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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와 신념의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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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슬 퍼런 검날이 대기를 찢으며 연하진의 정수리를 향해 수직으로 낙하했다. 대장로 독고용이 보낸 살수의 검 끝에는 뼛속까지 시린 살기가 응축되어 있었다. 찰나의 순간, 하진의 뇌리 속 ‘기억의 궁전’이 미친 듯이 회전했다. 자객의 신형, 도약의 높이, 검이 그리는 궤적과 속도. 모든 물리적 수치가 하진의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계산되어 펼쳐졌다.


‘피할 수 없다.’


하진의 몸은 구음절맥(九陰絶脈)의 절폐 상태였다. 단 한 푼의 내공도 없었으며, 갈홍이 지어준 구음단(九陰丹)의 독성 부작용으로 장기가 서서히 타들어 가고 있었다. 오른손은 감각이 죽어 휠체어 팔걸이에 굳어 있었고, 왼손만으로 피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미세하게 움직이기만 해도 자객의 검강이 그의 가냘픈 신체를 고철처럼 짓이기리라.


그러나 하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은빛 천마 철가면(은빛 천마 철가면) 뒤에 숨겨진 그의 창백한 안색은 지독하리만큼 고요했다. 그는 도망치는 대신, 오히려 왼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유설아의 숨이 턱 막혔다. 그녀는 천마가 직접 검을 뽑아 자객을 멸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아미파의 절정 고수인 그녀조차 반응하기 힘든 찰나의 기습이었다.


하진은 왼손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딱-


대나무 숲의 차가운 정적을 깨뜨리는 맑은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와 동시에, 하진의 등 뒤에 드리워진 자욱한 안개 속에서 한 줄기 칠흑 같은 그림자가 실체화되었다. 전임 천마 독고혈이 평생을 바쳐 키워낸 어둠 속의 살수, 귀영(鬼影)이었다. 귀영은 하진이 보낸 비밀 수신호를 완벽히 감지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스릉-!


빛을 흡수하는 암살용 비수 무영도(無影刀)가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그어졌다. 그것은 무공의 기세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극의의 신속 살수였다. 자객의 검날이 하진의 철가면 정수리에 닿기 직전, 귀영의 그림자 검선이 자객의 목덜미를 가로질렀다.


툭.


자객의 잘린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져 낙엽 위를 굴렀다. 목 없는 신형이 분수처럼 피를 뿜으며 하진의 휠체어 옆으로 쓰러졌다. 귀영은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 다시 안개 속으로 소리 없이 녹아내려 자취를 감췄다. 처음부터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완벽한 은형(隱形)이었다.


유설아는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빙우검(氷雨劍)이 파르르 떨렸다.


“무…… 무형검기(無形劍氣)?”


그녀의 눈에는 천마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만으로 대기를 갈라 자객의 목을 벤 것처럼 보였다. 내공의 흐름도, 검의 궤적도 감지되지 않았다. 공간 자체가 천마의 의지에 따라 오려져 나간 듯한 신화적인 무공. 그것은 무당의 태극혜검도, 아미파의 수선검법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신의 경지였다.


유설아는 자신도 모르게 검을 떨어뜨렸다. 챙강 하는 금속음이 대나무 숲의 고요를 깨뜨렸다. 그녀의 무릎이 바닥으로 꺾이려 했다. 눈앞의 존재는 인간이 아니었다. 강호의 상식을 파괴하는 심연의 괴물이었다.


하진은 목에 부착된 은판의 위치를 미세하게 조절하며 복화술 발성을 가동했다. 사방의 대나무 돌기둥을 타고 반사된 목소리가 웅장한 천마의 위압감(허장성세)을 연출했다.


“정의를 부르짖는 자들의 기세가 이토록 가볍다니. 대장로 독고용의 쥐새끼 한 마리조차 감지하지 못하고 칼을 떨어뜨리는구나, 아미파의 여협이여.”


유설아는 이마를 바닥에 조아릴 뻔한 공포를 억누르며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사향백초(사향백초)의 독향이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고, 하진이 전개한 허상 천마압(虛像 天魔壓)이 그녀의 단전을 짓누르고 있었다.


“천마…… 독고혈…… 정녕 네놈은 괴물이란 말이냐?”


하진은 차가운 안광을 번뜩이며 휠체어 옆 탁자 위에 작은 목조 바둑판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왼손으로 옥빛 바둑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바둑판 사지 배치술(棋局 死地)의 시작이었다.


