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화(毒花)의 헌상
달콤하면서도 뼛속을 싸하게 만드는 기이하고 불길한 보랏빛 독취(毒臭)가 소리 없이 침전의 장막 사이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연하진은 흑단목 거치 휠체어의 팔걸이를 짚은 채, 은빛 천마 철가면 너머로 그 불길한 기류를 응시했다. 설천우가 이끄는 군세가 대장로파의 잔당들을 숙청하기 위해 천마전 외곽으로 완전히 빠져나간 직후였다. 가장 강력한 물리적 장벽이자 동시에 자신을 감시하던 매서운 눈들이 사라진 침전은,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고 또 무방비했다.
‘도천극(道天極). 기어이 늙은 뱀이 독니를 들이미는구나.’
하진은 뇌리 속 가상의 서고, ‘기억의 궁전’을 급격히 회전시켰다. 만독각(萬毒閣)의 각주이자 대장로 독고용의 충실한 사냥개인 장로 도천극의 정보가 담긴 서랍이 열렸다. 도천극은 음험하고 의심이 많은 자로, 천마의 무공 상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설천우가 자리를 비운 이 절묘한 타이밍을 그 노회한 독물학자가 놓칠 리 없었다.
스스스슥.
장막 뒤의 어둠 속에서 얇은 비단 자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걸음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고도의 신법이었으나, 향로가 꺼진 자리에 퍼지는 이질적인 향취가 침입자의 존재를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었다.
이윽고 어둠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서늘할 정도로 요염한 자태를 지닌 자색 비단 옷의 여인이었다. 만독파 장문의 외딸이자 독공의 천재라 불리는 혁련소소(赫連素素)였다. 그녀의 손가락 끝은 기묘한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얇은 베일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는 뱀처럼 서늘하면서도 매혹적인 빛을 발하고 있었다.
혁련소소는 옥좌 아래에 이르러 사뿐히 무릎을 꿇으며 허리를 숙였다.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로 백옥 같은 목덜미가 드러났으나, 하진의 안광은 오직 그녀의 소매 끝에 고정되어 있었다.
“만독각의 소조, 혁련소소. 교주님을 뵙나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옥쟁반에 구슬이 굴러가듯 맑고 달콤했다.
“아버님께서 교주님의 주화입마를 염려하시어, 심맥을 보호하고 진기를 맑게 해 줄 묘강의 귀한 약선 차와 함께 미천한 소녀를 교주님의 침소에 헌상하셨사옵니다. 부디 이 미천한 몸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말은 유혹적이었으나, 하진의 ‘관찰안 1단계’는 그녀의 안면 미세 근육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해독해 내고 있었다. 혁련소소의 입꼬리는 나긋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꺼풀의 미세한 떨림과 경동맥의 비정상적인 박동은 그녀가 극도의 긴장과 살기를 품고 있음을 가리켰다.
‘미인계를 가장한 검증이군.’
하진은 후두 은판을 진동시키며 복화술 음성을 내리깔았다. 사방의 청동 공명판을 타고 울려 퍼지는 교주의 목소리가 침전을 무겁게 압박했다.
“도천극이 드디어 본좌에게 꽃을 보내왔구나. 그러나 본좌의 침전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닐 텐데?”
혁련소소는 나지막이 미소 지으며 소매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 찰나, 그녀의 손목에 장착된 은밀한 기물 ‘환영통(幻影筒)’의 미세한 금속 마찰음이 하진의 귓가를 스쳤다.
슈우우우.
시각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뼛속을 얼려버릴 듯한 극음(極陰)의 기류가 침전 가득 퍼져나갔다. 만독각의 극비 기물에서 뿜어져 나온 ‘무색무취 독향(無色無觸 毒香)’이었다.
하진은 즉각 기억의 궁전에서 이 독물의 성질을 인출해 냈다.
‘무색무취 독향. 공기 중에 살포되어 체내로 흡입되는 순간, 단전에 미세한 기(氣)라도 지닌 무인이라면 그 내공과 반응하여 극심한 기혈 역류와 단전의 발작을 일으키는 마비독이다. 내공이 강한 초일류 고수일수록 기맥의 뒤틀림이 외견상으로 격렬하게 드러나지. 반대로, 기가 전혀 없는 민초에게는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는 기묘한 독…….’
