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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독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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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


상자의 뚜껑이 열리며, 방안에 기괴한 비린내가 감돌기 시작했다. 설천우가 하진을 향해 상자를 내밀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상자 내부의 비단 요 위에 놓인 것은 검은 빛이 감도는 청옥 병이었다. 마개를 막아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틈새로 흘러나오는 독기는 지독했다. 썩은 늪지의 악취와 유황의 매캐함, 그리고 살을 찌르는 듯한 비린내가 뒤섞인 냄새. 그것은 천마전 내부의 공기를 순식간에 오염시키며 촛불의 불꽃마저 푸르스름하게 흔들리게 만들었다.


하진은 은빛 철가면 뒤에서 코끝을 스치는 독향을 맡는 순간, 뇌리 속 ‘기억의 궁전’을 급격히 회전시켰다. 만 권의 기서와 천마비록의 서랍들이 스쳐 지나가며, 단 하나의 이름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만독즙(萬毒不侵).’


수백 마리의 기괴한 독충과 독두꺼비의 진액을 갈아 만든 사파 최악의 극독. 일류 고수라 할지라도 단 한 방울만 기맥에 닿으면 단전이 부식되고 전신의 혈관이 녹아내려 즉사하는 무서운 물건이었다.


설천우의 눈빛은 광기와 절망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가문의 불법 무기 거래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잡힌 그는, 이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승냥이와 같았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장막 뒤의 존재가 진짜 ‘천하제일인의 무공’을 지닌 천마 독고혈인지, 아니면 허울 좋은 가짜인지 반드시 확인해야만 했다.


"교주님."


설천우가 청옥 병을 쥐고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하진의 심장을 꿰뚫을 듯이 날카로웠다.


"본좌가 어찌 교주님의 위엄을 의심하겠습니까. 다만 교단 내부에 교주님의 주화입마를 의심하는 간사한 무리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대장로 독고용을 비롯한 자들이 교주님의 만독불침(萬毒不侵) 경지가 깨졌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으니, 본좌가 이 만독즙을 바쳐 교주님의 무위가 여전하심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말은 공손했으나 실상은 칼끝을 목에 들이미는 위협이었다. 마셔라. 마시고 무사함을 증명해라. 만약 마시지 못하거나 망설인다면, 네놈이 내공을 잃은 폐인이라는 뜻이니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버리겠다는 무언의 협박.


장막 뒤의 하진은 침묵했다. 그의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흥건하게 고였다. 왼손에 쥔 은빛 철선 '천기선'의 격발 스위치를 누르고 싶은 충동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당장이라도 독침을 쏴 저 오만한 좌호법의 목을 뚫어버리고 도망치고 싶었다.


‘아니다. 여기서 움직이면 즉시 죽음뿐이다.’


설천우는 초일류 고수다. 천기선의 기계식 독침 속도로는 그의 빙백검기를 뚫을 수 없다. 오직 지략만이, 저 괴물의 칼날을 꺾을 유일한 열쇠였다.


하진은 심호흡을 하며 뇌리 속 천마비록의 의학 지식을 급격히 끄집어냈다. 만독즙의 성질과 구음절맥의 상관관계.


‘만독즙은 극양과 극음의 독기가 뒤섞여 기맥을 타고 흐르는 내공(內功)을 매개로 폭발하는 독이다. 내공이 강한 자일수록 독기가 단전의 기와 반응하여 전신을 파괴한다. 하지만…….’


하진은 자신의 창백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구음절맥의 폐인이다. 단전에 내공이 단 한 푼도 없다. 기맥은 뒤틀려 막혀 있고, 기의 흐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독약은 내 안에서 폭발할 매개체인 기(氣)를 찾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미친 도박이었다. 내공이 없기에 기맥의 대폭발은 피할 수 있겠지만, 만독즙의 물리적인 부식 성분은 고스란히 그의 위장과 식도를 태워버릴 터였다. 오장육부가 타들어 가는 극통을 겪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공포를 지배하지 못하면, 지배당해 죽을 뿐이다.


하진은 후두 근육을 수축시키며 목의 은판을 진동시켰다. 성음공 트릭을 통해 사방의 벽면이 동시에 울리는 장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


"본좌를 시험하려는 자들이 기어이 독배까지 준비했구나. 설천우, 네놈의 얄팍한 충성심이 이 잔 속에 담겨 있다면, 내 기꺼이 받아주마."


하진은 명주 장막 사이로 창백한 오른손을 천천히 뻗었다. 그의 손끝은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완벽한 포커페이스. 설천우는 교주의 거침없는 손짓에 순간적으로 흠칫하며 청옥 병을 하진의 손에 넘겨주었다.


하진은 병의 마개를 뽑았다. 지독한 독향이 코를 찔렀지만, 가면 뒤의 안색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병을 높이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만독즙을 목구멍 깊숙이 들이부었다.


꿀꺽, 꿀꺽.


독액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하진은 지옥의 불덩어리를 삼킨 듯한 착각에 빠졌다. 식도가 타들어 가고 위장이 날카로운 칼날에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극통이 전신을 덮쳤다. 눈앞이 하얗게 흐려지고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싶었다. 가면 뒤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고, 입안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참아야 한다. 여기서 무너지면 가문이 죽는다. 어머니가 죽는다!’


