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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 뒤의 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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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전(天魔殿)의 어둠은 깊고도 차가웠다.


방금 전 의선 갈홍이 조제해 바친 비약, 구음단(九陰丹)의 기운이 뒤틀린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하진의 가슴속에 도사린 한기를 서서히 얼려갔다. 뼛속까지 시리던 통증이 마취된 듯 둔해지는 감각. 그러나 하진은 알고 있었다. 이 기적 같은 편안함의 이면에서, 그의 오장육부는 천천히 부식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생명을 담보로 산 일시적인 활력이 은빛 철가면 뒤의 창백한 뺨에 기묘한 생기를 붉게 띄웠다.


“주군.”


침묵을 깨고 천마전의 침전 벽면이 소리 없이 열렸다. 이중간첩 시녀 매향도, 늙은 벙어리 시종 아복도 모르게 설계된 극비의 통로였다. 그 어둠을 뚫고 헐떡이며 기어들어 온 사내는 온몸이 땀과 흙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하진의 가장 충직한 심복이자 마교의 외당 정보 단주로 초고속 승진한 임소승(林昭升)이었다.


“소승아, 무슨 일이냐.”


하진은 목에 밀착된 은판을 진동시켜 천마의 웅장하고 깊은 음성공 복화술을 전개했다. 사방의 청동 공명판을 타고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임소승은 황급히 바닥에 엎드려 이마를 찧었다.


“주, 주군! 대장로 독고용(獨孤勇)의 밀사가 움직였습니다! 실각당한 대장로가 교단 전체를 파멸시키기 위해 정파 무림맹의 강경파 수장인 남궁무쌍(南宮無雙)에게 극비 밀지를 보내려 획책하고 있었습니다!”


철가면 슬릿 너머로 하진의 안광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독고용. 장로회에서 자신의 온갖 비리와 매교 반역죄가 폭로되어 권위를 잃고 실각당하자, 결국 최악의 악수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옥좌에 앉아 있는 천마가 무공이 전혀 없는 가짜 서생 대역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무림맹에 밀고하여 정사 대전의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려는 음모.


만약 무림맹의 호전파들이 이 정보를 믿고 흑월곡(黑月谷) 총단을 전면 침공한다면, 무공을 전혀 못 쓰는 하진의 기만극은 그날로 파탄이 날 것이며 마교는 속수무책으로 붕괴할 터였다. 하진은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휠체어의 팔걸이를 굳게 움켜쥐었다.


“밀사는 어찌 되었느냐.”


“그것이…… 대장로 직속 무사들의 무력이 생각보다 너무 강했습니다. 소승이 이끄는 하급 정보원들이 기습을 감행했으나, 실력의 격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대원 서너 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밀사를 직접 생포하는 것은 실패했으나, 다행히 그들과 접촉하려던 무림맹 세작망(武林盟 世作網)의 연락책을 생포하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임소승이 품속에서 붉은 비단에 싸인 얇은 대나무 판을 꺼내 바쳤다. 그것은 정교한 격자 구멍이 뚫린 대나무 조각, 바로 ‘무림맹 세작의 암호판(武林盟 世作의 暗號板)’이었다.


“그리고 연락책의 품에서 이 암호판과 함께, 무림맹 본진으로 보내려던 극비 밀지가 적힌 가죽 패치를 압수했습니다. 주군, 이 암호를 풀지 못하면 적들의 진짜 군사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진은 임소승이 바친 대나무 격자 암호판을 건네받았다. 손가락 끝으로 만져지는 대나무의 차가운 질감. 머릿속 가상의 서고인 ‘기억의 궁전’이 즉각 회전하기 시작했다. 과거 가문의 방대한 서고에서 탐독했던 중원 각 문파와 군부의 암호 체계, 그리고 무림맹 정보부가 사용하는 격자 암호의 기하학적 배치 공식들이 머릿속에서 실시간으로 스캔되어 펼쳐졌다.


‘무림맹의 격자 암호판…… 대나무 살의 간격은 사 장 삼 푼, 구멍의 개수는 서른여섯 개. 이것은 도가의 주역 팔괘를 기반으로 한 변형 암호다.’


하진은 압수된 가죽 패치 위에 대나무 격자판을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리고 격자판을 시계 방향으로 두 번, 역방향으로 한 번 미세하게 회전시키며 겹쳐진 글자들을 정렬했다. 격자 암호 대입술(格子 暗號 代入術)의 시동이었다.


구멍 사이로 무의미해 보이던 안부 인사의 글자들이 사라지고, 붉은 먹으로 쓰인 진짜 밀지의 내용이 하진의 안광에 박혀들었다.


