 펼쳤다. 장부의 첫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그의 안광이 서늘하게 굳어졌다.
장부에는 대장로 독고용이 마교의 핵심 자산인 흑철광산에서 채굴된 양질의 흑철광석을 외당 상단을 통해 외부로 빼돌린 기록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흑철광석이 흘러 들어간 종착지가 적힌 행을 보는 순간, 하진은 숨을 들이켰다.
[남궁세가(南宮世家) 소가주 남궁휘(南宮輝) - 흑철광석 삼만 근 인수 완료.]
‘남궁세가…… 남궁휘라고?’
하진의 머릿속 기억의 궁전이 무섭게 회전했다. 남궁세가는 정파 무림맹의 핵심 가문이자 마교 토벌을 주창하는 강경파의 중심이었다. 마교의 대장로라는 자가, 교단을 배신하고 정파의 가장 강력한 무력 가문에 병기 제작용 흑철을 밀수출하여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횡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비리가 아니었다. 교단 전체를 정파에 팔아넘기려 한 명백한 매교(賣敎) 반역죄였다. 이 장부만 장로회에서 공개한다면, 대장로 독고용은 그 자리에서 모든 권위를 잃고 파멸할 터였다. 하진의 손에 대장로파를 단숨에 궤멸시킬 절대적인 정치적 폭탄이 쥐어진 셈이었다.
"소승, 고만식을 심문할 때 교주님이 주신 천마비록의 약점 정보를 활용했습니다. 고만식은 자신의 횡령 사실이 밝혀질까 두려워 순순히 장부의 위치를 자백했습니다."
임소승이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장 장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대장로파의 경비병들에게 발각될 위기가 있었으나, 교주님이 미리 설계해 주신 우회 통로를 통해 극적으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신산귀모(神算鬼謀)이십니다!"
하진은 장부를 덮어 품속 깊은 곳에 넣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짜릿한 승리감이 솟구쳤다. 무공이 없는 병약한 몸뚱이로도, 천하를 호령하는 초일류 고수들의 목줄을 쥘 수 있다는 지적 카타르시스가 전신을 채웠다.
"잘했다, 임소승. 네 공로가 지대하구나."
하진이 나지막이 칭찬하자, 임소승은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표정으로 엎드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천마전 내부의 온도가 급격하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침실 중앙에 위치한 용 모양의 향로에서 피어오르던 맑은 향기가 순식간에 차가운 음기로 얼어붙었다.
스스스…….
천마전 천장의 어두운 목조 대들보 사이에서, 아주 미세하고 기괴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일반적인 무인이라면 바람 소리로 치부했을 아주 작은 기척이었으나, 생존 본능이 극에 달한 하진의 예민한 감각은 그것이 단순한 바람이 아님을 직감했다.
공기 중에 미세한 피비린내가 섞여들었다.
하진은 철가면 너머로 천장의 어둠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붉은색 장포를 입은 자의 서늘하고 기괴한 살기가 소리 없이 침전 바닥을 향해 드리우기 시작했다. 대장로 독고용이 보낸 최정예 자객, 혈마 자객 삼호의 은밀하고도 치명적인 살기가 하진의 코앞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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