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무게
축축하고 음습한 지하 감옥, 흑월천뢰(黑月天雷)의 철문이 무겁게 닫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멀어졌다.
연하진은 우호법 독고린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흑월마교의 심장부이자 교주 전용 침전인 천마전(天魔殿)으로 향했다. 가파른 석조 계단을 오를 때마다 뺨을 스치는 밤바람이 칼날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차가운 것은 하진의 얼굴을 빈틈없이 덮고 있는 은빛 천마 철가면의 감촉이었다.
‘무겁다.’
단순히 쇳덩이의 물리적인 무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가면을 쓰는 순간, 그는 평범한 서생 연하진으로서의 삶을 잃었다. 이제부터는 단 한 번의 호흡, 단 한 걸음의 흐트러짐도 허용되지 않는 천하제일 마두 천마의 대역으로 살아가야 했다. 거짓이 들통나는 순간, 고향에 있는 눈먼 노모와 동생들은 물론이고 자신 또한 갈가리 찢겨 개먹이가 되리라.
"흡……!"
갑작스럽게 폐부를 찌르는 통증에 하진은 걸음을 멈추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뒤틀린 경맥이 얼어붙는 듯한 구음절맥(九陰絶脈)의 발작이었다. 단전에 기가 한 푼도 없는 하진으로서는 이 고통을 억누를 방도가 없었다. 철가면 너머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오려 하자, 뒤를 따르던 독고린이 은밀하게 하진의 등을 짚었다.
웅-
독고린의 묵직하고 따뜻한 내력이 하진의 경맥을 부드럽게 감싸며 폭주하던 냉기를 일시적으로 가라앉혔다.
"……참으셔야 합니다, 주군. 천마전 초입부터는 사방이 적들의 눈과 귀입니다."
독고린의 나지막한 전음이 귓가를 울렸다. 하진은 철가면 속에서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스로 진정된 다리를 움직여 마침내 천마전의 거대한 검은 철문 앞에 도달했다.
쿠구구구-
육중한 문이 열리며 드러난 천마전의 내부는 장엄하다 못해 기괴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사방의 벽면은 빛을 흡수하는 흑철로 뒤덮여 있었고, 천장에는 흑색 비단 장막이 거미줄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오직 교주 한 사람만을 위해 존재하는 절대 기만의 요새.
안으로 들어서자, 어둠 속에서 한 노인이 소리 없이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곱추처럼 굽은 등에 초라한 누더기 옷을 입은 늙은 시종, 아복(아복)이었다.
아복은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였다. 그는 고개를 바짝 숙인 채 하진의 발치를 청소하듯 빗자루를 쓸었다. 하지만 하진은 순간적으로 아복의 흐릿한 눈동자가 자신의 발끝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것을 포착했다.
‘알고 있구나.’
하진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평생 독고혈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셔온 시종이었다. 무공은 없으나, 주인의 미세한 걸음걸이와 보폭, 그리고 몸에서 풍기는 미세한 체향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살기가 감돌아야 할 침묵 속에서, 아복은 돌연 하진의 손끝을 묵묵히 바라보더니 더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의 눈빛에는 밀고하겠다는 탐욕 대신, 기묘할 정도의 깊은 연민과 맹목적인 충성이 서려 있었다.
하진은 기억의 궁전을 가동해 전임 교주 독고혈의 기록을 떠올렸다. 독고혈은 잔혹무도한 성품으로, 사소한 실수에도 아복을 채찍질하고 학대했다. 그러나 하진이 지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굶주림에 지쳐 쓰러진 아복에게 은밀히 자신의 밥을 나누어주고 상처를 닦아주었던 적이 있었다. 아복은 그때 느꼈던 서생의 온정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복은 묵묵히 하진이 앉을 흑단목 거치 휠체어를 밀어 침상 앞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없이, 교주의 침대 아래 숨겨진 비밀 슬라이딩 도어의 위치를 시선으로 가리켰다.
하진은 아복과 우호법 독고린을 침전 밖으로 물러가게 한 뒤, 서둘러 침대 아래의 장치를 작동시켰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의 강철판이 열리며 먼지 쌓인 나무 상자가 나타났다.
상자 안에서 하진이 꺼내 든 것은 낡은 가죽 책자였다. 전임 천마 독고혈의 극비 비망록, 천마비록(天魔秘錄)이었다.
하진은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의 절대적인 사진 기억 능력이 발동되며 책장에 적힌 글자들이 뇌리에 실시간으로 각인되었다.
[좌호법 설천우(薛天宇). 28세. 빙백심법의 대가. 오만하고 잔혹하나, 의심증이 극에 달해 있다. 본좌의 무공이 약화되었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본좌의 천마한빙장에 대한 트라우마를 동시에 품고 있음. 그의 가문은 과거 정파와의 무기 밀매 비리로 몰락의 길을 걸었으며, 현재 숙부 설태진이 여전히 은밀한 거래를 주도하고 있다. 이 장부를 들이밀면 그는 스스로 칼을 거둘 수밖에 없다…….]
비록에 적힌 마교 수뇌부 120명의 약점과 치명적인 비리들이 하진의 머릿속에 체스판의 말처럼 배치되기 시작했다. 지적 무장이 완료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설천우가 어떤 음모를 꾸미고 들어오든, 그의 심리를 파고들 카드가 하진의 손에 쥐어졌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천마전 외곽의 두꺼운 철문이 거칠게 부딪히는 굉음이 침전 내부까지 울려 퍼졌다. 삼엄한 기세의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타고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좌호법 설천우! 교주전은 허락 없이 배알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당장 멈춰라!"
우호법 독고린의 노호가 천마전 입구를 흔들었다. 하지만 침입자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우호법, 비켜서라. 교주께서 주화입마로 인해 단전이 파열되었다는 소문이 총단에 자자하다. 마교의 안위를 위해 본좌가 직접 교주님의 옥체를 뵙고 맥을 짚어보아야겠다!"
서늘하면서도 오만한 목소리. 좌호법 설천우였다.
하진은 서둘러 천마비록을 품속 깊은 곳에 숨기고, 흑단목 휠체어에 몸을 실었다. 그의 가슴이 긴장으로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구음절맥의 냉기가 심장을 옥죄며 숨이 가빠왔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그때, 곁에 서 있던 벙어리 시종 아복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아복은 거친 손으로 하진의 떨리는 왼손을 지탱하며, 따뜻한 찻잔을 휠체어 팔걸이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눈빛으로 말했다.
‘부디, 살아남으십시오.’
하진은 심호흡을 하며 철가면 너머로 안광을 굳혔다. 기만술 1단계: 허장성세(虛張聲勢)를 가동할 시간이었다. 그는 검은 장포의 자락을 넓게 펼쳐 휠체어 하단을 가리고, 절대적인 침묵 속에 장막 뒤로 몸을 숨겼다.
스스스스-
침전 내부의 공기가 급격히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설천우가 뿜어내는 초일류 고수의 빙백검기(氷魄劍氣)가 얇은 명주 장막을 찢어발길 듯이 밀려들었다. 무공이 없는 하진의 약한 경맥이 그 살기에 노출되자, 가슴 내부에서 찌르는 듯한 격통이 일며 목구멍으로 핏물이 울컥 치밀어 올랐. 하진은 철가면 뒤에서 피를 삼키며 이빨을 악물었다.
"교주님! 설천우가 뵙기를 청하나이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설천우가 장막 바로 앞까지 밀고 들어온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설천우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천마전 침전의 묵직한 내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뼛속까지 시린 빙백검기가 방안의 촛불들을 단숨에 꺼뜨리며 서늘하게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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