하진은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키며 위장의 비명을 억눌렀다. 그의 뒤틀린 구음절맥은 냉기로 가득 차 있었기에, 역설적으로 만독즙의 뜨거운 화독(火毒)이 위장 속에서 차가운 냉기와 부딪히며 일시적으로 상쇄되는 기묘한 현상이 일어났다. 기맥 역류의 대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직 물리적인 위장 염증의 고통만이 그의 이성을 시험할 뿐이었다.


하진은 태연하게 청옥 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텅 빈 병이 탁자 위에서 가볍게 굴렀다.


탁-


가면 뒤의 차가운 안광이 설천우를 쏘아보았다. 하진은 목의 은판을 울려 한층 더 깊고 웅장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독충의 찌꺼기 맛이 제법 비리구나. 설천우, 이것이 네놈이 준비한 최선의 증명이더냐?"


설천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안광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만독즙을 통째로 마시고도 피 한 방울 토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을 건네는 존재. 그것은 그가 아는 절대자, 천마 독고혈의 만독불침이 완벽하게 건재하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어, 어찌…… 어찌 이럴 수가……."


설천우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 도사린 마지막 의심의 불씨는 쉽게 꺼지지 않았다. 그는 일류 무인으로서의 집요함을 발휘했다.


"교주님의 무위에 경의를 표합니다. 하나…… 본좌의 미천한 빙백검기가 아직 교주님의 기혈을 흔들고 있습니다. 교주님의 옥체에 흐르는 진기가 무사한지, 본좌가 직접 맥을 짚어 확인하게 해주십시오!"


마지막 수였다. 맥을 짚는다. 무인의 맥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내공이 없는 서생의 맥박은 가냘프고 불규칙하여 단번에 들통날 것이 뻔했다. 설천우는 교주의 손목을 잡기 위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하진은 위장이 타들어 가는 통증 속에서도 정신을 집중했다. 올 것이 왔다.


그는 이미 소매 속에서 준비해 둔 '맥동환(脈動丸)'을 어금니로 깨물어 삼킨 상태였다. 맥동환의 자극 성분이 위장 속에서 퍼지며 단전 부근의 미세 혈관을 미친 듯이 수축시키기 시작했다. 심장이 폭발할 듯이 뛰며 손목의 경동맥이 강하게 요동쳤다.


동시에 하진은 오른손 검지 끝에 미리 발라둔 특수 자극 약물을 손목 안쪽의 사혈에 문질렀다. 맥박 역행 사술(脈動逆行邪術)의 시동이었다. 이것은 상대방이 맥을 짚었을 때, 미세한 신경 마비와 함께 역으로 강한 파동을 튕겨내어 초고수의 기세 장막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고도의 사기 기술이었다.


"본좌의 맥을 짚겠다라……."


하진은 차갑게 조소하며 창백한 손목을 장막 너머로 뻗었다.


"네놈의 손가락이 감당할 수 있다면, 어디 한번 짚어보아라."


설천우는 침을 삼키며 하진의 손목을 향해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의 검지 부근에 서늘한 빙백의 내력이 감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설천우의 손가락이 하진의 맥문에 닿았다.


그 찰나.


두둥-!


설천우의 손가락 끝을 통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괴하고 웅장한 진동이 전해졌다. 그것은 단순한 박동이 아니었다. 마치 굶주린 용이 심연 속에서 요동치며 울부짖는 듯한, 불규칙하면서도 파괴적인 기의 파동이었다.


동시에 하진의 피부에 발라진 약물이 설천우의 손가락 끝 신경을 강하게 마비시켰다. 설천우는 자신의 빙백 내력이 교주의 맥문으로 흘러드는 순간, 거대한 강철 벽에 부딪혀 역류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찌릿하는 강력한 전기 충격과 함께, 그의 손가락이 뒤로 강하게 튕겨 나갔다.


"끄아악!"


설천우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그의 오른손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고, 검지 끝은 일시적인 마비로 감각을 잃어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가 느낀 것은 천마의 심오하다 못해 광포한 '진기 장막'이었다. 감히 일류 고수의 내력조차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화경 초고수만의 절대적인 기세.


설천우의 이성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만독즙을 마셔도 끄떡없고, 맥문조차 감히 범할 수 없는 절대자. 장막 뒤에 앉아 있는 자는 의심할 여지 없는 천하제일 마두, 천마 독고혈이었다. 자신의 가문 비리를 쥐고 흔들며 눈빛 하나로 자신을 압도하는 존재 앞에서, 설천우는 더 이상 그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스르륵.


설천우의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그의 오만한 고개가 처참하게 꺾이며 천마전의 차가운 돌바닥을 향해 숙여졌다.


"교, 교주님…… 본좌의 불충을 용서해 주십시오! 본좌는 오직 교주님과 교단의 보존을 위해 이 어리석은 시험을 자행했을 뿐입니다!"


설천우는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채 벌벌 떨었다. 그의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바닥을 적셨다. 완벽한 복종. 강자가 공포에 굴복하여 신앙을 갖게 되는 경악의 순간이었다.


장막 뒤에서, 하진은 입안에 가득 고인 검은 피를 삼키며 천기선을 가볍게 흔들었다. 철가면 속의 눈동자는 여전히 깊고 서늘한 어둠을 담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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