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판의 지배자
뇌신당을 집어삼켰던 천둥과 불길이 가라앉은 자리에는 오직 잿빛 연기와 차가운 재만이 자욱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수천 명의 폭도가 비명횡사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무릎을 꿇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그 아수라장 속에서, 연하진은 예비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천천히 천마전의 깊은 어둠 속으로 돌아왔다.
은빛 천마 철가면 너머, 그의 숨결은 가늘고 불규칙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우웁, 윽……!"
장막이 쳐지자마자 하진은 참았던 검은 피를 다시 한번 울컥 토해냈다. 붉은 호피 담요 위로 떨어진 검은 핏방울들이 뒤틀린 구음절맥의 냉기와 만나 하얗게 성에를 맺으며 얼어붙었다. 심장이 찢어질 듯이 욱신거렸고 오장육부가 타들어 가는 극통이 전신을 지배했다.
전대 천마 독고혈의 급사 이후, 끊임없이 이어지는 기만극과 매 순간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심리전. 그리고 방금 전 뇌신당에서 전개했던 사혈 극대화 자해 침술의 반동이 그의 병약한 신체를 사정없이 갉아먹고 있었다.
하지만 하진은 떨리는 손으로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어둠 속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늙은 시종, 아복을 응시했다. 아복은 말 한마디 없이 따뜻한 약차를 하진에게 바쳤다. 하진의 정체를 알면서도 목숨을 걸고 침묵을 지키는 가장 충직한 그림자였다.
"주군, 뇌신당의 잔당들은 완전히 제압되었습니다. 우호법 독고린께서 외곽의 포위망을 수습하고 계십니다."
장막 너머에서 정보 담당관 임소승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진은 목에 밀착된 은판의 위치를 조절하며, 복화술을 가동해 웅장하고 차가운 천마의 음성을 내뱉었다.
"장로들이 무어라 하더냐?"
"보수파 장로들은 이번 폭동에 가담한 하급 교도들과 노예들 수천 명을 모조리 처형하여 피의 숙청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파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선 공포가 필요하다면서 말입니다."
철가면 뒤에서 하진은 쓰라린 미소를 지었다. 피의 숙청이라. 칼로 다스리는 공포는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을지언정, 결국 더 큰 반발과 원한의 불씨를 남길 뿐이다. 게다가 굶주림과 가혹한 수탈에 못 이겨 일어난 밑바닥 교도들을 모조리 죽인다면, 마교를 지탱하는 노동력은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학자 가문에서 자라며 선친에게 배웠던 유가와 법가의 통치 사상이 하진의 머릿속에서 정교한 체스판의 말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포는 지배의 도구일 뿐, 지배의 본질이 될 수 없다. 진짜 힘은 그들의 생줄기를 쥐고 흔드는 데서 나온다.’
하진이 나지막이 명했다.
"처벌을 요구하는 장로들의 의견은 기각한다. 폭동의 주동자들은 이미 하늘의 심판을 받아 폭사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본좌의 자비를 입은 본교의 자산이다. 또한, 지금 즉시 외당 총관 장철을 천마전으로 입시시켜라."
"존명!"
잠시 후, 천마전의 묵직한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기어들어 오듯 엎드렸다.
기름진 비단 장포를 걸치고 손가락마다 보석 반지를 낀 비대한 체구의 사내, 외당 총관 장철이었다. 그는 대장로 독고용의 횡령과 밀수 자금을 뒤에서 세탁해 주던 외당 상단의 우두머리였다. 대장로가 실각하고 폭동까지 진압되자, 자신의 목이 언제 날아갈지 몰라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하진은 휠체어를 미세하게 굴려 장철의 머리 앞까지 다가갔다.
"장 총관. 네가 대장로와 결탁하여 흑철광산의 철광석을 정파 남궁세가에 밀수출하고, 외당 상단의 장부를 조작해 횡령한 자금이 은자 사십만 냥에 달하더군."
장철의 등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진은 '기억의 궁전'을 가동해 장부의 세부 숫자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읊조렸다.
"금릉 상단을 통해 세탁된 비자금의 흐름이 제삼십이 쪽, 네 번째 줄에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더군. 장 총관, 네 목숨의 가치가 은자 몇 냥짜리라 생각하느냐?"
"교, 교주님! 살려주십시오! 미천한 놈이 대장로의 협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죄이옵니다!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외당 상단의 모든 자산을 교주님께 바치겠나이다!"
장철은 이마가 깨져라 대리석 바닥에 찧으며 울부짖었다. 하진은 은빛 철선 '천기선'을 가볍게 털어 펼치며 차갑게 속삭였다.