탁.


하진이 바둑판 중앙에 돌을 내려놓았다. 그 소리는 유설아의 흔들리는 호흡 주기에 완벽하게 동조되어, 그녀의 심장을 직접 타격하는 듯한 둔탁한 통증을 안겨주었다. 호흡 동조 가스라이팅이었다.


“남궁무쌍(南宮無雙)은 흑철광산의 이권을 탐내어 대장로 독고용과 결탁했다. 그리고 조정의 사냥개 동창(東廠)의 수장 장무기는 그 틈을 타 정사와 사파의 공멸을 유도하고 있지. 이 바둑판의 흑돌이 무림맹이라면, 백돌은 마교다. 하지만 판을 쥐고 흔드는 손은 황실의 동창이란 말이다.”


하진은 바둑판 위에 흑돌과 백돌을 정교하게 배치하며, 동창이 설계한 이이제이의 진형을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유설아의 눈동자가 바둑판의 배치에 따라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럴 리가…… 무림맹주 백현진 대협께서 그런 음모를 묵인하셨을 리 없다!”


“맹주 백현진은 눈이 멀었을 뿐이다. 그의 등 뒤에서 남궁무쌍이 세작 청풍(靑風)을 조종하여 마교와의 전쟁을 획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네놈은 정녕 모른단 말이냐?”


하진은 품속에서 세작 청풍의 진짜 배후가 적힌 극비 장부의 사본을 던져주었다. 낙엽 위에 떨어진 종이에는 남궁세가의 비밀 직인과 동창의 내통 흔적이 붉은 먹새로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유설아는 종이를 주워 들었다. 글자 하나하나를 읽어 내려갈 때마다 그녀가 평생 믿어온 정파의 정의가 추악한 위선으로 변해 부서져 내렸다. 남궁세가가 마교의 흑철을 밀수입하고, 동창의 자금을 받아 전쟁을 준비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물증이었다.


“우리는…… 우리는 그저 조정의 사냥개가 되기 위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단 말인가?”


유설아의 눈에서 절망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천마를 응시했다. 은빛 철가면 뒤의 눈빛은 잔혹한 마두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림의 멸망을 막기 위해 스스로 악마의 가면을 쓴,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지배자의 눈빛이었다.


“천마 독고혈…… 당신은 이 파멸을 막기 위해 홀로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까?”


하진은 대답 대신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유설아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 복종의 사슬을 채웠다.


“검을 쥔 자들은 명예라는 허상에 갇힌 노예일 뿐이다. 진정한 평화는 칼날이 아닌, 판을 지배하는 지혜에서 태어나는 법. 유설아, 네놈은 제국의 사냥개가 되어 무림의 씨를 말릴 테냐, 아니면 본좌의 눈이 되어 황실의 음모를 파쇄할 테냐.”


유설아는 바닥에 떨어진 빙우검을 거두어 허리에 찼다. 그리고 하진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정사와 신분을 초월한, 가짜 천마와 정파 여협 간의 비밀 상호 보장 동맹이 체결되는 순간이었다.


“제가…… 무림맹 내부의 남궁무쌍과 동창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당신의 눈과 귀가 되겠습니다. 이 강호의 파멸을 막아주십시오, 천마.”


그녀는 비장한 결의를 남긴 채, 자욱한 대나무 숲의 안개 속으로 신형을 날려 소리 없이 사라졌다.


스으으으…….


그녀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대나무 잎사귀 부딪히는 소리만이 적막을 채웠을 때.


“우웁, 윽……!”


하진의 몸이 휠체어 위로 꺾이며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철가면 슬릿 너머로 억누르던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극심한 기세 연출과 구음단의 지속 시간 초과로 인해 그의 심맥은 한계에 달해 있었다.


하진은 가슴을 쥐어짜며 입가로 흘러내리는 검은 피를 참지 못하고 각혈했다. 붉은 호피 담요 위로 핏방울이 검게 물들며 성에가 끼기 시작했다. 그의 창백한 왼손이 피로 물든 채 덜덜 떨렸다. 1초만 늦었어도 자객의 검에 목이 날아갔을 절체절명의 위기였고, 육체는 이미 파멸의 문턱에 걸쳐 있었다. 하지만 가짜 천마의 은빛 철가면은 여전히 차갑고 장엄하게 빛나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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