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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도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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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설아가 사라진 대나무 숲의 차가운 안개 속에서, 하진은 휠체어 손잡이를 붙잡고 참았던 피를 다시 한번 토해냈다. 입가로 흘러내리는 검은 피는 대리석 바닥에 닿자마자 구음절맥(九陰絶脈)의 냉기 때문에 하얗게 성에가 끼며 얼어붙었다. 오장육부가 타들어 가는 극통이 밀려왔다. 의선 갈홍이 지어준 구음단(九陰丹)의 약효가 다해 가고 있었고, 사혈 동조 침술의 반동이 심맥을 가차 없이 찢어발기고 있었다.


“주군!”


장막 뒤에서 소리 없이 나타난 우호법 독고린(獨孤隣)이 하진의 어깨를 부축했다. 그의 묵직한 강철 같은 손길에서도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하진은 떨리는 손으로 은빛 천마 철가면(은빛 천마 철가면)을 고쳐 쓰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진정해라, 독고린. 쥐새끼들이 냄새를 맡았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마전(天魔殿) 외곽에서 거대한 경보 종소리가 대기를 찢으며 울려 퍼졌다.


두우웅-! 두우웅-!


그것은 단순한 침입 경보가 아니었다. 교단 내부의 전면적인 폭동을 알리는 피비린내 나는 타종이었다. 이어서 허름한 옥졸 무복을 입은 임소승(林昭升)이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천마전 내부로 허겁지겁 뛰어들어왔다. 그의 이마에는 땀과 흙먼지가 범벅되어 있었다.


“교, 교주님! 큰일 났사옵니다! 하급 교도들과 노예들이 흑월천뢰(黑月天雷)를 부수고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임소승은 바닥에 엎드려 사시나무 떨듯 떨며 보고했다.


“대장로 독고용(獨孤勇)의 선동꾼들이 ‘천마는 이미 무공을 잃고 휠체어에 묶인 폐인에 불과하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이에 선동당한 흑월곡 하급 교도 연합(黑月谷 下級 敎徒 聯合) 수천 명이 무기를 들고 천마전으로 진격하고 있사옵니다!”


하진은 철가면 뒤에서 차갑게 안광을 번뜩였다. 대장로 독고용이 장로회에서 정치적 명분을 잃고 외곽으로 도주하더니, 기어이 밑바닥 교도들의 분노를 이용해 자신을 끌어내리려는 마지막 폭주를 시작한 것이다. 힘이 지배하는 마교에서 교주의 약화 소문은 굶주린 맹수들에게 고기 냄새를 풍긴 것과 다름없었다.


“폭동의 우두머리는 누구냐?”


하진이 목의 은판을 울려 성음공 트릭으로 나지막이 물었다. 사방의 청동 공명판을 타고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여전히 웅장했으나, 하진의 체내에서는 이미 피비린내가 역류하고 있었다.


“사파의 광포한 도법 고수인 위천패(魏天霸)와, 괴력의 사내로 소문난 돌격대장 맹호(猛虎)가 폭도들을 지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거대한 통나무 파성퇴(破城槌)를 이끌고 천마전 외곽 성벽을 정면으로 들이받고 있사옵니다!”


쿠구구구궁-!


임소승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마전 외곽 성벽 방향에서 대지를 뒤흔드는 거대한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 횃불의 붉은 불빛이 창문을 넘어 천마전 천장까지 피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폭도들이 지르는 광기 어린 함성이 밤하늘을 가득 채웠다.


“무공을 잃은 가짜 천마는 물러가라!”


“천마전의 보물고를 열어 우리에게 나누어라!”


독고린이 묵철검(墨鐵劍)을 꽉 쥐며 하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군, 소장이 정예 친위대인 철가면대를 이끌고 최전선에서 방패막이가 되겠나이다. 저 폭도들의 목을 베어 교주전의 권위를 피로써 증명하겠나이다!”


“아니, 정면 충돌은 피한다.”


하진은 휠체어 바퀴를 가볍게 매만지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저들의 무리는 수천이다. 게다가 대장로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으니, 정면에서 힘을 빼는 것은 적이 바라는 덫에 걸려드는 꼴이다. 우리의 정예 병력을 무의미하게 소모할 수는 없다.”


하진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 가상의 서고, ‘기억의 궁전’이 빠르게 회전했다. 뇌리 속에서 천마전 지하 밀실의 고대 설계도(天魔殿 地下 密室의 古代 設計圖)가 입체적으로 펼쳐졌다. 초대 천마 독고현이 설계한 흑월곡 요새의 모든 비밀 통로와 함정 장치들이 하진의 시각적 기억 장치 위에서 한눈에 분석되었다.


‘뇌신당(雷神堂)…….’


하진의 눈이 번뜩였다. 수십 년 전 벼락을 맞아 소실된 후, 교단 내에서 귀신이 나온다며 철저히 봉인된 오래된 목조 신전. 그 불길한 금역의 지하 깊은 곳에는 과거 마교가 황실의 침공에 대비해 매설해 둔 어마어마한 양의 군용 화약이 잠들어 있었다. 설계도상에 기록된 그 화약고의 좌표와 제어 장치가 하진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독고린, 잘 들어라.”


하진은 나지막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어조로 명령을 내렸다.


“철가면대를 이끌고 외곽 성벽에서 완강히 저항하는 척하다가, 서서히 밀리는 연기를 하며 퇴각해라. 적들의 시선을 천마전이 아닌 뇌신당 방향으로 유도해야 한다.”