하진의 심장이 요동쳤다. 이것은 도천극이 설계한 가장 잔혹하고 예리한 검증이었다. 만약 하진이 내공을 지닌 진짜 천마라면 독향에 반응하여 기맥을 보호하기 위해 기를 운기해야 할 것이고, 그 운기의 파동이 혁련소소의 감각에 포착될 터였다. 반대로 내공을 잃은 폐인이라면…….
‘아니, 내공이 없는 폐인이라면 이 독향에 기맥 반응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번개 같은 깨달음이 스쳤다.
내공이 전혀 없다는 절망적인 신체적 한계, 모든 경맥이 뒤틀려 막힌 구음절맥(九陰絶脈)이라는 시한부의 저주가, 이 순간에는 천하의 고수들을 완벽하게 속여 넘길 가장 위대한 방패막이가 되는 역설이었다.
독향이 하진의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윽……!”
내공의 반응은 없었으나, 독물의 물리적인 독성은 여과 없이 하진의 약하디약한 식도와 위장을 태워버리기 시작했다. 오장육부가 불덩어리에 닿은 듯 타들어 가는 극통이 밀려왔다. 이전 에피소드에서 마셨던 만독즙의 잔여 화독과 자해 침술의 반동이 겹쳐 가슴 깊은 곳에서 검은 피가 역류하려 했다.
하진은 철가면 뒤에서 어금니를 부러질 듯 깨물었다. 눈동자가 충혈되고 뇌압이 상승하여 왼쪽 귀에서 삐- 하는 이명이 울렸다. 하지만 그는 단 1밀리미터의 신형도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 끝 하나, 눈꺼풀 하나 떨지 않은 채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혁련소소는 엎드린 채 눈동자를 굴려 하진의 반응을 집요하게 관찰했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 눈앞의 가짜 천마가 독향을 들이마시고 단전의 폭발을 참지 못해 비명을 지르거나, 혹은 기맥을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마공의 진기를 뿜어내며 자신을 타격하기를. 어떤 반응이든 나오기만 하면 그의 진짜 상태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침전의 공기는 고요하다 못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일 장.
이 장.
삼 장.
시간이 흐를수록 혁련소소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미소가 서서히 지워지기 시작했다.
눈앞의 철가면을 쓴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주변에는 그 어떤 기의 요동도, 기맥의 흔들림도 감지되지 않았다. 무색무취 독향은 이미 방안을 가득 채웠고, 인간의 폐부라면 수십 번은 헤집어 놓았을 터였다. 하지만 천마는 그저 고요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지? 아버님의 무색무취 독향은 화경(化境)의 고수라도 기맥의 동요를 감출 수 없는 천하의 극독이거늘…… 어째서 이 자는 털끝 하나 흔들리지 않는단 말인가?’
혁련소소의 이마에 미세한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녀가 아는 상식선에서 이 독향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몸에 들어오는 모든 독을 기화시키고 단전의 진기를 한 치의 흐름도 없이 완벽하게 갈무리할 수 있는 경지, 즉 독공의 최종 극의이자 신화적인 신체 상태인 만독불침(萬毒不侵)의 경지였다.
‘진짜…… 진짜 만독불침의 괴물이란 말인가?’
공포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미인계를 펼치려던 요염한 자태는 온데간데없고,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손끝만이 보랏빛 손톱을 타고 드러났다.
하진은 타들어 가는 위장의 극통을 정신력으로 억누르며, 천천히 왼손을 뻗었다. 마비된 오른손 대신 왼손끝으로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쥐었다. 은빛 철선 ‘천기선’의 차가운 감각이 손바닥을 통해 이성을 일깨웠다.
쪼르르륵.
하진은 태연하게 차를 따랐다. 독향이 자욱하게 내려앉은 공기 속에서, 뜨거운 찻물이 뿜어내는 맑은 김이 은빛 철가면의 전면을 타고 올라갔. 하진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혁련소소의 떨리는 안광을 철가면의 좁은 틈새 너머로 서늘하게 응시했다.
“도천극의 차가 제법 향기롭구나. 혁련소소, 너도 한 잔 마시겠느냐?”
그 나지막하고 웅장한 목소리가 침전을 가득 채우는 순간, 혁련소소는 마치 거대한 심연의 아가리 앞에 선 듯한 극도의 공포를 느끼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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