[천마는 무공이 없는 가짜 서생이다. 대장로의 밀지가 도착하는 즉시 흑월곡 침공을 개시하라. 선봉대는 이미 북악 관문에 매복 완료.]


해독된 내용을 읽는 순간, 하진의등 뒤로 식은땀이 서늘하게 흘러내렸다.


남궁무쌍의 진격 준비는 끝났다. 대장로 독고용의 밀서가 그의 손에 들어가는 그 찰나, 정파의 대군이 흑월곡의 요새를 피로 물들일 것이다. 무공이 없는 하진으로서는 단 한 명의 정파 일류 고수조차 정면으로 상대할 수 없었다.


‘남궁무쌍은 명예욕이 강하지만, 그만큼 의심이 많고 신중한 정치가다. 그 성격적 약점을 파고들어야 한다.’


하진은 휠체어 옆 탁자에 놓인 붓을 들었다. 그리고 가죽 패치 위에 적힌 남궁세가 특유의 서체를 눈으로 정밀하게 분석한 뒤, 완벽하게 모사하기 시작했다. 서생으로서 평생 단련해 온 필법이 기만 무협의 가장 날카로운 비수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하진은 암호판의 격자 구멍 위치를 정확히 계산하여 역정보(逆情報)를 작성해 나갔.


[천마의 무공 상실 소문은 대장로파를 숙청하고 정파 무림맹을 흑월곡 협곡으로 유인하여 일망타진하기 위해 교주가 직접 설계한 가짜 미끼다. 대장로 독고용은 이미 교주의 함정에 걸려들었으니, 절대 진격하지 말고 본진을 대기시켜라. 진격 시 아군 전멸의 화를 피할 수 없다.]


정교하게 위조된 서신을 가죽 패치에 덮어씌운 하진은, 대나무 격자판을 겹쳐 보았다. 완벽했다. 암호판을 대입하기 전에는 평범한 가문의 안부 서신처럼 보이지만, 암호판을 올리는 순간 남궁무쌍의 진격을 얼어붙게 만들 공포의 역정보가 드러났다.


하진은 위조된 가죽 패치를 다시 붉은 비단에 싸서 임소승에게 건넸다.


“이 위조된 밀지를 가로챈 세작망의 정보 통로를 통해 역으로 무림맹에 흘려보내라. 남궁무쌍이 이 서신을 읽는 순간, 그는 자신의 의심증에 갇혀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임소승은 하진이 순식간에 암호를 해독하고 적의 군사 행동을 묶어둘 기상천외한 역정보를 창조해 내는 광경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공은 없으나, 천하의 고수들을 손바닥 위에 두고 조롱하는 주군의 지혜는 그야말로 신비에 가까웠다.


“존, 존명! 즉시 외당의 은밀한 연락망을 통해 무림맹 세작망의 상층부로 이 가짜 밀지를 전송하겠습니다! 적들의 진격을 완벽히 묶어두겠습니다!”


“가라. 그리고 부상당한 정보원들에게는 외당 상단의 자금으로 백골고를 지급하고 충분한 포상을 내려라. 교단을 지키는 것은 칼을 쥔 장로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를 흘리는 너희들이다.”


하진의 따뜻한 배려에 임소승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 목숨, 주군을 위해 바치겠나이다.”


임소승이 소리 없이 장막 뒤의 통로로 사라졌다. 천마전 내부에 다시 고요한 어둠이 찾아왔다. 하진은 휠체어 기댈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궁무쌍의 대군은 묶었으나, 첩보망을 가동하기 위해 교단의 외당 자금을 다량 소모했고 정보원들의 신분이 노출될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기만극의 대가는 언제나 가혹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구음단의 차가운 불꽃이 다시 한번 일렁이며 하진의 기침을 유도했다. 하진은 철가면 너머로 흘러내리는 핏자국을 소매로 닦아내며 혼자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직…… 쉴 수 없다.”


바로 그 순간, 퇴각했던 임소승이 비밀 통로의 석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다시 천마전 내부로 뛰어들어왔. 그의 얼굴은 이전보다 백 배는 더 파랗게 질려 있었다.


“주, 주군! 큰일입니다! 미처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하진의 안광이 좁혀졌다. “진정하고 말하라.”


“무림맹 내부에서 독자적으로 마교의 이상 동태를 조사하던 아미파의 차세대 여협, 유설아(柳雪兒)가…… 남궁무쌍의 본진 명령도 거부한 채 홀로 흑월곡 입구 경계선까지 은밀히 침투했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이미 흑월곡 외곽의 환각의 미로 지대로 진입했습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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