"네 목숨을 거두는 것은 본좌에게 가벼운 일이다. 하지만 기회를 주지. 지금 즉시 금릉 상단 은표 오만 냥을 교주전의 사적 자금으로 바쳐라. 그리고 앞으로 외당 상단의 모든 자금 흐름을 본좌에게 실시간으로 보고해라. 그리하면 네 목줄은 일단 유예해 주지."
"존, 존명! 즉시 은표를 바치겠나이다! 교주님의 은혜에 뼈를 깎아 보답하겠나이다!"
장철은 품속에서 손을 벌벌 떨며 최고급 금릉 상단 은표 뭉치를 꺼내 바쳤다. 하진은 그 은표를 건네받아 품속에 챙기며, 마음속으로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 자금의 일부는 임소승을 통해 고향에 남겨진 눈먼 노모 임씨 부인과 가문의 생계를 위해 은밀히 송금될 터였다. 잔혹한 천마의 철가면 뒤에 숨겨진, 서생 연하진으로서의 유일한 인간적 따뜻함이자 신념이었다.
하진은 수습된 은표를 임소승에게 건네며 다음 지시를 내렸다.
"소승아. 장철에게서 거둔 이 오만 냥으로 즉시 중원 상단들로부터 막대한 식량과 겨울 피복을 사들여라. 그리고 이번 폭동에서 살아남은 하급 교도들과 노예들에게 빠짐없이 분배해라. 교주의 자비가 그들의 주린 배를 채울 것이다."
임소승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졌다. 사파의 역사상 그 어떤 천마도 밑바닥 노예들에게 이토록 거대한 구휼을 단행한 적은 없었다.
"주, 주군. 장로들이 이 파격적인 개혁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교단의 전통을 깨부수는 일이라며 반발할 텐데요."
"반발하는 자가 있다면 설천우와 사패가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다. 그리고 본좌는 단순히 밥만 주려는 것이 아니다."
하진은 붓을 들어 정교한 율법 장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오늘부로 '마교 공헌도' 제도를 선포한다. 출신과 신분을 불문하고, 교단에 기여한 공적을 투명하게 장부에 기록할 것이다. 하급 교도나 노예라 할지라도 공헌도가 일정 기준을 넘어서면 합법적으로 단주로 승진할 수 있으며, 교단의 비전 무공 구결을 전수받을 기회를 부여한다. 오직 공정함과 실력만으로 신분이 결정되는 율법이다."
마교 공헌도 제도.
힘과 혈통만이 지배하던 마교 내부에서 최초로 유가와 법가의 통치 사상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배를 불려주고, 신분 상승의 공정한 기회를 주는 것. 이것은 칼로 다스리는 공포보다 수백 배는 강력하게 인간의 마음을 옭아매는 사슬이었다.
며칠 뒤, 천마전 앞 광장에는 수만 명의 하급 교도와 노예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따뜻한 만두와 두꺼운 겨울 피복이 쥐어져 있었고, 그들의 눈앞에는 새로 제정된 마교 공헌도 석판이 장엄하게 솟아올랐다. 단상 위, 예비 휠체어에 앉아 차가운 은빛 철가면을 쓰고 있는 하진을 바라보며, 교도들은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엎드렸다.
"하늘의 번개를 부리시는 교주님께서 우리 같은 미천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천마령의 절대자시여! 평생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나이다!"
지진과도 같은 환호성이 흑월곡의 하늘을 뒤흔들었다. 대장로 독고용의 잔당들이 아무리 뒤에서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선동하려 해도, 배가 부르고 미래의 희망을 품게 된 교도들에게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대장로파의 지지 세력은 완벽하게 고립되었고, 하진은 명실상부한 마교의 진짜 지배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교단이 마침내 안정을 찾고, 피비린내 나던 흑월곡에 평화로운 온기가 돌기 시작한 찰나였다.
하진은 침실 창문을 통해 멀리 흩날리는 재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 했다.
쿵-!
갑자기 천마전의 묵직한 문이 거칠게 열렸다.
수많은 경비병의 제지를 뚫고 안으로 들이닥친 사내는, 하진의 충직한 심복이자 정보 지부장인 임소승이었다.
그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잘려 나간 옷자락을 움켜쥐고 천마전 내부로 헐떡이며 뛰어들어왔다. 그의 다급한 눈빛에는 이전에 본 적 없는 극도의 공포와 긴박함이 서려 있었다.
"교, 교주님……! 큰일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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