“뇌신당 말씀이옵니까? 하지만 그곳은 소실된 폐허에 불과합니다. 폭도들이 어찌 그곳으로 가겠습니까?”


“임소승을 시켜 밑바닥 교도들 사이에 소문을 퍼뜨려라. ‘천마가 무공을 잃고 교단의 진짜 보물과 신물들을 뇌신당 지하 비고로 모두 옮겨 숨겼다’고 말이다. 탐욕에 눈이 먼 폭도들은 텅 빈 천마전보다 보물고가 있는 뇌신당으로 먼저 달려들 것이다.”


하진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그들이 스스로 뇌신당이라는 거대한 사지(死地)로 걸어 들어오게 만드는 거다.”


독고린은 하진의 끝없는 지략에 전율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존명! 주군의 뜻대로 퇴각전을 설계하겠나이다!”


독고린이 신속하게 사라진 뒤, 하진은 임소승을 바라보았다.


“소승아, 너는 즉시 지옥마 백강의 잔당들을 이용해 소문을 퍼뜨려라. 폭도들이 뇌신당으로 진격하는 순간, 너희 정보원들은 외곽의 퇴로를 차단해야 한다.”


“목숨을 걸고 완수하겠나이다!”


임소승 역시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홀로 남은 하진은 가슴의 통증을 참으며 휠체어의 바퀴를 굴려 어두운 천마전 복도를 지나 뇌신당으로 향하는 비밀 통로로 진입했다. 전신을 옥죄는 냉기와 오장육부의 통증이 매 순간 그의 의식을 흐려놓았지만, 철가면 속의 눈빛만은 불꽃처럼 타올랐.


‘힘이 없는 자가 살아남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적들의 마음속에 도사린 탐욕과 공포를 완벽하게 지배하는 것.’


그 시각, 천마전 외곽 성벽은 아수라장이었다.


“밀어붙여라! 성벽이 무너진다!”


위천패가 광풍마도법(狂風魔刀法)의 검붉은 도강을 사방으로 휘두르며 소리쳤다. 그의 참마도가 성벽의 돌가루를 깎아내며 친위대원들을 압박했다. 돌격대장 맹호는 기골이 장대한 거구로, 백 명의 교도가 매달린 거대한 통나무 파성퇴를 혼자서 어깨에 멘 채 성문을 사정없이 들이받고 있었다.


쿵-! 쿵-!


독고린은 묵철검을 휘두르며 처절한 방어전을 펼쳤다. 강철 방패를 앞세운 친위대원들이 폭도들의 진격을 막아섰으나, 동창(東廠)으로부터 은밀히 지원받은 화약이 성벽 측면에 투척되며 굉음과 함께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


콰아아앙-!


“성벽이 뚫렸다! 들어가자!”


폭도들이 함성을 지르며 부서진 장벽 사이로 해일처럼 밀려들어 왔다. 친위대원들이 쓰러지고 비명이 계곡을 메웠다. 독고린은 하진의 명령대로 묵철검을 거두며 단호하게 외쳤다.


“퇴각하라! 교주님의 신물을 지키기 위해 뇌신당으로 퇴각하라!”


그 외침은 폭도들의 귀에 명확하게 내리꽂혔. 동시에 임소승이 미리 심어둔 밀정들이 군중 속에서 소리쳤.


“천마가 보물들을 뇌신당 지하 비고로 옮겼다! 천마전은 빈 껍데기다! 보물을 차지하는 자가 새로운 교주가 될 것이다!”


탐욕에 눈이 먼 폭도들의 시선이 일시에 뇌신당 방향으로 쏠렸다. 위천패와 맹호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도망치는 독고린의 친위대를 쫓아 뇌신당으로 군세를 몰아 돌격하기 시작했다.


수천 개의 횃불이 자욱한 안개 속을 헤치며 봉인된 신전, 뇌신당의 낡은 목조 마당으로 들이닥쳤다.


뇌신당 내부.


오래된 먼지와 거미줄이 가득한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신전 중앙 제단 위에, 연하진은 홀로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그의 은빛 철가면 위로 열린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횃불의 붉은 화염이 어지럽게 반사되었다. 주변에는 그를 호위하는 무사 한 명 없었다. 완벽한 고립이자 포위였다.


쾅-!


뇌신당의 거대한 목조 정문이 맹호가 휘두른 파성퇴에 의해 무참히 부서져 내렸다. 부서진 문틈 사이로 수천 명의 폭도들이 뇌신당 내부를 가득 메우며 하진을 겹겹이 포위했다.


“가짜 천마 놈, 드디어 찾아냈구나!”


위천패가 피 묻은 참마도를 겨누며 오만하게 웃었다. 거구의 맹호 역시 거대한 통나무를 바닥에 쿵 내려놓으며 살기 어린 안광을 번뜩였다.


수천 개의 횃불이 내뿜는 열기와 폭도들의 광기 어린 함성이 뇌신당의 어두운 천장을 뒤흔들었다. 그 살풍경한 열기 속에서도, 휠체어에 앉은 하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철가면 뒤에 숨겨진 그의 포커페이스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그의 왼손은 천천히 은빛 철선의 끝자락을 매만지고 있었다.


맹호가 거대한 파성퇴를 다시 어깨에 메고 하진의 휠체어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일촉질발의 순간, 하진의 뇌리 속에는 뇌신당 지하에 매설된 거대한 화약고의 도화선 장치가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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